변산 마실길을 걸으며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by 좋은만남 posted Feb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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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주년이 되었다고 무언가 기념이 될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찾아보다가 변산에 새로 뚫린 마실길을 함께 걷기로 하였다.
주일 오후에 출발하여 장장 5시간반만에 겨우 군산에 와서 저녁밥 먹고 다시 변산으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었다. 설날 연휴라고 해도 고속도로는 거의 주차장이었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변산 마실길의 출발점인 새만금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 차를 주차하고 안내표지를 따라 이동한다. 장장 3단계, 총 18Km의 대 장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평소에 별로 많이 걸어보지 않았기에 전코스를 다 걷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도전을 해보기로 하였다.

변산 마실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작년 10월에 개통한 길이라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 출발점이 초라하다는 느낌이다.



바다를 가로질러 총 33Km 길이의 새만금 둑이 멀리 흐릿하게 보였다. 엄청난 바다가 메꿔지고 대단위 무슨 단지가 들어설 계획이라는 정부의 발표가 생각났다.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흉물스럽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드디어 마실길이 시작된다. 1단계 코스의 출발점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마실길은 썰물 때는 바다길로 걷고 밀물 때는 해변의 산길이나 도로를 따라 걷는다. 우리는 다행히 썰물 때 맞춰와서 1단계 코스를 바다길로 걸을 수 있었다.



곳곳에 펼쳐지는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해변길로 걸을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바닷물이 장구한 경사를 통해 만들어 놓은 예술작품이 계속된다. 참으려해도 저절로 '와~아!'하는 경탄이 흘러 나온다.



바닷바람이 매서웠다. 그래서인지 소라들이 똘똘 뭉쳐있다. 서로의 체온을 그리워하듯이!



바닷물이 드나들면서 모래사장에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화가이신 우리 고모부가 그리셨던 추상화 같기도 하다.

약 한 시간만에 종착지점 부근인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철지난 해수욕장은 쓸쓸하다. 쓸쓸한 해수욕장을 지키는 것은 새만금을 반대하는 피켓들이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구호들 같지만 침묵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바닷가 한 구석에는 경찰용 호버크래프트가 서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에는 바람을 몰아치면서 물위를 날아다녔을 물건이지만 지금은 그저 묵묵히 구석자리에 비켜있다. 모든 것이 다 제 때가 있는 법이다.

변산해수욕장 구석부분에서 1단계 코스의 종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2단계 코스의 시작은 어디인지 어리둥절하다. 다행히 마실길임을 알리는 작은 이정표를 발견했다.

송포배수펌프장을 지나니 2단계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가 산길 언덕 위에 눈에 띈다. 물이 많이 들어와서 바닷길은 단념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산길이다.

산길은 군부대의 경계철책을 따라 걷는 길이다. 길도 군인들이 파 놓은 참호인 듯하다. 철책망 사이로 보이는 경치는 청책과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분단국에 사는 현실이 아쉬운 한숨을 자아낸다. 분단국에 사는 백성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제한적이어야 하나보다.

푸루른 파밭은 지난다. 그리고보니 눈과 얼음이 녹은 질척한 길가에도 파르란 새싹들이 잔뜩 나와 있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세차게 부딪혀오지만 분명 봄길이다. 입춘도 지났겠다. 봄이 이미 발걸음을 시작했나보다.

산길과 동네길을 한 시간 가량 왔더니 고사포라고 쓰인 돌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고사포 해수욕장이면 2단계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이다. 돌기둥 뒤편을 따라 다시 잘 다듬어진 참호가 이어진 산 길을 따라 걷는다.

고개를 넘어가니 원광대학교 수련원이다. 몇 사람이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주위를 서성댄다. 젊은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찍어주고 나서 우리도 한 장 부탁했다.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길 오르막 내리막을 두 시간 걸어왔더니 목골이 말이 아니다. 고사포 해수욕장이 2단계 종착점이라고 들었는데 종참적 표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보도블럭을 잘 다듬어 깔은 소나무 숲길이 운치 있어 힘이 솟는다. 아름다운 길이다.

