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난'을 만날 때
글: 이관택 전도사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왜 이 땅에 ‘고난’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특히나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질서가 가득한 이 땅에서 왜 억울한 ‘고난’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불의한 사회 때문에, 전쟁 때문에, 질병 때문에, 자연 재해로 인해 닥쳐오는 ‘고난’은 도저히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문제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감당해 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뒤에 이어질 부활 사건과 연결시킴으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고 믿는 것입니다. 독일의 현상학자 니콜라스 하르트만은 그의 윤리학에서 ‘고난’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더욱 깊은 차원의 인간성과 도덕성을 경험하며, 스스로 ‘구하지 않는 행복’, 즉 상상할 수도 없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당장 눈에 ‘보이는’ 고난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숭고한 신앙고백도 나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타인의 고난’을 목격한 경우에는 감히 이러한 고백을 들이댈 수 없습니다. 타인의 고난을 접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만큼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결국 ‘타인의 고난’을 목격하였을 때, 그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타인의 고난’이 그저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나의 처세에 관한 문제, 양심과 같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기준이자,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난’에 대하여 얼마나 민감할 수 있는지가 즉, 그 아픔의 문제와 나의 삶을 연결시키는 그 감수성의 크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앙의 척도이자 구원의 척도가 됩니다.
지금 시청 앞에서는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희망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위하여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일하면 일 할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절망의 시대! 생존을 위하여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정에 귀 기울려보면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모릅니다.
특히 그 가운데, 지금 1540일 넘게 길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재능교욱 해고노동자들은 대부분 학습지교사입니다. 가가호호 가정 방문을 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습지선생님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팽겨 쳐진 것이 벌써 5년째입니다. 해고의 이유는 노동조합을 결성하였기 때문인데,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특수고용직’으로 불리는 이들에겐, 그 조차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불리며 일정한 월급도 없습니다. ‘수수료’라는 이름의 돈이 지급될 뿐입니다. 노동조합도, 노사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회사는 부당하게 학습지 교사들을 착취합니다. 유령회원을 양산하는 회사 시스템 때문에 빚을 지면서 일을 하는 교사도 있고, 어떤 교사는 그러한 과정에서 한 달 수수료(월급)를 560원 밖에 받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도 생겨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지만, 재능교육 회사는 노동조합에 가입된 교사들을 탄압하고, 심지어 해고하였습니다. 12명의 해고자가 4년을 넘게 길 위에서 싸우는 동안, 한 분의 선생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인 이유로 용역깡패들의 폭행, 성희롱과 성추행 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이런 고난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고난에 동참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