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계 곳곳은 불평등이 만연합니다. 이는 차별이라는 매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매개는 너무 다양합니다. 성, 계급, 소득, 지역, 인종 등 셀 수 없이 우리들을 갈라놓고 판가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나 죄성이라면, 설명하기 쉬울 테지만, 생각보다 이렇게 받아드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를 인간 자체에서 찾기 보다는 체계나 조직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근본이 영향을 미치겠지요. 하지만 오늘날의 불평등은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우리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어떻게 관성이나 본능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박한 어찌 보면 엄청난 꿈을 꾸고 살아갑니다. 행복을 꿈꾸는 것, 생명을 가진 모두는 당연한 권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당연’이 당연하지 않는 시대에 이 ‘당연’도 누군가를 설득시켜야만 하는 시대입니다. 이를 설득시켜야 하는 자들은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항상 길게 역설합니다. 이 역설을 듣고 있노라면, 천편일률로 경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1인자가 되는지를 말합니다. 1인자, 곧 성공이 행복이라는 공식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적용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공식이기도 하지요. 특정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공식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만 행복한 세상을 꿈꿉니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편협합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는 안경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모릅니다. 행복의 크기를 젤 수 있는 사람이 이렇습니다. 행복의 크기는 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추상적입니다. 표현하기도 만무하지요. 행복은 나눌 때 더 큼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행복이 필요한 이들에게 행복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시리아 꼬마 아기의 사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로 터기 해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애처로움을 넘어서 처연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가나 자본가라고 해서, 이 아이의 꿈과 행복을 앗아갈 수 있는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짓밟고 헌신짝처럼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이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요? 이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저에게 애끓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세상의 어른들이 어떻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가 고민 그리고 고민되는 한 주간 이었습니다. 더 이상 애끓는 마음이 존재하는 세상이 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