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4일 주보

by 좋은만남 posted Jun 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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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5주일 및 순교자주일입니다. 양심적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오늘날 우리도 참된 신앙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3.  사랑방에 비치된 하반기 공동식사 및 정리봉사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4. 7월에 농촌생태활동 일정이 있습니다. 여름에 농활은 하지 않았었는데 올해에는 일정을 잡았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분의 의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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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신학대학을 함께 다녔고 같은 학회 활동도 하였던, 언젠가 우리 교회가 제천으로 야외예배를 가서 함께 예배한 적도 있는 제천의 예사랑교회 변영권 목사님은 나름 페이스북 스타입니다. 변 목사님은 20여년동안 목회도 열심히 하시며 특히 성소수자 차별문제를 비롯한 차별철폐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강연을 다니시기때문인데, 물론 저도 변 목사님의 활동에 적극 동의하며 지지하고 있고요. 그런데 그분의 페이스북에 써놓은 제 글이 몇몇 분들을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변 목사님이 쓰신 "솔직히 한국교회에 진정으로 필요한건 이성애대책위원회 아니냐?"는 글에 제가 댓글로 '한국교회는 무성애자들이 문제'라고 썼습니다. 한국교회가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성소수자나 기타 약자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없고 정죄만 일삼는다는 뜻으로 나름 비꼬기식 농담을 섞어 쓴 풍자(?)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그런데 제 글에 달리기 시작하는 대댓글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제 글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제 글은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이 됐던 것입니다. 성소수자의 범주에는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뿐만 아니라 무성애자도 포함이 됩니다. 제가 쓴 댓글이 바로 무성애자를 비하하는 표현이 되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이런 반응이 황당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제 불찰이었던 것이 맞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를 좀 더 하고 오라는 말도 있었는데, 제가 공부를 게을리 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보다 민감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실수이자 부끄러운 지점입니다. 그래서 제 댓글을 삭제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글을 다시 썼습니다.

좋은 의도였다 하더라도 세심하지 못할 경우 어느 누군가에게는 상처나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습니다. 더군다나 점점 더 세밀하게 분화되고 있는 다원적 현대 세계관에서는 더욱 조심하고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사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은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서로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고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글을 다 쓰고 다시 한 번 읽어 보니 부끄럽게도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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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수리해주신 김형휘 성도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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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늙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주 만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명을 다해가고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예배당 건축을 2006년에 마쳤으니 예배당도 나이를 열두 살을 먹은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꾸 아프다고 하고 힘들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보일러 세 개 중 두 개가 사망진단을 받고 교체되었는데 지난 주일 예배시간에는 전등과 에어컨이 켜지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전기가 

문제였습니다. 강대상 등, 계단 등, 프로젝터는 다 켜지는데 말입니다. 결국 좀 어두운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 전기

기술자인 김형휘 성도님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김형휘 성도님이 맞이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교회에 오셔서 다 둘러보시고 뚝딱뚝딱 수리를 완료해주셨습니다. 원인은 차단기와 전원 스위치 노화 및 부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번 어려울 때마다 두 손 걷고 도와주시는 김형휘 성도님과 아울러 교회 일에 마음을 아끼지 않는 임정희 집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점점 쇠락해가는 예배당을 어찌해야 할까 걱정입니다. 건물에 돈 들이는 것도 별로 탐탁치는 않은데...

 

“7월의 농활, 어떻게 할까요?”

 

올해 목회계획에는 농촌생태활동이 세 번이나 잡혀 있네요. 목회계획서를 보니 7월 1일에 '농활'이 떡하니 써 있는데, 왜 이렇게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ㅠㅠ 아마도 농사 시작과 농번기, 추수기를 염두에 두고 일정을 짠 것 같은데, 막상 다음주일이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입니다. 날은 무척 더운데 일하러 가자고 하기도 죄송하지만 좀 심심하기도 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구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벌어지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 헌병, 반공 극우단체 등이 좌익계열 전향자로 구성된 반공단체인 보도연맹원과 양심수 등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최소 10만,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 정부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어 잊혀진 듯했지만 199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좌익의 사상 전향과 전향자 보호, 철저한 반공주의라는 명목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대국민 사상 통제가 목적이었다. 실제 보도연맹에는 좌파로 낙인찍힌 사람들 외에 건수 올리기 위한 공무원들의 강요로 가입한 사람, 남북협상에 참가한 중도우파와 우파정당인,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도 반 강제적으로 가입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이 조선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형을 단행하였다. 학살은 이후로도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계속되었고 이에 대한 북한 인민군의 보복학살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보도연맹 생존자들은 자신들에게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질까 두려워 이 사건을 폭로하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했다. 2009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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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동료 세 명이 한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현지인 가정부를 두었다.

가정부는 청소와 요리를 해주었고, 그녀가 해주는 일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집에 있는 술병의 술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가정부가 몰래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아닌 지 의심을 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남은 술이 얼마나 되는지를

술병에다 표시를 해 두었다.

