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5일

by 좋은만남 posted Aug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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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1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학교 아동부 여름성경학교를 성황리에 잘 마치고 평가회도 가졌습니다. 관심 갖고 수고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3.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4. 다음주일에는 강화의 남산교회와 연합하여 강화도에서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아침 9시 30분에 교회에서 출발하겠습니다. 남산교회 예배당에서 예배 후 점심식사를 하고 평화전망대와 조봉안 선생 추모비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5. 이관택 목사님과 송윤혁 집사님이 영화제 관련 출장으로 한 주간 영국에 다녀오십니다.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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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대로 학생부 방학 모임을 하였습니다”

 

학업과 성장의 스트레스로 청소년 시절이 별로 즐겁지 않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번 여름방학 중에 청소년들과 함께 1박2일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방정빈 학생이 내일 개학을 한다네요. 요즘 여름방학은 별로 길지 않네요. 아쉬움에 한숨을 쉬던 중 이관택 목사님이 윤재민 학생과 방정혁 학생을 데리고 강남 압구정동에 진출하셨습니다. 유명 햄버거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독특한 서점에 들러 책도 보고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도 함께 보며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부디 즐겁고 뜻깊으며 생활에 활력이 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방정빈 학생은 친구와 중국 칭따오 여행 중이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평화통일기도주일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8월 15일을 앞둔 주일을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로 지킵니다. 이 주일은 남과 북이 함께 작성한 공동기도문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며 어서 속히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우리 교회도 매년 이 주일을 의미 깊게 지내고자 예배당에서 혹은 분단의 현장을 찾아가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 단독으로 혹은 몇몇 교회와, 때론 규모 있게 마련된 연합예배로 임진각, 철원교회 옛터, 통일전망대 등을 찾아가며 드렸습니다만 최근 몇 년 동안은 형식적으로 지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반북정책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때문에 남북관계가 매우 악화돼 그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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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우리의 염원을 온전히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있어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주일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강화의 남산교회(윤여군 목사)와 함께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전에 도농교회 연합예배를 함께 하였던 일벗교회도 참여하려 하였으나 지역의 연합예배가 있어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습니다.

다음 주일 일정은 교회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여 남산교회 예배당에 도착, 함께 평화통일 기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남산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를 한 후 송해면의 제적봉 정상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에 올라 북녘 땅을 바라보며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갑곶돈대 부근 강화역사관 입구의 조봉암 선생 추모비에 들러 평화통일을 주창하다 이승만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간첩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진보 정치인 조봉암 선생에 관한 윤여군 목사님의 해설을 듣습니다. 윤 목사님의 해설은 전문 해설사보다 훨씬 낫다고, 본인이 주장하셨습니다.

다음주일도 여전히 무더울 것 같습니다만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열기가 더 뜨겁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88년 8월 8일    "버마(미얀마)에서 8888 항쟁이 시작되다"

8888 항쟁은 버마(현 미얀마)에서 1988년 8월 8일에 랑군(양곤)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군부 민중항쟁이다. 1962년 쿠데타로 독재자가 된 네 윈 장군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당 당의장 직을 고수하며 실제로 통치하였다. 1988년 3월 랑군의 한 찻집에서 벌어진 싸움이 큰 패싸움으로 번져 경찰이 투입되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아버지가 정부 고관이었던 주도자 한 명이 방면되자 대학생들은 버마에서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공작새 깃발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으나 군과 경찰이 동원돼 학생들을 체포, 호송하는 중에 41명이 질식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을 기화로 8월 8일 버마 전국이 26년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으나, 국가평화발전위원회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새로운 군부의 진압과 발포로 시민, 대학생, 승려 등을 포함 수천 명이 희생됐다. 이 항쟁을 본 버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 치 여사는 충격을 받아 8월 26일 거리로 나서 기나긴 반독재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든지 죽이겠다."는 군부의 강경한 진압에 8888 민중항쟁은 1988년 9월 18일에 종료, 혁명은 실패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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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가1843년에 쓴 ‘고자질하는 양심’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나로 설정된 주인공은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노인을 일주일 동안의 사전준비 후 8일째 되는 날 살해했다. 시체를 토막 내어 자기 집 지하실에 묻었다. 아무도 몰랐다.

