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9일

by 좋은만남 posted Aug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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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3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2. 지난 주일 강화 남산교회와 함께 한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 연합예배에서 245,000원의 주일헌금이 걷혀 대북인도지원단체 함께나누는세상에 북한어린이돕기를 위한 기금으로 전달하였습니다.

3. 올해 여름 공동휴가는 특별한 제안이 없으면 하지 않겠습니다. 개별적으로 휴가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4. 지난 번에 열린 임시서울연회가 적법하지 않아 2차 임시연회를 오늘 오후 4시 30분 꽃재교회에서 다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연회원 여러분은 꼭 참석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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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서 뜻깊은 연합에배를 드렸습니다”

 

올해는 강화의 남산교회(윤여군 목사)와 함께 평화통일주일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감리회 선교국 평화통일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하게 된 계기로 이 예배를 제안하였고 남산교회가 흔쾌히 함께 하자고 동의하였습니다. 남산교회 예배당에서 먼저 예배를 드린 후 의미 있는 곳을 찾아 답사하기로 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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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후 남산교회에서 정성껏 마련한 맛난 점심식사를 한 후 30분 남짓 강화 송해면 철산리의 평화전망도로 이동하였습니다. 안내와 설명을 해주신 윤여군 목사님은 평화전망대 건물 앞에서 이 전망대의 이름에 대해 먼저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래 평화전망대였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이름이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적'은 적색을 제거한다, 즉 '빨갱이를 없애버린다'는 의미라며 과연 제적이라는 말과 평화라는 말이 함께 쓰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즉 적을 섬멸해야 평화롭게 된다는 폭력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상대를 섬멸하고 얻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일까요? 수구세력이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평화를 어떻게 이루려는 지, 통일을 생각하는 방식이 어떤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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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앞의 풍경을 본 교우가 ‘스위스의 목가적인 풍경이 느껴진다’고 말해 웃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복잡합니다. 해설사가 설명해주는 눈앞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사실이건 아니건 북한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대가 달라졌고 또 더 달라져야 함에도 여전히 이런 방식의 해설이 진행되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후에 윤 목사님께 ‘이 해설사를 아느냐, 이 사람의 원래 성향이 보수적이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 단지 매뉴얼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교우들은 수영을 해서도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거리인데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전망대 안내전단에 북한 주류판매 코너가 있다는 내용을 보고 관심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24조치 이후로 북한의 주류는 물론 북한산 농수산물이 남한에 수입금지 되었습니다. 그 많던 ‘무한리필’ 조개구이 가게들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곧 그곳에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 강화다리와 이어지는 길목에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가 있습니다. 윤여군 목사님은 조봉암 선생이 강화 출신으로 강화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밤마다 동지들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벽보를 붙이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살이를 한 후 일본에 유학하기도 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며 임시정부에서도 일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 선 감리교회 신자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후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여 남한의 토지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하였다면 조봉암이 주도한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농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과 방식으로 분배하는 혁신적인 토지개혁은 아쉽게도 한국전쟁 이후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진보당 창당을 추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고 이승만이 주도한 부정선거였음에도 500만표 이상을 득표하여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나 선거 패배 후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으로 몰려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4.19 혁명을 몇 달 앞둔 1959년 7월 31일에 전격 처형되었습니다. 조봉암은 서슬 퍼런 이승만이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주장하던 시절에 이미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독립운동 경력이 명백함에도 아직 독립유공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다는데 그 이유가 당시 150원이라는 큰 돈을 일제에 헌납하였다는 알 수 없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추모비는 그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노력해오다가 2001년에야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화통일주일의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이벤트를 마쳤습니다. 바라기는 머지않은 미래에 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이 아니라 평화통일감사주일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적은 무리들의 예배와 답사였지만 폭염보다 더 뜨거운 이 열망과 간구가 하늘 높은 곳까지 이르기를 빕니다.

 

“은평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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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부터 고민하고 준비하였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미루고 미루던 은평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지난 8월 14일 오후 5시, 역촌역 은평평화공원에서 하였습니다. 4월 즈음에 제막식을 하고자 하였으나 4.13 선거 때문에 미뤄지다가 이날 하였는데 이날은 올해 제정된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기림일)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소녀상 건립에 작게나마 참여하였기에 제가 제막식에 다녀왔습니다. 은평구 청소년들과 지역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 다채로운 순서를 마련하여 우리 지역민들의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자리에서 경서교회 이경덕 목사님, 녹번복지관장 오은석 목사님과 대학 선배이신 은평구시설관리공단 김창식 경영본부장님, 그밖에 많은 분들을 만나 인사하였습니다. 은평구가 꼭 해야 할 일에 앞장서게 되어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충남대에서 출범하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의 2,000여명의 학생들이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하던 중 경찰과 4일 동안 대치하다 단체 연행되는 건대 항쟁을 계기로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학생들은 8월 19일 충남대에서 전국 95개 대학 3,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출범식을 열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외세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7기까지 이어지다가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대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자진해산였다. 전대협은 현재 이인영, 임종석, 송갑석 등 의장을 역임한 정치인들이 대거 진출함에 따라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전대협 대학생들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이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역할을 기대한다.

