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4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동행하시는 삶을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빕니다.
2.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과 교우 가족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3. 남기평 목사님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동북아시아 평화조약캠페인" 일정으로 일본 출장을 가셔서 오늘 돌아오십니다.
이 백성을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반도의 미래가 걸린 격동의 한 주가 지났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합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북미 정상회담도 서로 만족하는 수준에서 정리됐고 민주당이 표를 싹쓸이한 6.13지방선거도 끝났습니다. 정치적 이벤트가 다 끝난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기도해봅니다.
비록 말이지만 무시무시한 폭탄을 서로 주고받으며 당장이라도 실제 전쟁을 할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두 정상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악수를 하며 서로의 등과 팔을 쓰다듬는 모습은 매우 낯설었지만 그것을 본 대부분의 국민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습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남북정상회담을 위장평화 쑈라고 폄훼하며 온갖 악담과 샐깔논쟁, 흑색선전과 의혹제기를 하던 정당은 거의 초토화되었습니다. 대구 경북이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었지만 박정희의 고향이자 보수의 성지라던 구미는 오히려 개혁적 선택을 하는 이변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민심은 평화와 화해, 상식과 정의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평화와 화해, 상식과 정의를 염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전쟁과 대결, 몰상식과 불의를 더 원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의, 평화, 자유, 평등이 바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이 고귀한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가치들이 영원하거나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지만 만약 하나님이 이런 가치들을 부정하시는 분이라면 과연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을까, 그런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할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6월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못한 비루한 길이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만 이제라도 우리 양심을 통해 내면에서 들려오는 고귀한 욕망들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선택과 지지를 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기평 목사님이 일본에서 평화조약캠페인에 참여하셨습니다”
남기평 목사님이 동북아시아 평화조약캠페인을 위해 지난 주일에 일본에 가셨습니다. 평화조약캠페인은 미국-유럽-동북아시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올해가 3년째로 마지막 여정입니다. 각국의 교회대표 등 32명이 참여하는 이번 캠페인은 도쿄에서 시작하였는데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어서 다소 불편하게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국회의원들을 만나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해 협조와 지지를 부탁하고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들과 한반도 평화와 일본의 평화헌법 9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의 평화헌법 9조는 동북아의 평화구축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담은 성문법입니다만 아베정권은 이 조항을 고치고자 노력하고 있어 에큐메니컬 진영만이 아니라 모든 평화애호세력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던 날은 원폭이 투하되었던 히로시마에서 평화헌법 9조 국제컨퍼런스를 하였고 히로시마기념공원 원폭돔 앞에서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기도회를 하며 한반도기 현수막에 각자의 기도를 담는 퍼포먼스를 하였습니다.
마치 저도 함께 참석한 것처럼 글을 썼지만 사실은 남기평 목사님이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신 글을 요약해보았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시는 남 목사님께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오늘 귀국하시는데 무사히 건강하게 잘 돌아오세요.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49년 6월 21일 "대한민국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다"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유상분배함으로써 자영농 육성과 농업생산력을 증진, 농민생활의 향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소작료가 80%를 넘기는 경우까지 나타나 농민 생활이 피폐하였던 것을 고려, 미군정이 일본계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1/3로 소작료를 인하하며 대대적인 농업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농업비중이 절대적이었고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이미 1946년에 토지 및 농지개혁을 통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한 바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이듬해 이 법을 제정하였다. 1950년 농지개혁법 개정안과 시행령, 시행규칙이 공포되어 5월부터 실시하였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전면실시는 연기되었다.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지주제가 해체되고 농민들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으나 정책의 미흡과 지나치게 까다로운 분배조건, 원조물자로 인한 곡물가 폭락 등의 이유로 농민생활 향상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법 시행 이전에 지주들이 빈농층에 토지를 강매한 뒤 다시 토지를 구매하여 신흥지주계급이 형성되었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었다. 농지의 상당수를 도시 부자와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기억이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제7장
성령Ⅱ (2)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1.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2)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며... 성령을 믿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상태, 즉 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루터의 깨달음이었고 종교개혁의 핵이 되는 선언이었다. 존 웨슬리도 루터와 같이 죄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씨름하였으며 마침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신앙의 원리를 통하여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하게 된다.
