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8일 주보

by 좋은만남 posted Apr 07,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80408-2.jpg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2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기적과 기쁨을 늘 체험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주시고 한 달 동안 삶을 통해 만난 은혜와 기도의 제목을 나누어 주십시오.
3.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열립니다. 차량운행을 위해 참여하실 분들은 미리 알려주시고 많이 참여해 주십시오.
4. 올해는 전가족 심방을 하겠습니다. 한 가정도 빠짐없이 일정을 정하셔서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십시오.
5. 4월 28일(토) 오후 12시 30분, 안주영 청년이 기독교연합회관 웨딩홀에서 결혼을 합니다. 축복해 주세요.
 
4월 생일] 남규현 어린이(12일), 송윤혁 집사님(15일), 박성중 목사님(18일), 
             정지수 집사님과 임정희 집사님(21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gmletter.jpg
 
다음주면 세월호 참사가 만 4년을 맞이합니다. 세월호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됨으로 세월호 사고의 원인 조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사실 그동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올해는 꼭 세월호 문제가 다 해결되고 유가족들, 실종자 가즉들의 한이 풀어지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지난 주간에 서울연회가 열렸습니다. 감리교회의 입법의회가 불법적으로 치러진 것에 대해 개혁적 목회자모임 새물결 소속 목사님들이 감리교회 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지만 결국 기득권 세력에 의해 기각되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연회에서 홍보활동을 하였습니다. 서울연회에서도 하였는데 그때 한 원로장로님이 홍보활동을 하는 목사님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 뱃지를 문제삼으면서 계속 시비를 걸었습니다. '단순 해상 교통사고'이고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왜 그 뱃지를 달고 있느냐, 당장 뱃지를 떼라, 노란 리본 뱃지를 달고서 왜 교회에서 이런 활동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지켜보던 중 계속해서 반말과 시비를 거는 것에 참지 못하고 결국 그 원로장로님과 한바탕했습니다. 흥분해서 부르르 떨며 저더러 어느 지방, 어느 교회냐고 따져 묻는 그 장로님께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도 몇 번을 더 부딪혔습니다.
하필 안 입던 양복 저고리를 꺼내 입고 가는 바람에 제 양복 깃에는 뱃지가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뱃지를 달고 있었으면 저 역시 그 시비의 일차 대상이 되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쉬웠고 처음 시비를 당한 그 목사님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어느 분이 '곧 4.16이 다가오는데 저런 소리를 하는 양반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더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렇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보면 '당신 자식이나 손주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것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발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지만... 세월호가 이념 논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세월호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더 이상 이런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다가오는 4.16. 희생자와 가족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십시오.
 
news.jpg 
 
“생애 첫 성서를 선물하였습니다”

 

20180408_002.jpg 얼마 전 교회에 등록을 하신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부부께 지난 주일 성서를 한 권씩 선물로 드렸습니다. 등록교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다른 교회에서 이명해 오신 분들이라 성서를 이미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선물로 드리지는 않습니다만 이재원 성도님 부부는 원래 교회에 나가신 적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서 생애 첫 성서 선물을 드렸습니다. 우리교회 나무 교패와 성서를 받고 활짝 웃으시는 두 분을 보니 저도 참 기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드린 성서를 갖고만 계시지 말고 읽고 깨닫고 그 말씀을 새겨 말씀대로 사시기를 빕니다.
 
“드디어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20180408_003.jpg

 

4월 28일 결혼식을 앞둔 안주영 청년이 드디어 청첩장을 돌렸습니다. "꾸밈이나 거짓 없이 수수하게 덜 채우고 더 비우고자 합니다. 함께함이 어렵기도 하겠지만 같이 걸어가며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겠습니다..." 소박한 청첩장에는 "청첩장 제작비의 10%를 일본군 성폭력 피해 할머니들의 복지를 위해 기부하였습니다."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대견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다들 바쁜 일정이시겠지만 4월 28일 점심은 꼭 시간을 비워두시고 안주영군과 김수연양, 두 사람의 출발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김주열(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학생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 넷째로 태어나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뒤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같은 해 3월 마산에서 열린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로 세상에 알려지고 전국으로 번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묘소는 창원시 국립 3.15 민주묘지에 있으며 시신은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묻혔습니다. 사후 김주열을 기리는 범국민장이 사후 50년 만인 2010년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거행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자신이 모시던 사업가의 지프차에 실어 반공청년당 활동을 하던 민간인들과 마산항 부두쪽으로 옮긴 운전수 김덕모씨가 양심선언을 하고 국립 3.15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헌화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양심선언으로 시신 유기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sslt.jpg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코브라가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총독부는 코브라를 없애는 묘안을 냈다.
코브라 머리를 잘라오면 그 숫자만큼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었다.처음에는 이 정책이 성공적인 듯이 보였다. 
잡아오는 코브라 수가 점차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혐오스런 뱀이 조만간 사라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정책을 실시한 지 1년이 지나고 또 2년이 지나도 
잡아오는 코브라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증가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총독부가 그 이유를 알아보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코브라를 잡기 위해 
집 주위는 물론 들과 산을 열심히 헤맸지만 
나중에는 집집마다 우리를 만들어서 코브라를 키우고 
그것들을 잡아서 보상을 받고 있었다.
총독부는 할 수 없이 코브라 제거 정책을 포기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집에서 키우던 뱀을 모두 내다 버렸고, 
코브라 수는 정책을 펼치기 전보다 오히려 수십 배로 증가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실시했는데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더욱 악화되는 현상을 ‘코브라 효과(cobra effect)’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일을 했을 때 파급효과는 어떤 것인지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졸속적으로 대책을 세우고 시행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어떤 일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효과는 물론 역효과의 가능성까지 다차원적으로 따져봐야 합니다. 
아울러 시행하는 단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 초기부터 잘 살피고 적절히 보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깊은 고민 없이 세운 1차원적인 대책으로는 결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단 한 방’에 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kmcthe0.jpg 
 
