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의 이끄심과 감동, 서로 교제하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다음주일은 청소년주일 및 웨슬리회심기념주일로 지킵니다.
2. 오늘 오후에 예정되었던 생활과 묵상 나눔 기도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3. 수요일 오전 11시에는 수요성서대학이 열립니다. 이번주(23일)에는 파주의 벽초지문화수목원에서 야외수업으로 하겠습니다.
4. 6월 첫째 주일은 평신도주일로 공동설교를 하겠습니다. 자원하여 공동설교를 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5. 사랑방의 전가족 심방표를 확인하시고 심방일정을 기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6. 이재원 성도님의 부친 이순범 님이 지난 16일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강원도 홍천으로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많은 인원인 총 28명이 네 대의 차량으로 함께 참여하였고 인제에 계신 방인웅 장로님 내외도 나중에 오셔서 30명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고 한 콩나물국밥집이 미성년자 주류판매로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첫 계획부터 어긋나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모든 순서가 즐겁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각자 취향대로 아침식사를 한 후 공작산으로 가서 수타사를 대충 둘러보고 생태공원의 트래킹코스 산소(O2)기를 산책하였습니다. 삼삼오오 짝이 되어 걷기 좋은 산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뒤쳐져서 여기저기 관심을 보이는 청소년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올챙이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청소년들을 보니 아직 아이들이네요! ^^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다들 소나무 숲에 모여서 간식을 들고 계셨습니다. 한쪽에서는 어린이들 여섯 명이 한데 뒤엉켜서 그야말로 신나게 놀고 있었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자연 안에 있을 때 가장 건강합니다.
생태공원을 나와 작은촛불교회에서 예배를 하고 옆의 뮤즈 카페에서 박성율 목사님께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토지수용을 당하신 분이 호구지책으로 운영하시는 카페라고 합니다. 토지수용이 떼돈 버는게 아니라 결국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들 경악하셨습니다. 저녁식사는 유명한 양지말 화로구이집에서 잘 먹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처음처럼맑은회’라는 계모임도 결성이 되었답니다.^^ 어려움 없이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마음 모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2006년 5월 20일 "선거운동 중이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당하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가 경기도 군포와 인천 지원 유세를 마치고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중 19시 20분쯤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충호에게 피습당해 얼굴에 길이 11cm, 깊이 1~3cm의 창상을 입은 사건이다. 10cm 가량의 커터칼을 휘두른 지충호는 현장에서 붙잡혀 서대문 경찰서에서 범행 동기 등을 조사 받았다. 범인 지충호는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8건의 전과로 15년 가까이 복역하고 출소했으며 오랜 수감 생활이 억울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미 선거운동에서 앞서 나가던 한나라당은 동정표를 추가, 압승을 거두었고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명숙 전 총리 계란투척,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습, 최근의 김성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원희룡 제주지사 후보에 대한 폭행 등 정치인에 대한 피습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견해가 다르다 하여 반대파에 테러를 가하는 행위는 정치인 여부, 진영논리를 떠나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여론을 호도하고 동정심을 자극, 정 반대의 결과를 낳기 일쑤이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을 수렴, 정책에 반영해야 하는 의무를 외면하고 당쟁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소환제 등 국민적 심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제도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친하기로 소문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소한 문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몹시도 나빠졌다.
그들은 근 일 년 간을 서로 말도 안하고 못 본 척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마음을 돌이켰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그는 친구와 화해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그는 화해를 위해서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친구에게 화해의 편지를 썼다.
때로는 길게 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짧게 쓰기도 했다.
계속해서 십여 통의 편지를 보내었지만 친구에게서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따라 몹시도 추웠다.
그는 눈보라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친구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그는 결심을 했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친구를 직접 찾아가 보아야지!”
그는 눈보라의 거센 바람을 헤치면서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친구는 대문을 열면서 하얀 눈을 흠뻑 맞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친구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눈 녹듯이 녹아내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굳은 악수를 하고서 서로 화해했다.
그들은 예전의 절친했던 친구 사이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야 합니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글로도 부족하다면 찾아가야 합니다.