감리교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해방된다는 칭의를 기본적인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칭의와 동일시되고 칭의가 구원의 정점이 된다면, ‘구원=죄의 용서’라는 신앙적 등식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등식은 사람이 아무리 큰 죄를 반복하여 지어도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으면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의 과거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칭의에 이르고, 또 다시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칭의에 이르고, 도 다시 죄를 짓고, 이러한 과정은 칭의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 죄를 지어도 회개만 한다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해를 가져오므로 반복되는 사람들의 죄(죄의 악순환)를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구원과 칭의가 동일시 된다면 신앙생활과 선행의 무용론에 빠질 수 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면, 칭의 단계 이후에 수반되어야만 하는 성경읽기, 말씀묵상, 기도와 찬양, 예배 참석 등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일, 자원봉사 등 선(善)을 위한 행동들이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올 수 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표가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요구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복음 5:48) 신약성경에서도 우리들이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3)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베드로전서 1:15)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리서 12:14) 성경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온전하심과 같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칭의의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화로 지평이 확대되어야 한다.(그러나 주의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동일한 정도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칭의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하여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칭의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조의 뿌리까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육신에 속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칭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죄를 용서받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죄악성은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죄악성마저도 사라지도록 하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 웨슬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구원은 두 가지 중요한 부분, 곧 ‘칭의’와 ‘성화’로 설명됩니다. ‘칭의’라 함은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됨을 말하며, ‘성화’라 함은 우리가 죄악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외적인 죄로부터 구원받고, 이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성화는 내적인 죄악성으로부터도 구원받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성화는 태어난 아기가 계속 자라는 것과 같은 긴 여정으로 칭의 이후에도 남아 있는 죄악의 뿌리와 싸우면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입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성화는 칭의를 전제하고 있으며,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어야 하다. 올바르고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칭의의 단계가 아니라 성화의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계속)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리바이어던)을 낚을 수 있으며, 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느냐? 리워야단을 보는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기가 꺾이고, 땅에 고꾸라진다. 욥기 41:1,9
한적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이 드는 러시아의 하얀 바닷가.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바다를 벗 삼아 우두커니 자리한 오래된 이층집에는 영화의 주인공 콜랴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긴장감 가득한 음악과 카메라의 음침한 시선으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제목처럼 ‘리바이어던’(성서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이 사방 어딘가에서 성큼 성큼 기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공포스런 시공간이 펼쳐진다. 과연 러시아의 시크한 바닷가와 황량하리만치 새하얀 들판이 숨기고 있는 괴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영화에는 ‘괴생물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괴물’보다 더욱 잔인한 현실의 이야기가 우리네 일상과 오버랩 되면서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숨 막히는 답답함과 공포감을 선사한다.
영화 <리바이어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바닷가를 개발하려는 작은 도시의 시장 바딤과 이 개발에 맞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평범한 가장 콜랴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물론 영화 속의 내용을 ‘대결’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것은 자칫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표현일지 모른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철거의 현장이 그렇듯 이 과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폭력적이며,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빼앗는 자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유린하지만, 빼앗기는 자는 삶의 터전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권’과 ‘인간성’마저 남김없이 수탈당한다.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의 닭 한 마리가 주어진 공정에 따라 죽임을 당하고 발가벗겨져 결국에 투명한 포장지 속의 식재료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이 영화는 잔인하게도 우리에게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한 가족의 파멸과 절망의 절차를 묵묵히 지켜볼 것을 요구한다.
마초적인 성격에 큰 키와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주인공 콜랴는 상당히 강인한 인상을 갖고 있다. 아마도 1:1의 싸움에서 져본 일이 없어 보이는 이 러시아 사내는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의한 불행 앞에서 콜랴는 속수무책이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합법과 불법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자신과 가족을 압박하는 도시의 시장 바딤 앞에서 그의 강인한 신체도, 지칠 줄 모르는 끈기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저 악다구니를 물고 온몸으로 저항해보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삶의 터전도, 가족의 생명도, 자신의 남은 인생마저도 다 빼앗기고 나서 절망감에 휩싸인 채 주저 앉아있던 콜랴는 그 자신이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정교회 사제를 붙잡고 절규한다.