제5장 
예수 그리스도Ⅱ (2)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학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자, 왕, 제사장으로 나누어 삼중직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으므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셨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제사장이시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므로 왕이라고 고백하였다. 존 웨슬리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예언자로서, ‘세상의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들에게 오직 순간순간 외에는 빛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 떠나가시는 순간, 모든 것이 흑암이 된다. 그들은 아직도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쌓아둘 거룩함을 주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직 매순간 보급을 받지 않으면 그들에게 거룩하지 아니함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거룩한 일들을 위해 속죄해 줄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완전한 성결이라도 하나님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사역을 삼중직이 아니라 대속자와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다. 대속자는 삼중직에서 제사장과, 구세주는 왕과 상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 대속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1)
     우리는... 대속자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자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구원의 문제에 근거를 두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으르 크게 두 개로 분류하여 본다면, 첫 번째는 자력구원(自力救援)을 추구하는 종교가 있고, 두 번째는 타력구원(他力救援)을 추구하는 종교가 있다. 자력구원이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고, 타력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인간 밖에 존재하는 전적인 타자, 초월자의 힘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아시아의 종교 중 링부에는 인간 구원(해방)을 위한 결정적인 씨앗들이 인간 안에 있음을 전제하면서 인간 스스로의 종교적 수양(깨달음)을 통한 구원의 강조하므로 자력구원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죄(원죄)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타력구원을 추구한다. 즉,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자신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전제하면서 인간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죄의 용서를 강조하면서 타력구원을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써 인간의 죄의 문제는 해결(용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감리회 신앙고백은 “대속자가 되시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는가? 물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십자가 사건을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시면서 속죄의 문제를 설명하였다. 그 첫 번째가 우주적 속죄론이다. 이 속죄론에 따르면, 속죄는 하나님과 이 땅에 있는 악의 세력 간의 극적인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악의 세력(사탄)에게 넘기셨고,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자신들의 세상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사탄의 세력을 누리시고 사탄의 포로들을 자유롭게 하셨다.(계속) 
 
bookspring.jpg
 
'4천원 인생'은 2010년 한겨레21에서 연재한 비정규직에 관한 기획기사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4명의 기자가 각기 위장취업의 방식으로 현장에서 한 달 정도 직접 노동을 하면서 써내려간 현장일기이다. 이 책에는 감자탕 집과 갈비집, 대형마트, 이주노동자, 컨베이어 조립공장 등에서의 노동자가 우리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어떻게 통용되고 취급되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관찰일지의 형식으로 가슴절절하게 말해주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더러운 세상!" , 

20180408_001.jpg

 