한 쪽의 문이 열리면 다른 쪽도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주일, 화해를 위해 주머니에 담고 있는 손을 내미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제6장
성령Ⅰ (3)
1.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2)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 성령을 믿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고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삼위의 하나님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분들로 모든 일들을 공동으로 하시면서도 각각의 독특성을 가지신다. 세 분의 하나님은 서로 소통하시면서도 각각의 독특성을 가지신다. 세 분의 하나님은 서로 소통하시면서 함께 공동으로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지만, 구체적인 사역에 있어서 세 분 중에서 한 분이 주도적으로 일을 하신다. 이 주도권에 있어서 세 분의 하나님은 차이성을 지닌다. 만약에 삼위 하나님의 차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단일신론(일신론)이나 군주론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반대로 세 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독특성과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양태론의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삼위 하나님의 차이성(독특성)을 세 분의 기원에서 찾았다. 성부는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자와 성령과의 차이성을 설명하였고, 성자는 성부로부터만 잉태된다는 점에서 성부와 성령과 차이성을 지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현한다는 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차이성을 가진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삼위의 하나님을 사역에 있어서도 독특성을 가진다. 창조의 사역에 있어서 성자와 성령은 동참하시지만 주도권은 성부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칭의의 사역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도 동참하시지만 주도권은 성자 하나님에게 있다. 신생(중생)과 성화의 사역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도 동참하시지만 주도권은 성령 하나님에게 있다.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사역의 주도권에 있어서 각각의 독특성을 소유하신다. 결국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신생), 거룩하게 하시고(성화), 완전하게 하시는(그리스도인의 완전) 사역에 있어서 주도적이라는 점에서 독특성을 지니신다.
성령의 또 다른 독특한 사역은 연합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창조 이전부터 서로 교통(Perichoresis)하시는 분이다. 이 교통을 통하여 삼위의 하나님은 연합하시는데, 교통과 연합의 사역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다.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자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을 연합시키시고, 하나님과 인간(세계)을 연합시키신다. 성부와 성자의 사역은 주로 우리들의 외부에 집중되어 있다. 성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창조와 섭리, 주관은 우리들의 내면 세계보다는 외부에 집중되어 있다. 성자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십자가의 사건도 이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들의 밖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내부, 내면의 세계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활동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부활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와 연결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다시 표현하고 드러내며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신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교통과 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듯이,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지금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과거의 사역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믿음 가운데 현재화된다.
성령은 누구이신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부활/승천하심으로 이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므로 삼위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고백에서 감리회 신앙고백의 “우리와 함께 계셔서”라는 고백은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내재, 현존)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일하심으로 성부 하나님도, 성자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로 읽어 가야 한다.
헐리우드의 재기발랄한 이야기꾼 마이클 무어 감독. 그는 주로 부조리한 세상의 단면들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일’에 매우 탁월하다. 특히 날카로우면서도 유쾌 통쾌한 특유의 풍자화법,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향하여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감독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사이다 같은 대리만족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남성중심의 저질 유머,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의 화자,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때론 사실관계를 교묘히 조작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감독의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죽하면 그를 비판하는
<마이클 무어 뒤집어보기>같은 영화가 있을 정도다.
유명세만큼이나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그럼에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그의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감독은 미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 이슈들에 관하여 기득권층이 아닌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서, 대중친밀도 높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지난 25년간 마이클 무어는 신자유주의 노동권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를 시작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화씨911>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미국 대통령 조지부시를 풍자했고, <볼링포 콜롬바인>을 통해 미국의 총기소지제도의 문제점을, <식코>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도 잔인한 의료제도의 실상을,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는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실체를 낱낱이 비판해왔다.
그의 최신작은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이다. 제목부터가 이미 '공격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이 영화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밝고, 부드럽고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작품들이 주로 현상에 대한 '비판'을 중심에 두었다면 이번엔 '대안'을 그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설정부터 매우 흥미롭다. 국가적 위기를 맞은 미국 국방부가 해결책으로 무어감독을 스카웃하였고, 이에 감독은 미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공한다는 픽션적인 설정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 틀을 구성한다. 이웃나라로부터 현재 미국에 없는 것들을 빼앗아온다는 이 설정은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면서 동시에 깡패로 군림해왔던 그 동안의 미국과 미국방부를 풍자하고자 한 것이다.
무어 감독은 영화의 설정에 맞춰 성조기를 휘날리며 여러 나라들을 침공하는데,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아이슬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등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그들의 교육제도, 노동환경, 성 평등, 재소자인권을 보장하는 여러 제도와 가치들을 심하게 탐내고, “이것을 미국으로 가져가겠다!”고 선포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만하다. 미국의 지난 정권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온 <오바마 케어>를 위시한 미국사회의 ‘복지 논쟁’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감독은 위기에 처한 미국을 구하기 위해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지난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복지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가치라고 역설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복지가 나쁜 말이예요.