“주님이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영화 <리바이어던>은 ‘욥기’의 내용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사제를 향한 콜랴의 탄식어린 질문은 욥기의 주제인 ‘고난의 문제’와 연결된다. ‘과연 선하고 성실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콜랴의 질문은 곧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내몰린 욥의 질문이며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불의한 고난’을 겪으며 절망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같은 모습으로 터져 나왔던 탄식이자 기도소리이다. 하지만 수없이 하늘을 향해 던져지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성서 속에서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42장에 걸쳐 기록된 ‘욥기’를 꼼꼼히 살펴보아도 선하고 성실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다만 성서 속의 욥은 답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조우하면서 점차 상황이 반전되고, 질문 자체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성서도 명확히 답해줄 수 없는 이 어려운 물음에 대해 지나가던 사제가 제대로 대답했을리 만무하다. 사제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하나마나한 ‘진리’ 타령으로 신을 대변하고, 자신의 직위를 방어함으로 콜랴에게 더욱 큰 절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콜랴가 절규하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단지 종교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은 영화 속에서 종교와 정치는 철저하게 결탁되어 있다. 콜랴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인 시장 바딤은 매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렬한 신자이며 정교회의 지도자를 만나 정기적인 신앙상담과 더불어 콜랴의 집을 빼앗는 일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종교가 절망에 빠진 불쌍한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파렴치한 시장의 행위에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 가족을 사지로 내모는데 공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타락과 이중적인 신앙인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의 절정부분에서 무신론자인 콜랴가 지나가던 사제에게 최후의 기대를 걸고 던진 질문이 얼마나 허망한지. 과연 콜랴의 이 비통한 외침에 누가 답할 수 있을 것인가.
2시간여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자본가와 성직자, 경찰, 판사, 그리고 행정관료 등 온 사회가 공모하여 한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는 이야기가 한바탕 끝났지만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파란바다와 파란하늘, 그리고 하얀 들판은 영화의 시작과 같은 모습으로 서글프리만큼 아름다울 뿐.
토마스 홉스가 1651년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을 저술할 때도, 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 감독이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든 지금도, 우리의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리워야단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 전에도 서촌에서 상가세입자 투쟁을 하고 있던 궁중족발에 용역깡패들이 들이닥쳐서 장사를 하던 힘없는 부부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나는 이 기막힌 현실은 영화 속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욥기에 기록된 대로 쳐다보기만 해도 기가 꺾이고 땅에 고꾸라질 것만 같은 고난의 상황이 순간순간 엄습하는 세상 속에서 절망에 빠진 누군가가 당신에게 “주님이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질문한다면 과연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우리를 향한 그 질문이 허망하지 않게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 또 식상한 답변일 수 있지만 “제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주님은 분명히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응답하며,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작게나마 증명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최소한 신앙인으로써 내 친구와 이웃을 향한 야만적인 약탈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괴물 같은 세상을 바꿔가는 가장 빠른 길은 아마도 우리 스스로 먼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일 테니까.
갑작스레 엄습해온 리워야단 앞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두개의 문>(two doors)
김일란/홍지유 감독, 101분, 한국, 2011
2009년 1월 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 철거민 5명, 경찰 특공대원 1명 사망.
생존권을 위해 망루에 올라 투쟁을 시작한지 불과 25시간 만에 철거민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 서글픈 참사의 원인을 두고 검찰에서는 철거민들의 불법폭력시위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공권력의 무리한 정책과 과잉 진압이 참사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사 이후 10년이 다되도록 그 어떤 진실도 사람들의 눈과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은 참사 당일, 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현장에서 사망한 철거민 5명의 증언을 들을 수 없으므로, 영화는 대부분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던 경찰 특공대의 시선을 따라간다. 진압 당시 경찰 무전 내용, 재판과정에서의 진술, 채증 영상, 검찰 조사 기록, 인터뷰 등을 통해 영화는 그 날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진행된 진압 작전이 얼마나 졸속이었는지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진압 작전의 허술함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두개의 문’이다. 망루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은 특공대원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두개의 문’ 앞에서 당황한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망루로 통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계획 없이 진행되었던 폭력적인 진압. 결국 6명의 사람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철거민들을 굳이 ‘진압’해야만 했던 이유,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시급하게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야만 했던 이유,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엄청난 계획을 강행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용산 참사의 뒤에는 영화<리바이어던>과는 비교할 수없이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년이면 용산 참사가 벌어진 지 10년이 된다. 10년의 세월동안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여전히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당시 경찰청장은 현직 국회의원이 되어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지방선거를 통하여 민심이 드러났습니다. 막말을 하고 평화를 반대하며 개혁을 거부하고 발목 잡는 정당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고 대통령의 정당이 대부분을 석권하였습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분열을 야기하는 정당이 완전히 퇴출 되게 하시고 승리한 정당은 국민을 섬기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