"더러운 새끼들!"이라는 말이 입가를 계속 맴돌게 되었는데, 내 어머니 인생의 절반이 식당 노동자였고, 내 아버지 역시 인쇄소, 주차장, 마을버스 등등을 전전하던 힘없는 날품팔이였으며, 나 역시 온갖 알바로 20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험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내게 지난날의 힘겨운 일상을 끄집어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 '非'라는 말의 무서움     
 매일 지기만 하는 '비정규직'의 특징은 '현재'를 몽땅 저당 잡힌 채 살아가지만 정작 '현재'가 없고, 끊임없는 삶의 '경쟁'에 내몰리지만 정작 '경쟁'의 규칙도 그에 따른 성과와 보상도 없고, 감정노동으로 머리와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일하지만 정작 '감정'이 없는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들에겐 정식 계약서도,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도, 직급도, 심지어는 이름도 없다. 그저 용역업체의 날품팔이, 파견직, 심지어 '불법'이라는 물건이나, 기계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난무한다. 인간임을 부정당하고, 차별이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용인되며, 일정한 질서와 규칙도 없는 이 비정상적인 시스템은 '非'라는 형용사가 붙여지며 의미지워 진다. 노예, 생체실험, 학살, 전쟁, 성매매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인간을 그저 인간의 껍데기를 한 '의사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시스템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출입국사무소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을 그저 이 사회에 필요한 만큼 '남겨두는'(160p) 미온적 태도와 살인적 태도의 반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는 마치 길고양이들을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도 고양이(자기의 반려동물)를 좋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고양이(도둑고양이, 밤마다 애기울음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증오하고, 고양이 청소를 단행해야 한다는 이중적 잣대는 결국 이 사회가 비정규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군대 제대 후 동일유통이라는 물류 회사에서 3개월 정도 일한 경험이 있는데, 전국의 편의점에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매일같이 물건들을 분류하고, 옮기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물류창고였다. 컨베이어 벨트가 지나가면 쌓아놓은 물건에 숫자가 뜬다. 예를 들어 서울 상암동지점 것이 지나갈 때 숫자 '5'가 뜨면 음료수 5박스를 내려놓는 것이다. 일은 간단하다. 내가 맡은 10개 종류의 물건을 정신없이 깜빡거리는 숫자에 맞춰 내려놓는 것이다. 약 하루 10시간 동안! 쉬는 시간은 두 시간에 10분 휴식, 점심시간은 1시간, 야근도 밥 먹듯이 한다. 불량이 나오면 호되게 욕을 먹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남는 시간 짬짬이 박스 정리, 창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120만 원 정도를 벌었다. 토요일도 5-6시까지 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에겐 '젊음'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저 알바였기 때문에 스스로 '절망'을 맛보지는 않았지만 '절망'하는 노동자들은 많이 만났던 것 같다. 부사장과 반장들의 횡포를 잊지 못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정규직의 일상이다. 내가 당시 그 아픔을 극복했던 방법은 친구들을 7명 정도 데려오는 일이었다. 어차피 할 거, 친구들이랑 놀면서 일했고, 쉬는 시간에 우리끼리 고기도 구워먹고, 축구도 하고, 야근 수당도 따냈다. 역시 머릿수가 중요하다.(서로 끈끈하게 대할 수 있는 공동 운명체 같은 이들이어야 그나마 숫자라도 중요해지지) 섬 같이 따로 떨어져서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그 혹독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견딘다는 것은(262p)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주문만 더해 갈 뿐이며, 정작 본인자신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자존감 제로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이 시스템이 의도하는 부분이며, 결국 '非'라는 말의 칼날은 처음에는 남을 향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하게 된다. 이 망할 놈의 시스템이 그래 실제로 존재하지만 의미상 존재하지는 않는 거니까.        
          
□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노동의 유연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질서 가운데, 이 토할 것 같이 너무나도 유동적인 우리의 노동시장에서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한 치 앞의 '미래' 뿐이다. 아무리 달려 나가도 이 한치 앞의 미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므로 우리 삶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겐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시간이 그 날을 버티게 하는 실낱의 희망이며, 쥐꼬리만한 월급봉투는 한 달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오직 소비할 때만이 인간으로 취급받는(123p) 노동자들에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단 한 순간은 '소비'의 순간 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인간으로서 온당하게 받아주는 사회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그 '소비'의 순간을 위해 현실을 통째로 저당 잡히는 것이 오늘의 삶이다. '지금 이 순간' 카르페디엠을 외치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싸늘한 시선 뒤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파국의 미래를 겉 포장지로 쌓은 낙관론만이 무수한 세상에서, 기러기 아빠들이 하늘에서 춤을 추고, 버스정류소에는 '지금 잠이 오십니까?'라는 보험회사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현실에서, 과연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 전체가 미래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규직이면서도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이순간이 중요하다는 말이 오히려 이들에겐 고통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이 무슨 중세시대 노예 노동의 현장이란 말인가! 이승의 삶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요. ‘저 천국으로 우린 함께 가겠네’라고 설교하던 역겨운 백인 수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미래'만을 이야기 하는 세상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 왠지 기분 나쁜 진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관찰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때론 매우 잔혹하다. 그것이 개인적인 관계나 애정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로 접근하거나, 어떤 당위적 목적을 지닌 채, 그 온당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시도는 자칫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네 명의 기자가 투철한 저널리즘을 가지고 한 달씩이나 위장 취업하여, 비참한 노동현장을 온몸으로 폭로한 이 치열한 기록 속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나의 사촌 여동생과 작은 어머니를 발견한다. 그러다 보니까. 이 진실의 기록에서 공감보다는 굉장한 괴리감을 느낀다. 책 속에서 고군분하는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는 가난하지만 위대한 삶의 열정을 지닌 나의 어머니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새벽부터 오늘 하루의 행복을 위해 다짐하고, 미소로 ‘잘 다녀 올께’를 이야기하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구조에 편입되려하지만 결국 ‘비’인간이 되어 버린 실패자들의 기록들만이 즐비하다. 
 물론 비참한 현실에 대한 폭로는 누군가가 ‘에이 설마?’하며 오하지 말라고 얘기 할 때,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 성폭력 생존자들은 실제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비해 훨씬 축소하여 이야기 하는 경향도 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까봐. 
 아무도 믿지 못 할 만큼이나 잔인한 현실이지만, 요즘 편의점 노동자로 살아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작은 편의점 안에 가둬둘 수 없는 꿈과 희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사람만이 희망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국민들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354일만에 내려진 재판 1심에서 권한남용과 뇌물수수 등 열여섯 가지 혐의의 유죄판결로 징역 2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우롱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못된 대통령이 선출되지 못하도록, 그런 사람을 지지하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지 않도록 깨어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