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나 문제점 그리고 여러 비판지점들이 내 발 앞에 떨어져 있을 때, 공동체의 문제로 떨어졌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비판점을 해결하지 않고 묻어두고 갔을 때에는 반드시 편견, 낙인, 괄시, 선입관이 생깁니다. 이를 자세히 김영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편견이란 종합적이며 적절 타당한 정보와 증거를 확보하기 전에 미리 판단하며 선입관을 갖는 것을 마라한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은 인간의 자세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타인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감정이 될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데, 바로 성서를 들고 있습니다. 성서가 주는 인내와 위로를 소개합니다. 이 인내와 위로는 약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맥을 관통하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야 함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며, 보편복지입니다. 인내와 위로를 통해서 소망을 갖게 됩니다. 바로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밝은 미래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소망의 유무가 인생을 버티는 힘이고 때로는 추동력이 됩니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없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또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관용의 자세는 바로 인내가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인내는 영어로 “endurance”를 씁니다. 이는 ① 지구력 ② 인내 ③ 내구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관용은 지구력 특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만큼 약점을 잘 보살펴 주고, 이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하나의 어려운 단어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사랑과 용서와 구원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의 자세는 “follow Christ Jesus”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따르미”가 되는 것이지요. 관용의 자세는 예수의 자세이기도합니다.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를 곱씹고 잘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대로 행하는 것이지요. 이론은 쉽습니다. 실전 그리고 실기가 어렵습니다. 7절에서도 드러나듯이, 바로 이는 개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자세, 곧 관용의 자세는 바로 나를 위한 길이 아닌 동시에 서로를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