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은 영생, 즉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자는 바로, 생명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씩 주어진 유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은 존엄한 가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지요. 이 생명을 함부로 다루거나, 수단이 될 때, 바로 그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존귀한 생명을 마치 내가 하나님인양 되듯이 찍어 누르거나, 차별을 둘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생명 경시는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죽음의 가치로 대변되는 세상이며, 죽음의 순환구조 속에 생명체는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이 더욱 그런 거 같습니다. 상생, 즉 같이 살아간다는 생각보다는 내 모든 것이 위로 빨아 들리는 듯합니다. 특히 노동문제에 있어서, 사회진출에 있어서, 그리고 교육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경쟁으로 누르지 않고는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곧, 생명 없는 삶은 영생을 누릴 수 없고, 아무런 목표의식이나 삶의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 의미 없음은 바로 생명의 의미 없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또한 생명의 차등이 그리고 계급이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고, 바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12절 후반에 증언하듯이, 나와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 힘은 구별하는 힘입니다. 이 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섰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서 구분된 생각들을 받아드릴 마음이 있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별하는 힘은 신앙생활의 활동력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있는 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발휘될 수 없습니다. 의지는 영어로 “trust”인데, 이는 전적인 내어맡김입니다. 전적으로 내어맡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현존 곧 계심을 느끼는 정도까지는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자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종교는 영어로 religion입니다. 라틴어 어원에는 '의지하다' 또는 ‘결합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종교생활 혹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의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구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별하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행위이며, 말씀의 거울로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