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있는 설날을 기다리며
글: 이관택 전도사
안녕하세요? 저는 서오릉 근처에서 작은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이관택 전도사라고 합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제 정체를 밝히는 것도 망설여졌답니다. 솔직히 그 동안 교회들이 좋지 못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왔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생명과 평화의 꿈을 꾸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고, 향긋하고 소박한 영성을 지향하는 신앙인들도 여전히 많이 있답니다. 저도 그리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제 소개를 대신 하려합니다.
이번에 은평시민신문으로부터 ‘구정명절’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명절하면 좋은 기억보다는 서글프고 외로운 느낌이 더욱 많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에게 행복해야 할것 같은 날들,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친척들을 가슴 설레게 만나야 하는 날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날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무살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첫 겨울을 맞이 할 때, 봉천동에서 공부방 교사로 자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에 가난했던 달동네, 그 때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지 오래고 매일밤 술취한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그 얼굴들 속에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따스함도, 아이들의 특권인 새뱃돈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설날이 되기도 한참 전부터 새뱃돈 받은 것으로 뭘 할지를 계획하며 설레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제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참 무서운 현실이지요.
또 그 뒤에 5년이상 노숙인인권 활동을 하며 만났던 아저씨들의 설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가난한 거리'를 살아가기에도 녹녹치 않은 이들에 게 명절은 혹한의 추위보다 더욱 가슴 시린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요.
생각해보면 그런 '현실'들이 실존한다는 강박들에게 '명절'의 푸근함을 빼앗겨 버린지도 오래 되었네요.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섬기는 지금까지도 제가 몸 담은 현장은 여러 번 바뀌어 왔지만, 여기 저기 투쟁사업단들의 설맞이 수익사업이나 행사들의 소식이 들려 올때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과연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한 설 명절을 온전히 맞이 할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과 강박을 넘어서서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실제로 저마다 신명나게 웃을 수 있는 설 명절을 희망해 봅니다.
올해로 벌써 34살. 결혼을 하지 않은 채 30대 중반에 접어든 제게 설 명절은 또 다른 염려거리로 다가옵니다. 평상시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거냐?"라는 질문을 수시로 받고 있는 제게 명절은 그야말로 끝판왕이지요. 특히 올봄 사촌 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시달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것들도 다 통과의례라고 하지만 저는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각박한 현실 때문에 서로를 진심으로 위할 수 있는 여유가 부재한 시대,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뒤틀려서 '가족'이라는 껍데기만 남아버린 이 때,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서로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저 매년 만나면 변해버린 서로의 외모에 대한 지적들, 직업, 학교, 연봉, 재산 등에 대한 통상적인 겉치레만 훓고 흩어지는게 우리네 명절 풍경이지요.
이것 참 서글픕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진심은 아닐 것입니다. 겉치레 밑에 흐르는 애정과 관심을 가족 공동체가 함께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소중하다'라는 가슴 속의 말을 실제로 서로에게 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민이 무엇인지, 바람이 무엇인지를 서로 듣고
공감하며, 곁을 내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한 가족은 명절준비 담당을 미리 정하고, 명절 때 아이들 부터 어르신들까지 온 가족이 할 수 있는 진실 게임, 골든벨 등을 통하여 자연스레 이런 기회들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부러운 가족이지요. 그래서 저도 이번 설을 앞두고 마냥 염려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는 명절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아마 서로에 대한 따뜻함은 모두가 동일할 테니까요. 가족들을 믿고 한 번 망가져 볼겁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 이럴 때 일수록 따뜻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충만한 복을 누리는 새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 글은 <은평시민신문 60호>에 기재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