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 고린도전서 4장 1-2절
2절에는 신실성을 말합니다. 신실성은 요구되어 진다고 말합니다. NIV에서는 신실성을 ‘faithful’로 쓰는데, ① 충실한 ② 독실한 ③ 신의 있는 ④ 헌신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용사가 쓰이는데, 형용사는 보여 지는 것에 치중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으로 먼저 이 사람이 충실한지, 독실한지, 헌신적인지를 먼저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도 관계와 이어집니다. 신실성이 없다면, 어떠한 관계의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메시지에서는 풀어서 정확한 지식으로도 설명하는데, 이는 확신이며,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사회 과학적 지식으로써의 지식이나, 철학적 지식으로써의 지식의 정합성이나 논리성 보다 한 단계 높은 정확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적 사람에게 나오는 것인데, 바로 언행일치의 모습입니다. 언행일치는 바로 예수의 따르미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지식을 나를 통해서 정확하게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곧, 신비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이어질 수 있음이 바로 신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적 사람은 자발성 그리고 신비로 가는 길과 신실성을 갖춘 자입니다.
그리스도적 사람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데,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를 문태준 시인의 시에서 잘 설명해줍니다. 일부만을 소개할까, 합니다.
(중략)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자발성과 신실성 모두 나의 몸이 이에 대해 맞춰져 있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강조하는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공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맞춰져 있지 않으면 이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 그리고 그리 중요치 않은 단어가 됩니다. 몸을 낮추기 위해서는 다리를 굽혀야 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야 하며, 내 몸의 모든 것이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있습니다. 우리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낮춰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신실한 마음을 갖는 다는 것 또한 마음을 낮춰야 하고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교보제가 될 수 있고,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볼 때 신실함을 배우게 되고, 그 신실함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