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순간

by 좋은만남 posted Nov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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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은 바울이 됩니다. 바로 큰 자에서 작은 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전환’합니다. 전환을 다른 말로 하면, 회개입니다. 바울, 작은 자의 의미는 작은 자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겠다는 다짐이 가득한 이름이며, 회개의 징표입니다. ‘메타노이아’는 헬라어로 표현된 회개의 또 다른 이름이며, “마음의 심오한 변화”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 변화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되는 순간이며, 예수를 따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곧 성령 충만함을 얻어, 예수를 따르는 길은 생명의 가치를 몸소 깨닫고, 생명의 숨결을 받아 안으며, 알량한 ‘인간중심주의’에서 탈피함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경솔하게도 지구의 시간이나 우리가 사는 공간을 손쉽게 정의하거나 이를 다룰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반드시 잘못을 범하고 이에 대해 문제가 나타남은 물론, 후회할 일들이 발생합니다. 오늘날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또 인간중심적이어서, 함부로 생명을 대하고 규정짓습니다. 그래서 산을 마구 파 해치고, 강을 마구 쑤셔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 장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장인은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한 분야 각(覺)을 이룬 이들을 존경할 때 일컫는 단어인데, 장인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장구한 시간 속에서 생명을 보듬고, 진화 맥을 같이하는 존재들에게 예의 없는 처사를 오늘날 인간들이 각가지 방식으로 저지릅니다.



따라서 사울이 눈에 비닐이 벗겨서, 예수의 눈을 가지게 된 것처럼 우리들의 오만한 비늘들이 벗겨져, 이 모든 생명의 경이로움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끝으로 박남준 시인은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의 시를 일부분 소개할까 합니다.
 
 (중략) 작년 여름 쓰러져 죽은/ 미루나무 가지들 잘라 지줏대로 삼는다 / 껴안는구나 / 상처가 상처를 돌보는구나 /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엮이며 세워져 / 한 몸으로 일어선다 / 그렇지 그렇지 / 푸른 바람이 잎새들을 어루만지는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은 바로 상처와 상흔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경이로움과 장구함에 저절로 겸손하게 됩니다. 고난의 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도 치유 받게 되는 일련을 과정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준 사울의 메타노이아 그리고 우리들의 회개이야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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