노인이 죽을 때 낸 외마디의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고, 3명의 경찰이 주인공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증거도 없고, 전혀 동요하는 마음도 가지지 않았던 주인공은 노인의 방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의자까지 가져다주는 매너를 보인다. 

경찰들도 더 이상 주인공을 의심하지 않게 되고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까지 한다. 흔히 말하는 완전범죄로 끝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 밤부터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꿍덕, 꿍덕,... 죽은 사람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아도 들리고 잠을 자도 들려왔다. 그 섬뜩한 심장의 고동 소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주인공은 경찰에게 모든 범행을 자백하면서 소설은 끝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심장 고동 소리는 바로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였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 모두 32회나 사용되고 있는 ‘양심’이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 내부에서 자신의 행위를 살펴서 선악에 대해 판단케 하는 내면의 도덕적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진리를 추구하게 됩니다(히9:14;10:22). 그리고 성화의 정도가 점점 커가면서 양심의 기능도 더욱 활발하게 됩니다(고전 8:1-13;10:25).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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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성경II (1)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의 4조는 성경을 고백하고 있으며, 4조의 전반부가 성경의 본질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성경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를 위한 성경의 첫 번째 역할은 구원에 이르는 원리와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

 

1. 구원에 이르는 도리(1)

     우리는...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 됨을 믿습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면서 정신적인 존재이므로 식욕, 수면욕과 같은 육체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뇌하고 수행하고 씨름한다. 물론 육체적 욕구를 열등한 것으로 정신적 욕구를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몸과 정신을 차별화하는 이분법적 삶의 태도를 가져오기 때문에 올바른 입장은 아니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고 모두 중요한 것이므로 존중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체적 만족과 더불어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영화, 미술, 연극 등 다양한 문하를 통하여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만족시키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또 다른 욕구가 있다.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존재를 넘어서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의 궁극적인 해방과 행복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능한지, 죽음 이후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등과 같은 물음들은 영적인 물음들이며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궁금한 물음들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법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이다. 종교는 경전을 통하여 영적인 물음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고, 의식을 통하여 해답을 경험하게 하며, 종교생활을 통하여 각자의 해답을 실천하도록 한다.

그리스도는 다양한 영적인 물음들에 대한 해법을 ‘구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영적인 해법만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물음들에 대한 해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영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측면도 포함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영혼구원’만을 지칭하지 않으며 엄밀하게 육체적 구원, 정신적 구원, 영적 구원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구원이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에 이르는 공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미 4장과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시므로 우리들의 대속자와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청중들과 같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지름길은 성경이다. 우리는 설교. 성만찬, 기도, 찬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한 길은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내용과 방향, 즉 구원의 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났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앞장에서 전술하였듯이 감리교의 구원론은 순간적이면서 과정적이고, 과정적이면서 순간적이다. 감리교의 구원론은 선행은총-칭의-신생-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긴 여정으로 그려질 수 있으며,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면서 우리가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감리교적 구원의 과정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감리교의 구원론은 성경적인 구원론이다. 감리교가 증거하는 구원의 각 단계들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계속) 

 

 

(5)

돌연함

 

1

그때서야 내가 온 이유를 간신히 생각해 내고서 나는 어떤 매점 앞으로 가서 거기 놓은 도자기 꽃병과 꽃무늬가 있는 티 세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매점 문 앞에서 한 젊은 여자가 두 젊은 남자와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말씨가 영국식인 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막연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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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언제 내가 그런 말 했어요!”

“아니, 그랬어!”

“자네도 들었지?”

“그래, 나도 들었어.”

“아이…… 거짓말!”

