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백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읽고 나서)
글: 강경숙 집사
나는 항상 “원죄“라는 것에 고민하여 왔다
과연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인하여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굴레를 안고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 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모르셨을까???
나의 잘못된 생각인지 모른다
난 한 번도 모르셨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왔다.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를 다 아실만큼 우리의 생각과 생활 호흡하는 것조차도 알고 계신다는 분이 그것을 과연 모르셨을까?
아셨을 것이다 ... 그렇다면 시험해 보신 것일까? 왜?
복종 순종을 보시고자?
과연 그 둘이 참 보기에 좋았더라 외치신 이 세상에 둘이 단 둘이 있으면 재미 있었을까?
그 세상을 좀더 영화롭고 아름답게 가꾸고 간직하여 생동감 있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나의 이런 고민과 생각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나 혼자만의 고민과 생각으로만 묻고 살았다
얼토당토한 말일는지 몰라도 이 기회에 한번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창조되어 사람을 만드신 이후의 과정들을 보면 흡사 우리의 성장과정과 너무도 닮았다
첫째, 남 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엔 서로가 부끄러움이 없고 자유로우며 두려움도 없다 그 저 맑다... 마치 아이가 태아나 유아기를 거치는 것처럼
둘째,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잘못한 것을 서로에게 미루며 탓을 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하면서 책임이란걸 알게 된다 .... 마치 성장기를 거쳐 성 인이 되어가는 과정 것처럼
셋째, 그 과정을 거치고 둘은 추방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 마치 성인이되어 결혼을 하면 새로운 가정을 이루듯이
넷째, 남자는 일을 하여야 하는 형벌이 여자는 출산의 고통이 주어지는데 ... 이것은 마치 가정을 이룬 성인이 그 가정을 가꾸고 살아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난 그러하여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간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여왔다. 또한 자손을 번창하여 보기에 그리도 좋았던 세상을 잘 꾸리고 살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혼례를 하는 자녀에게 덕담과 훈계를 하는 부모 심정으로 교훈과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생각한다 .
이러한 과정을 인간들은 지도하고 통솔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법적인 수단? 무지했던 인간들을 통제 수단으로의 무엇인가가 필요하여 본 의도와는 다른게 나름 꾸며져 전달되고 가르침화 되어 진 것은 아닌가 생각했었다
또한 늘 궁금했었다
과연 천국은 저하늘 어디에 있는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아직 과학으로 도달해 보지 못한 그 어딘가의 먼 곳이 있을 수도...
과연 천국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듯이 금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현생에 사는 것이 지옥이라면 과연 천국은 무슨 의미일까?
과연 지옥같은 현실을 잘참고 견디어야 천국에 보내시는 잔인한 도박 장난을 하고 계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일까??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현존하는 삶, 생명의 삶,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내어줌의 삶, 함께의 삶을 산다는 것 더불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 책의 저자의 말에 200% 공감 동감 한다.
길가의 풀 한포기 ,산맥 ,강줄기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은 계신다
내 안에 나의 가슴안에 계심으로 나 또한 그의 안에 있다
현실의 삶이 천국일 수도 지옥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삶의 가치를 삶의 의무를 소홀히 하느냐 충실 하느냐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보다 어렵다했다
죽어서만 그러한가? 아니다 현실도 그러하다
삶의 질이 떨어지는 나라에 사는 사람일수록 삶의 만족도 지수가 높다 는건 우리가 알고 있다. 갖은 만큼 욕심이 생기기 만련 또한 지키기 위한 복잡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질투가 따르고 거짓이 따르고 많은 골칫거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겉모양은 마치 풍족히 사는 듯 부족한 것 없는 듯 보이지만 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부자인자는 찾기 힘들며
“살기 참좋소” “만족 하오” 라고 말하는 이도 참 드물다. 여색이 짙은 남녀가 이생이 천국이기 위하여 여러 남녀를 품으면 천국일까? 아니다 서로 간에 시기 와 질투 암투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그로 파생되는 일들 또한 수만 가지일 것이다 결코 순간의 쾌락이지 행복은 아니다.