어느 늦은 밤 그들은 골프 모임을 마치고 좋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자기 전에 한잔 더 할 생각을 하다가

술병에서 술이 자꾸 줄어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취기가 좀 돈 상태라 그들은 가정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이 남은 병 안에 오줌을 눠서 채워 넣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 도로 갖다 놓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았다.

며칠이 지났는데 술병 속의 술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가정부를 불러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정부에게 자기들 술을 마셨냐고 물었다.

가정부는 웃으며 말했다.

“전 마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음식 만들 때 썼는데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서 풀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오해가 발전하면 편견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오해와 편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믿고 편하게 터 놓고 진실하게 대화하면 아주 쉬운 일을 스스로의 생각에 집어넣어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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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성령Ⅱ (3)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1.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3)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며... 성령을 믿습니다.

 

감리교인의 삶과 신앙은 웨슬리의 가르침에 적합하게 죄를 용서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화의 과정을 밟아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성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거룩함은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성화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사건이다. 성령의 깨우치심과 인도하심으로 우리들의 영적 감각이 죄에 대하여 예민해서 죄악의 뿌리와 씨름하여 거룩한 기질(holy temper)로 변화된다. 성화의 과정에서 성령의 은총이 먼저이고 우리들은 그 은총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회복한다. 성화의 과정은 거룩해지는 과정이며, 거룩해짐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관련된다.

그러나 웨슬리의 성하는 개인의 내적인 성화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성화와 우주적 성화로 지평이 확장된다. 감리교회의 성화(거룩함)는 사회의 구조적 악을 극복하는 사회 구조적 성화와 생태계의 질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우주적 성화를 포함하는 폭 넓은 성화다. 훼슬리의 성화 개념에는 뺄셈(-)에 해당하는 부정적인 측면과 덧셈(+)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우리와 사회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죄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측면이고, 긍정적인 측면은 사랑(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 사회, 우주 안에 끊임없이 증가시켜 가는 측면이다. 감리교도는 성화의 주체인 성령의 은총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개인적/사회적 죄는 제거하여 극복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증가시키고 확대시켜 감으로 개인적, 사회적, 우주적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은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성화의 과정에 있는 신자들은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죄에 대해 더욱 예민해져,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힘을 얻게 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화의 은혜에 응답함으로써 구원의 역사에 동참한다.”

 

2.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1)

     우리는... 완전하게 하시며... 성령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은 전적인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의미하며, 성화의 정점이고 구원의 완성이다. 웨슬리는 1725년* 이후로 자신의 일관된 관심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고 고백하였지만 그의 교리 중에서 가장 비판적 논쟁이 된 주제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비판적인 논쟁의 초점은 유한하고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일반적으로 ’완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완전을 연상하게 한다. 왜냐하면 완전함은 초월적이고 신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과 인간의 완전을 구별해야 한다 웨슬리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이다. 인간이 신적인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명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시하지만, 웨슬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완전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한 근거와 목표는 될 수 있어도, 도달점이 될 수는 없다.

웨슬리에게 깊은 영감을 준 ‘동방교회’에서 신자들의 주요한 목표는 ‘칭의’를 넘어 신화(神化, deification)이다. 신화는 문자적으로 신과의 연합(union with God)을 의미하므로 인간이 신이 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신학에 따르면, 인간이 신화의 상태에 도달하여도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바울은 바울이라고 동방신학자들은 분명하게 주장한다.(계속) 

 

 

* 1725년은 존 웨슬리에게 중요한 해이다. 이 해에 웨슬리는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였으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일부 웨슬리 학자들은 1725년을 1차 회심이라고 규정하고,1738년 올더스게잇트 체험을 2차 회심이라고 규정한다.

 

 

(2) CVIS분류

 

“다다다다 다다다 다다 다다다. 찾을 수 있나요?”

인사말도 없이 쑥하고 쳐들어온 아이의 물음이다. 미처 헤드셋을 벗기도 전에 끝났다.

“다시 천천히 말해 줄래.”

이렇다. 지난 시간 특별교실에서 수업을 했는데 그곳에 지갑을 두고 왔고 찾아야 한단다.

“무지 급했구나.” 인사말 없음에 대한 소심한 뒤끝이다. 

“중요한 게 들어있니? 돈이나 카드나….” 그리고 내심 걱정이다. 돈이나 카드면 엄마한테 혼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다. 학생증을 빨리 찾아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온 시간은 3교시 쉬는 시간. 맞다. 4교시 후에는 점심시간이다.

 

1989년, 버스에 오르며 회수권을 내밀던 내 늙은, 늙어 보이던 친구는 자주 학생증을 내밀어야 했다. 이 사건에 자주 키득거렸고 지금껏 여전히 키득거릴 안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더 이상 늙지를 않는다. 이미 그때 늙었던 내 친구에게는 학생증이 중요했다. 