출처 : 나무위키(https://namu.wik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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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하늘 한 하늘    |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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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없어 서러운

마음뿐인

아버지

철철 피를 흘리며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 조각들

휴전선 철조망을 부여잡고

흔들어대면서 밤새

찬비를 맞고 계셨겠네요

 

이제 비도 멎고 아침햇살 쫙 퍼졌는데

바람만은 싸늘하군요

이쪽에서 부는 바람에 저쪽으로 나부끼며 쳐다보는 

남녘 하늘

저쪽에서 부는 바람에 이쪽으로 나부끼며 쳐다보는 

북녘 하늘

그 두 하늘이 다르기라도 한가요

 

무슨 소리냐

그 하늘이 그 하늘이지

내 왼쪽 눈에서 왈칵 쏟아지는

남녘 하늘

내 오른쪽 눈에서 왈칵 쏟아지는

북녘 하늘

가시쇠줄로 찢어진 하늘 

아프고 쓰리기로  말하면

그 하늘이 

그 하늘이다

-------------

그 하늘이 그 하늘이다

 

남과 북은 둘이 아니다

둘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우릴 속인 게다

지난 73년을 속여 온 게다

온갖 이념과 거짓으로 협박하고 속인 게다

둘 일 수 없는 것들이 둘로 나뉘어 살았으니 

죽을 맛이었다...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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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성경II (3)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2. 신앙생활의 표준(1)

     우리는... 성경이...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사람은 어느 단체나 공동체에 소속하게 되면 그 공동체가 합의한 원칙 안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학생은 학교의 교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어떤 행동이 학생으로서 올바른 행동인지 그릇된 행동인지 혼란스러울 때는 그 학생이 소속된 학교의 교칙에 근거하여 판단한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가장 많이 묻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신앙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비신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 있을까? 성경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성경으로부터 원칙을 찾아야 하고, 성경으로부터 신앙적 판단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앙생활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성경은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함이 중요한가, 믿음이 중요한가라는 물음이 있다. 로마서 1장 17절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증거하면서 행함보다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믿음보다는 행함을 강조한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6-17) 입(말)으로만 선언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아무 유익함이 없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는 강조한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야고보서 2:23)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는 증거한다. 로마서에만 근거할 때 행함보다는 믿음이 중요하고, 야고보서에만 근거할 때 믿음보다 행함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함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성경적이고, 믿음보다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도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행함보다는 믿음을 강력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을 배제한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라고 설명하면서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을 통전하였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웨슬리의 해석은 성경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읽어가는 성경읽기이다. 성경은 수많은 세기를 걸쳐 다양한 상황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읽지 많고 웨슬리와 같이 전체적(통전적)으로 읽어가면서 신앙생활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의 표준을 성경에서 찾을 때 성경의 다양성을 통일성의 관점으로 읽어가야 한다.

성경은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가 성경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을 때 하나의 논리만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논리(either/or)를, 어떤 상황에서는 이것도 저것도(both/and)의 양자모두선택의 논리를, 어느 상황에서는 우선순위의 논리(the order of priority)를 적용시키면서 성셩에서 신앙생활의 쵸준을 찾아야 한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열왕기상 18:21)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해야 하는 논리는 이것이냐/저것이냐의 샹자택일의 논리이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과 바알을 모두 선택하는 양자 모두를 선택하는 논리나,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고 그 다음에 바알을 선택하는 우선순위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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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마태복음 3:13-17(새번역)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자신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가로 찾아오신다. 자신의 마을을 떠나 낯선 광야에 가는 일이 비록 쉽지 않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삶으로 실현하고자 결단하는 상징적인 여정이었기에 그 마음은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 그 곳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양식 삼으며 예언자의 삶을 살아왔던 세례자 요한 또한 예수를 만나고 나서 깜짝 놀랐다. 그 동안 그토록 자신이 기다려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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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 두 사람의 만남은 태도부터 남달랐다. 예수가 먼저 고개를 숙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길 요청했고, 요한 또한 자신의 고개를 숙여 예수께 세례를 청했다. 각자 자신을 먼저 낮추고, 양보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첫 마디는 이 장면에서 등장한다. 서로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던 중 예수께서는 누가 세례를 먼저 받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 하며 요한을 설득한다. 누가 먼저 세례를 베푸는지, 둘 중 누가 더욱 서열이 높은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의 첫마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께 세례를 준다.

 

고난 받는 이들이 가득한 이 땅에서는 ‘의’를 회복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시급하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여러 가지 고난으로 인해 아픈 사람들의 '아린 심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선은 항상 먼저는 하나님께 향해 있었고, 다음으로는 ‘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에서 고난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오늘 날 우리 현실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작금의 교회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바로 예수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높아지려는 독선과 아집의 태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이유는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바로 우리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의 삶을 바로 세우고, 이 땅 위에 사라져 버린 정의를 일구는 일이 바로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낯선 광야로 나올 만큼의 고생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대방 보다 먼저 낮아지며, 자신의 자세를 더욱 낮출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 역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0일부터 26일까지 두 차례로 나뉘어 금강산에서 열립니다. 1차에서는 89명, 2차에서는 83명의 가족들이 70여년 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생이별하였던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 상봉의 정을 나누게 됩니다.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반인도적인 분단상황이 속히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바뀌도록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