삶을 가치 있게 사는 것 우리의 가슴 두드림을 듣는 것 성경의 가르침은 그러하다
함께 서로 베풀고 아끼고 서로 보살피며 타인의 것들을 욕심내지 아니하며 어울려 사는 모습. 더불어 말이다.
그처럼 산다면 분쟁과 시기와 질투와 탐욕으로 가득찬 계락은 없을 것이다
웃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한 삶 ,금은 보화는 없어도 그것이 천국 아니겠는가
저자의 말처럼 사후의 세계 천국이라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없다 주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곳은 그런 화려함이 존재하는 곳은 아닐 것 같다.
그 곳 또한 더불어 함께 사는 곳이 아닐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찾은 체험이 있다
그 안에서 발견한 나의 하나님은 늘 조용히 미소로 바라보시며 지키시는 분이셨다
성서 대로라면 벌 받아 마땅할 나다. 자살 생명을 포기하는 나에게 형벌 보다는 따뜻함을 주셨던 분이셨다
나의 일상속에 뜻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몰아쳐도 저 낭떨어지로 몰아가지 않으시며 나에게 위로라는 것을 주시는 나의 든든한 빽 이기에 그 힘으로 난 잘 버티며 살았고 그럴 것이다
내게 심장 뛰게 하시는 분이셨고 나의 양심이란 것에 사정없는 방망이질로 나를 늘 깨어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혹자는 신앙의 믿음이란 것이 양심과는 다른 것이다 라며 비난도 한다
그러나 난 그것이 꼭 그러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그가 내 안에 계심으로 옳고 그릇된 것에 대한 깨우침의 방망이질이며
불의를 보며 분괴하는 방망이 질이고 아픈자를 보면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느끼며 외면치 않게 하는 방망이 질 이기 때문이다 곧 사랑 이라 난 믿는다
나는 느낀다
예수의 삶. 사랑 ..그 사랑은 절대 이기적일 수가 없으며 나의 이익이나 계산 따위가 섞일 수 없다. 그 안에는 “서로”라는 개념이 농도 깊게 담겨 있다
난 “더불어”랄 말을 사랑한다
그 말엔 나란 존재가 부각되지도 너란 존재가 도드라 지지도 않는다 함께 같이 라는 의미다
그러나 현재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 ”같이 “라는 말은 아마도 세월이 더 지나면 신종어가 될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는 “나”만이 존재한다
1차 집단인 가족 안에서도 그러니 학교 직장 사회 모든 곳에서 내 가족이 아닌 타인들의 집단 속에선 더 하지 않겠는가.
골로세서 1장 20절에 보면
“그분은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 자기와 기꺼이 화해 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만물의 모든 것의 담을 헐어 버리신 예수다.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고전적인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옛 사람들의 해석 그대로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고 권하고 마치 그리하지 않으면 바른 신앙인이라 여겨지기 어렵다는 것처럼 비난도 받는다.
담을 허무셨단다
우리는 담을 허물고 있는가?
남녀 간에, 병자와의, 동성애자들에게, 노동자들에게, 나보다 덜 배운 이들에게, 덜 갖은 이들에게 타종교인들에게 타교회 사람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담을 쌓고 살고 있지 않은가?
성령이 임재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난 그것 이라본다
그런 마음을 갖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럴 용기와 사랑이 있는 것.
선악과의 원죄로 시작되는 삶이 아니라
가치 있도록 현 삶을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 하셨던 이 세상을 의롭게 아름답게 사랑으로 살아 가도록 하는 그 가르침 난 그것이 하나님 나의 부모이신 분의 가르침이라 믿는다.
내가 좋은 만남교회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있다
이곳엔 “우리” “더불어”라는 말이 존재하고 어울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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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성서대학 겨울 방학 과제로써
존 쉘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