종착점 표지를 찾아 계속 가다보니 갑자기 길이 겉돈다. 군부대 출현이다. 해상침투훈련장이라나!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훈련장 안에는 큰 새 한마리가 유유히 거닐고 있다. 황새인가, 두루미인가? 황새나 두루미가 같은 새인가? 새도 추운지 목을 한껏 움츠리고 있다.

드디어 2단계 종점표지를 발견한다. 두 시간 이상 걸었더니 슬슬 다리가 저려온다. 식사도 그른채 과자 몇개와 초콜렛으로 요기를 하면서 걸어온 길이니 힘들만도 하다. 새로 만들어진 길이라 그런지 아직 중간중간에 쉼터나 주막 같은 것이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핑계 김에 벤치에 퍼질러 앉아 잠시 쉬었다.

더 나아가니 이번에도 농업용수 펌프장 같은 곳에서 마지막 3단계 출발을 알리는 표지가 눈에 띈다. 바닷길을 걸어왔고 산길을 걸어왔는데 이번 길은 농로이다. 농수로를 따라 걷고 눈두렁을 따라 걷기도 한다. 마실길은 길마다 테마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걷는 일이 즐겁게 느껴진다.

이정표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리본도 안 보인다. 외떨어진 곳에서 순간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 겸손한, 이정표라고 하기엔 뭔가 아쉬운 막대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거라도 있으니 방향을 잡는다. 우스운 모양새지만 생각해보니 감사하다.

논두렁을 따라 걸으니 허수아비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가장 압권인 허수아비는 폭주족 허수아비이다. 오토바이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헬멧만 쓰고 있는 모습에 잠시 배꼽을 잡았다.

큰 나무를 뒤덮은 덩쿨, 아마도 왜래종인 가시박일 것이다. 가시박은 이처럼 주변의 나무들을 다 뒤덮어 질식사시킨다. 먹고 먹히는 냉혹함이 자연의 원칙이라지만 뭔가 아쉽고 답답하다. 품종개량을 위해 들여온 외래종이 유출되면서 우리 국토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현실은 사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마을 길을 한참 따라 걷다 보니 마실길과 군부대의 갈림길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군부대! 또 마음이 먹먹해진다. 평화를 위한 군대라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군대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의 이 평화로운 행진을 가로 막고 있지 않은가! 치기어린 불평이랄 수도 있겠지만, 군대 없는 세상에서 사는 평화의 꿈을 잠시 꾸어본다. 여기서부터는 한참이나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위험하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기 시작한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다가 저 아래 제법 운치 있는 나무난간이 보여 뭔가 확인하기 위해 길을 벗어나 내려갔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게단의 난간이었다. 여기까지 온김에 내려가보자고 했는데 뜻밖의 횡재이다. 거센 바람에 밀려온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하늘 높이 띄워 날린다. 잠시 동안의 이탈이었지만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던 피로를 잊기에는 충분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적벽강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도로를 벗어난다. 멋드러진 경관이 펼쳐진 곳에 난간과 벤치가 잘 조화되어 있었다. 정말 힘들기 시작하는데 이제 좀 쉬자고 배낭을 벗고 앉았다. 배를 한 쪽씩 나누어 먹었다.

저만치에 관갱객들의 승용차가 몇 대 서 있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한다. 뭘까 하는 마음에 그리로 가보기로 하였다. 허름한 목조주택이 있고 그 옆으로는 두 개의 큰 바위 틈으로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멋있는 경치가 아래쪽으로 펼쳐졌다. 우리는 둘다 동시에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바닷길쪽에서 봤더라면 더 큰 함성이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허름한 목조건물을 수성당이라고 한다. 선사시대 이후부터 바다를 관장하는 할미에게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고 한다. 키가 큰 할미는 바다에 들어가도 물이 버선까지밖에 차지 않았을 정도하고 한다. 이 건물 안에서는 한참 굿을 하고 있는지 떠드는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절실한 바람은 이해하겠지만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박나무 군락지를 돌아나가니 무슨 해양종묘연구소인가 하는 곳을 지나 다시 자동차 도로로 이어진다. 그 중간에 죽막동 해안생태관찰지라는 바닷가가 있다. 해변의 돌은 모두 몽돌이다. 바도가 칠 때마다 파도소리에 뒤이어 돌맹이가 떼구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앉아 듣자니 재미있다.

