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중함이 있습니다. 고난은 쓰다(고)와 어려울(난)이 합쳐진 단어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이 고난과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걸어가신 길이 바로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영어로 하면, ‘suffering’입니다. ‘suffering’은 한자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고통, 괴로움’을 표현합니다. 그만큼 고난은 우리에게 엄중함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진지함 혹은 숭고함까지 느끼게 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 이번 주간은 엄중함과 숭고함을 마음에 품으며 살아가야 되지만, 실상 고난은 괴로움과 고통이 동반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몸소 체감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와 신앙인으로서는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고난이 만연한 사회는 올바른 사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이를 몸소 체감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즉, 고난을 알면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길은 알면서 가는 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고통과 괴로움이 있지만 이를 감수하면서 가는 길,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길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알면서 가는 길은 실패를 동반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대전제 앞에서 우리는 항상 좌절하며 실패를 반복합니다. 타인의 고난에 대해서도 공감하기를 원하지만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타인의 고난을 공감하는데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하지만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연거푸 시도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지상명령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이번 주, 고난의 의미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든지 간에, 이에 대해 묵상하고 공감에 실패해도 계속해서 타인의 고난에 공감을 시도하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