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면, 서울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그동안 정말로, 별 일(?)이 없다면, 안수 받는 방석 위,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겠지요. 그런데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목사 안수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저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기분은, 나의 자격 유무를 떠나서, 앞으로가 쉽지 않는 길이겠구나, 라는 미래에 대한 절망에서 나오는 싱숭생숭함입니다. 특히 거창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저 자신의 미래, 다시 말해서, 신앙의 미래에 대한 고민입니다. 요새 들어와서,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저 자신에게 던집니다. 교회가 편의점보다 많은데, 세상은 이렇게 불의하고, 악이 횡행함을 괴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교회가 이렇게 많아서, 세상의 변화가 지체 혹은 변화의 장애물이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만 놓고 보아서 그런데, 교회뿐만 아닙니다. 성당, 절 그리고 여러 신당들이 넘쳐나는데, 지금 우리들의 세상을 왜 이럴까요?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버틸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탈조선을 생각하고, 여러 방면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본 누군가는 믿음이 없음에 탄식하고 아무런 사명감이 없이 안수라는 거창한 것을 받는 것에 혀를 찰 것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 정리된 것은 교회란, 먼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에둘러서 말할 필요 없이, 식구라는 소리지요. 같이 먹고 마시며, 조금만한 표정들과 숨소리도 호흡하는 것입니다. 이는 슬픔을 반으로 줄이고 기쁨은 배로 늘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서로 의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의지한다는 것이 결코 민폐이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각 자의 신앙을 대표합니다. 공동체의 성격이 자연스레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생활과 신앙관에 고스란히 스며듭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 하는 사역을 통해서 예수의 뜻과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는 신앙은 훈련되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에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훈련을 통해서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공동체는 신앙인에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를 간과하고, 익명성이 보장되거나, 여러 이익을 위해서 정말 가볍게 공동체를 선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은 누군가를 믿고, 소망하거나 어떤 무언가를 닮기 위해서 노력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 누군가를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을 칭합니다. 신앙은 여러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이, 때로는 사랑이, 때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에게 이를 견지하면서 갈 자신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흔들릴 준비가 되어있음도 고백해야겠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인지 신앙생활인지, 잘하는 신앙생활인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