(중략)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하고 노려보고 있자니까 나 자신이 마치 허영에 몰리고 또 허영의 조롱을 받은 짐승만 같았다. 그리고 내 두 눈은 고뇌와 분노에 활활 타고 있었다.

- 제임스 조이스, 「애러비」, 『더블린 사람들』, 김병철 옮김 (문예출판사, 1999), 43쪽.

 

소년은 이웃에 사는 누나를 좋아합니다. 어느 날 누나에게 애러비 바자회를 듣고 소년은 바자회에 가서 누나를 위한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바자회에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맙니다. 그리고 바자회에서 일어난 한 마주침과 깨달음입니다.

애러비 바자회는 소년에게 누나를 향한 사랑을 이루어줄 계기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곳은 그저 평범한, 의미 없는 말들이나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그 어둠에서 허영에 몰린 짐승인 자신을 보게 됩니다.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

u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가 사용한 ‘에피파니(epiphany)’입니다. 「애러비」의 소년처럼, 단편소설에서 갑작스러운 집약된 사건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 그 소설의 기법을 ‘에피파니’라고 합니다.

 

2

우주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Titus Lucretius Carus, 기원전 98년(또는 97년)~기원전 55년, 그리스 철학자)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대진 역 (아카넷, 2012)에서 우주의 탄생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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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우스의 재미있는 상상력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주가 전에 원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무게 때문에 아래를 향해 서로 마주침 없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원자가 이 아래를 향한 직선 운동에서 조금 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로 인해 원자들이 서로 마주치고 부딪치고 뭉쳐서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그는 이 작은 변화를 ‘클리나멘(Clinamen)’이라고 합니다.

딱딱한 창조설을 가진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어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는 ‘구원을 받을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큰 전제를 두고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설명한다는 것은 참 불편합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 의지’를 말합니다. 이 ‘자유 의지’라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공산주의 이론가)의 박사 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고병권 역 (그린비, 2001)입니다. 논문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클리나멘’입니다. 그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자가 가진 힘이 바로 ‘클리나멘’인테, 이 ‘클리나멘’을 ‘자유 의지’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고정된 중력이라 할 수 있는 질서 있다고 말하는 세계의 관점에서, 불온해 보이고 엉뚱한 작은 움직임, 곧 ‘자유 의지’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결국 저는 편견에서 벗어나고 열린 마음으로 철학과 종교에 대해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수용은 자주 읽는 책의 제목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책 이름에서 심리학이 빠진 적이 없던 저였지만 점점 철학, 종교, 인문 같은 키워드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교회를 잘 다니지 않던 저는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의미, 사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인문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첫 번째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변화는 그저 관심이 생긴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성격과 생각의 변화도 겪에 되었습니다. 이에 큰 영향을 준 건 목사님과의 산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 서울종교교과교육연구회 엮음, 『학교 종교교육 담다』(꽃피움, 2018),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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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참 딱딱한 곳입니다. 생각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살아가야 할 방법이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서울대, 연·고대, 명문대가 그렇고 대치동, 은행사거리, 목동의 학원가가 그렇습니다. 주요과목, 주요과목 선생님까지 가면 다이아몬드처럼 천하무적이 되어 버립니다.

철학과에 진학한 절친이자 제자의 종교 수업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아이는 결정되었다고 믿는 세상과 다른 갑작스런 한 사건인 종교 수업을 만나 자신을 틀어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예측할 수 없다는 변화가 가진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유 의지’라는 틀기가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기에 기억나는 것보다 안 나는 대화가 훨씬 많습니다만 가장 기억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무언가다. 우리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는 지금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지금 우리의 선택이다.”

- 서울종교교과교육연구회 엮음, 241쪽.

 

아이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수구정권 시절 사법부가 재판을 놓고 청와대와 거래를 하고 정치적 고려와 사법부의 이익에 따라 임의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등 사법행정권을 남용하였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가치를 비웃고 개혁과 변화의 염원을 짓밟으며 국민의 주권을 침해한 이들을 심판하시고 정의가 바로 세워지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