대명콘도가 나온다. 콘도를 가로지르는 길을 지나니 해넘이 채화대라는 큰 돌기둥이 나타난다. 채석강 격포해수욕장이다. 참 힘들었던 3단계 코스도 이제 거의 종점이다. 가장 큰 유원지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고 생기가 넘친다.
격포해수욕장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닭이봉 전망대로 향한다.
정말 기진맥진이다. 이미 허벅지며 골반이 뻐근해진지는 오래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산길을 오른다. 닭이봉 전망대가 종착지로 알려져 있으니 서로를 부축하며 걸음을 옮긴다.

올라가는 길 가에 대나무와 동백나무들이 운치 있다. 한 동백나무를 보니 벌써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짙고 반짝이는 녹색 잎사귀 틈으로 빨갛게 오므린 꽃잎을 보고는 신기해 한다. 철을 모르는 미친 꽃이든지 아니면 봄의 전령사이려니! 그래도 아직 한기가 온전히 가신 것도 아닌데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닭이봉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는 뻥뚤린 구조여서 바닷바람, 산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한다. 바람이 어찌나 차갑고 센지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면서 경치에 잠깐 감탄을 하고 사진을 한 장씩 박았다.

전망대 주변에는 코스 종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었다. 유명한 유원지라서 안 만든 것인지, 우리가 잘 못 온 것인지, 아니면 못 찾은 것인지! 아무튼 없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데 더이상 그걸 찾아 나설 힘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새만금 전시관에 세워둔 차를 찾으러 가야 할 판이다.

내려오는 길에 터미널 쪽으로 내려오는 길로 들어섰다. 다 내려오니 한쪽 전봇대 밑에 뭔가 언뜻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마실길 2코스 종점 표지판이었다. 격포해수욕장에서 우리는 해변쪽 길을 통해 전망대에 오른 것인데 원래 마실길은 해수욕장 뒤편길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반갑고 뿌듯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터미널에서 사발면 한 그릇씩 먹으며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아내가 사전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 채석강 지역은 선캄브리아기에 만들어진 것이란다. 엣날 지구과학시간엔가 배웠던 기억이 나는 단어이다. 그 시간의 깊이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꽤 앞선 시대, 오래된 이야기인 것만은 알겠다. 아내는 '선캄브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경치를 너무 쉽게 본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나를 감동시킬만한 멋지고 깊이와 의미가 담긴 말을 하다니! 놀랐다. 그리고 잠시 숙연해졌다. 맞는 말이다. 그 긴 역사를 한 점도 찍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버스를 타고 새만금 전시관, 즉 출발점으로 향한다. 아뿔사, 겨우 15분, 20분만에 도착했다. 우리가 여섯 시간을 걸은 거리인데 단 15-2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허무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니 어찌 버스를 타고 자가용을 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루 종일 걸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우리가 빠른 생활에 익숙해지는 대신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너무 많다. 삶의 의미를 찾고 인생의 방향을 보게 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살았다.

온 몸이 다 뻐근했지만 마음은 넉넉해졌다. 꽉 찼음에도 오히려 넉넉해졌다. 작년에 한국기독교연구소 식구들과 지리산 둘레길의 한 자락을 걸어보았고 이번에 변산 마실길을 걸어보았으니 남은 것은 제주도 올레길인가? 언제 기회가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좋은 날에 좋은 경험을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 다음 10년을 든든히 살게 해주는 기억이 될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