다른 이유로 여전히 학생증은 중요하다. 요즘 아이들은 은행과 학교가 어떤 필요(?)에 의해 함께 만든 체크카드 학생증을 가지고 있다. 이 학생증은 주요한 용도는 매점과 학생식당이다. 공통점은 양말의 오염을 걱정하지 않는 삼선 슬리퍼들의 목적지를 향한 전력질주이고, 차이점은 매점이 선택적이라면 학생식당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식사할 때마다 이 카드를 이용해 자신이 가진 먹을 수 있는 자격을 검증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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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학생식당 앞에 차례로 뭉쳐있다. 식당 문에 가까워질수록 양털 뭉치는 두 줄의 양털실을 뽑아낸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컴퓨터와 그가 내민 스캐너에 학생증을 갖다 댄다. “삐.” 또는 “삐오, 삐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소리(CVIS: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Sound)’다. 이 짧은 소리를 통해 ‘통과할 수 있음’과 ‘통과할 수 없음’이 명확하게 전달된다. 한 번에 구별할 수 있는 소리. “삐”는 통과, “삐오, 삐오.”는 정지다.

 

분류는 이성의 기능이다. 인식의 주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분류는 있는 것들의 차이를 발견하여 기준을 세우고 이 기준에 맞추어 나누고 이를 묶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된다. 린네(Carl von Linné 1707~78)는 ‘종속과목강문계’로 생물을 분류했다. 인간은 동물계(Animals), 척삭동물문(Chordates), 포유동물강(Mammals), 영장목(Primates), 유인원과(Great Apes), 인간속(Men), 인간종(Man)이다. 인간을 인식한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한편 이 분류는 낯설다. 그 기준 때문이다. 다음 제시하는 단어들을 분류할 기준을 생각해 보자. 

‘개’, ‘말’, ‘돼지’, ‘양’, ‘소’. 개, 돼지와 나머지들로 나눈다면 식성이다. 잡식과 초식. 그런데 이 분류의 기준이 식성 하나는 아니다. 공포를 기준으로 한다면 어떨까? 돼지고기 알레르기로 숨길이 붓는 사람에게 말이다. 역시 기준은 분류 대상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자주 분류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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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은 참 골치야.” K는 이렇게 말하고 지금까지 가끔 하던 버릇대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자네들 두 사람을 구별하면 좋을까? 틀린 것은 이름뿐이고 그 밖에 두 사람은 기막히게 닮았으니. 마치……” 거기서 그는 말이 막혔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말해버렸다. “마치 두 마리 뱀처럼 서로 닮았어.” 그들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모두들 우리들을 잘 분간하던데요.” 그들은 변명했다. “그럴 거야, 나도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내 눈으로 자네들을 구분하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아니란 말야. 나는 자네들 둘을 한 사람처럼 취급해서 두 사람 다 아르투르라고 부르기로 하지. 자네들을 두 사람 중 하나는 그 이름일 거야. 아마도 자네지.” 하고 한쪽 남자에게 K가 물었다.

“아뇨, 예레미아스예요.” 그 남자가 말했다. 

 

카프카의 소설, 『성(城)』(홍신문화사, 1996; 29-30.)에서 주인공인 측량사 K와 두 명의 조수 아르투르와 예레미아스의 대화이다. 사용자인 K에게는 두 사람을 구분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K는 이 두 사람을 사용할 때 사용할 수 없는 다른 사람과 구분하는 기준인 고용관계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두 사람의 기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아르투르와 예레미아스가 하나하나 인격체라는 것도 그렇다. 카프카는 K로 하여금 두 조수를 해고하게 하고 이후 아르투르와 예레미아스를 성장시킨다.

 

20180624_001.jpg학교에서 이러 저러한 이유로 아이들을 분류한다. 이 분류의 목적은 편리다. 그런데 이 분류가 가진 한계는 바로 아이를 볼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스캐너 앞에서 급식 지도–이 지도라는 단어 대신 안내라고 하면 안 될까?–를 하며 온통 CVIS에 집중한다. 1~9등급이라는 기준은 아이 자체가 아니라 아이의 성적만을 보게 한다. 말 잘 듣는 아이와 듣지 않는 아이라는 분류는 복종을 가르친다.

학교는 아이를 보는 곳이다. 아이의 차이를 보고 아이를 돕고 지지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 뭐 하시노?” 영화 『친구』의 대사가 들릴 때면 답답하다. 그래도 이게 아주 가끔이고 또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 다행이려나?

차라리 다음번 급식 안내 때는 수능용 귀마개든 밀납 귀마개든 하고 서야겠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Sirens, Σειρήνες)의 소리로 다가오는 저 “삐.”, 

“삐오. 삐오.” 분류의 유혹을 뿌리치고 아이의 얼굴을 보고 말해야겠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던 김우식 사장이 상가 임대료를 네 배나 올린 건물주에 항의하며 일인시위를 벌이다 다투던 중 폭력을 행사해 살인미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습니다. 세입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이 근절되고 부동산이 인간의 권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 중단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