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부활의 기쁨에 들떠있고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의 교회들은 이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만 몰두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쉬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고난과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과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봅니다. 바로 내 옆에, 그리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고, 목격되지 않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우리 교회는 이 고난과 죽음에 천착되어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때문에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 종교지도자, 관료들 그리고 유대인들을 모순을 꼬집습니다. 그리고 회중들 앞에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너희에게 진정한 이웃이냐?” 답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언급된 레위인의 모습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들의 아픔과 고난에는 무심한 채, 종교행위에만 열을 올리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고난주간을 보내며 부활절을 보낸다면, 과연 이 기념주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하나의 이벤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고난과 부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필요한 이들에게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것이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어, 현재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다시 희망을 품고 열심히 그 길을 걷게 만들어야 합니다. 곧 희망을 부활시켜야하고, 우리들의 ‘곁’의 공간을 부활시키고, ‘이웃사랑’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절을 지키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