보수적인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죠.“ - 영화 中
영화의 반전을 하나 공개하자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어감독이 다른 나라를 애써 침공하여 빼앗아 오려던 대부분의 제도와 가치들이 이미 미국의 역사 속에서 태동되고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 안에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누군가에 의해 숨겨지고, 배제되었던 제도와 가치들을 회복하는 일, 그 일을 위해 지치지 않게끔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감독은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며 나는 자연스레 우리의 일상을 떠올렸다. 안보위기, 경제위기,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는 ‘일촉측발의 나라’, 자살률 최고, 출산률 최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를 넘어 꿈과 희망까지도 포기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나라. ‘불행’과 ‘위기’라는 단어가 마치 국호라도 되는 듯 우리 일상의 삶과 잘 어울리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제도가 얼마나 탐나던지.
온갖 종류의 위기가 입버릇처럼 회자되면서도 실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는 이토록 부박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더욱 아득하고 요원해 보이는 현실의 한 가운데에는 두 눈에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 하나가 우뚝 서있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그 강고한 벽을 뚫을 수 있을까. 그 벽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냥 서글퍼하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앞에서 30년 지기 친구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던 감독은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989년 당시 망치와 정으로 베를린 장벽을 깨부수었는데 이틀 동안 쉼 없이 정을 대고 망치를 내리쳤던 것이 기억나. 그땐 정말 이 장벽이 무너질 줄 상상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무너지더라고. 그때 깨달았지. 아무리 암담한 벽 앞에 서 있더라도 망치와 정이 있으면 구멍을 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건 고작 망치와 정이었어.” 영화는 구멍 난 베를린 장벽을 보여주며 서서히 디졸브한다. 한동안 막혀있던 내 영혼에도 시원한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 동안 거대한 벽을 앞에 두고 예수와 제자들이 뚫어냈던 구멍들이 얼마며, 수많은 신앙인들이 숨 쉴 틈 없는 사탄의 체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뚫어냈던 구멍들이 얼마랴. 결국 망치와 정으로 사람들을 옥죄는 암담한 벽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치며 틈을 만들고 구멍을 만드는 일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일 것이다. ‘다음 침공은 어디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투명하지만 거대하고도 완악한 벽이어야겠지. ‘위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말자. 그럴 때일수록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야야만 한다.
현실에 절망하며 멀리서 주저앉아 탐내지만 말고, 구멍을 뚫어보자. 우리 손에는 이미 망치와 정이 들려있지 않은가.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감독, 100분, 영국, 2016
영국 뉴캐슬에서 살아가는 ‘다니엘 블레이크’는 환갑을 앞두고 있다. 평생을 목수로써 일해왔던 그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한동안 일을 해선 안 된다는 의사의 권고를 따라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로 인해 다니엘은 정부 당국에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심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에 반발하여 항소를 진행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궁여지책으로 실업급여를 받고자 하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다니엘은 행정처리를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런던에서 이주해 왔으나, 이곳에서도 직업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케이티가 당장 전기세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임을 알게 된 다니엘은 힘닿는 데까지 돕고자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려 점점 더 힘겨워질 뿐이다.
영화는 ‘다니엘’과 ‘케이티’의 사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영국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제도는 있지만 그것이 시스템으로서만 기능할 때, 정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앞서 소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미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 유럽 대륙으로 향했지만, 사실 전 세계 어디도 신자유주의에 따른 부작용을 겪고 있지 않는 나라는 없다. 무어 감독이 탐냈던 것은 각 나라의 ‘제도’라기 보다는 그 제도가 정립되고 순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사회 구성원들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과 ‘공동체적 가치’였을 것이다.
영국의 거장 감독인 켄 로치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신자유주의의 이상이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외쳐야만 한다.”
<다음 침공은 어디?>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우리에게 과제를 준다.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돌아보고, 힘들어하고 있는 이웃이 마주한 벽의 실체가 무엇인지 직시하라고. 그리고 그 앞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 무너진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지금 당장 행동하라고 말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약자들의 땅을 빼앗아 골프장을 짓고 케이블카를 만들며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기업과 지역발전이라는 허울로 기업의 폭력에 동조하는 정부의 횡포에 맞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생명평화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작은촛불교회의 투쟁을 기억하시고 그들이 의의 최후 승리의 기쁨을 맛보도록 함께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