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교회연합주일, 왕국절 제3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6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이번 수요일(12일)에 성서대학 가을학기를 개강하겠습니다. 강의 내용은 지난 학기에 하던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참여를 부탁합니다.
4. 교회의 미래 비전을 위한 1박2일 끝장토론회를 하자는 의견이 있어 진행하고자 합니다. 9월 29~30일 혹은 10월 6~7일에 하려는데 여러분의 의견을 구합니다.
5. 이번 토요일(15일)부터 토마토학교가 가을학기를 시작합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일본 홋카이도에 진도 6.7의 강진이 발생하여 서른다섯 명이 목숨을 잃고 다섯 명이 실종되고 64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큰 인명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산사태가 나고 주택이 무너졌으며 정전사태가 나는 등 주민들이 큰 불편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속히 피해복구가 이뤄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해고는 살인이다!
지난 목요일(6일) 대한문 앞에 설치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에서 감리교시국대책위가 주관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촉구 기도회'가 열렸고 제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2009년 수천 명이 해고된 후 쌍용차의 주인이 바뀌면서 복직 약속을 하였지만 아직 119명이 복직되지 못하고 생활고와 스트레스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해고노동자와 가족 3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심근경색 등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회가 열리던 당일 한겨레에는 눈여겨봐야 할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의 내상을 치유하는 심리치유센터 '와락'은 '2018년 쌍용차 가족의 건강상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조사를 보면 해고자들의 아내 48%가 지난 한 해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일반 여성의 8.67배입니다. 복직된 노동자의 아내도 일반여성의 3.72배 높았습니다. 우울증상도 심각하여 해고노동자는 지난 1주일 동안 89.3%, 아내는 82.6%가 우울증상을 겪었으며 이는 일반인의 13.37배, 8.27배 높은 수치입니다. 또 해고노동자의 87.8%가 해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다고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어울리지 는 것 같고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는 답도 54.9%나 했습니다. 이외에도 해고 가정의 배우자 관계 만족도, 해고자라고 차별을 겪은 경험도 등의 항목에서도 매우 심각한 결과가 나왔습니다.[참고 : 한겨레, "해고는 살인이다"... 쌍용차 해고자 아내 절반은 '극단적 생각']
해고는 명명백백한 살인입니다. 노동자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는 물론 그 자녀들, 가족들에게까지 가해지는 살인임을 이 조사결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영을 잘못하거나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 위해 매각에 앞장선 쌍용차 경영진 중 어느 누구 하나 생활고를 겪었다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했다, 심근경색에 걸렸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잘못을 노동자들에게 덮어씌운 것도 모자라 해고라는 사회적 살인을 그들의 가족에게 행한 악덕 자본가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받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 끝장토론 한 번 합시다”
지난주일 오후에 이재원/고수정 성도님 댁에 수해 입으신 거 복구하시는데 좀 도와드리는 척이라도 하려고 했더니만 다른 분들이 이미 다 해놓으셔서 그냥 인사만 하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교회 부근에 도착했는데 역시 그냥 헤어지기 아쉬우셔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헤어지자 하여 커피숍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교회의 미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인구가 줄고, 개신교인도 줄고, 교회에 젊은 세대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앞에 머지않아 교회에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이 위기 앞에 자유롭지 않다고요. 이런 상황에 더해 저는 우리 교회 교인이 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는데 전도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안도 없고, 이걸 이겨낼 전략도 별로 없다고, 교우들 개개인은 모두 다 복음에 따라서 열심히 살고 계시고 있는데 저도 목회적 자부심을 느끼지만, 다들 바쁘게 사시다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고, 부끄럽지만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의 무능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랬더니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의 대안을 찾고 실천해야 할 우리 교회가 그렇게 무기력하면 안 된다고 교우들이 펄쩍 뛰십니다.
그래서 올해 '한여름 밤의 꿈'을 아직 하지 않았는데, '가을밤의 꿈'으로 바꿔서 교회에서 1박2일 끝장토론을 하면서 미래의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추석명절 지나고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 점심까지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생각을 많이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828년 9월 9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개혁가, 사상가 톨스토이 탄생"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시인, 극작가, 개혁가, 사상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이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 툴라 부근의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성장하여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끼고 중퇴하였다. 그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과 기만을 벗겨내고자 하였으며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던 시기를 적확하게 묘사하며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영적인 통찰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라는 작품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인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했다. 톨스토이는 백작의 지위를 가졌으나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 지식인이자 그의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올해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제10장
하나님의 은혜 I (2)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믿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런연에 따르면, 웨슬리의 믿음 이해는 세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믿음을 합리적 동의로 보면서 이성에 중심을 두고 믿음을 이해하였다. 이 단계에서 웨슬리는 믿음을 반드시 이성으로 충분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합리적 권위에 대한 동의로 이해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믿음을 관계적인 것으로 보았다. 믿음이란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며, 개인 안에서 운영되는 합리적 동의도 아니다. 믿음은 은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계속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규정하는 믿음은 이성적 동의를 넘어서, 권위에 대한 동의를 넘어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계속적인 사건으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와 같이 믿음을 인간의 의지적인 작용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관계성으로 이해한다면,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적인 것으로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계속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에 따르면 “복음적인 신앙생활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교회 공동체의 책임적인 삶이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고 우리들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이 은혜를 받아들이고 책임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2.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믿습니다.
웨슬리가 가르치고 있는 감리교의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거룩함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거룩해지기 위하여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점은 죄의 문제이다. 죄를 용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와 거룩함의 관계는 상극의 관계로 설정되어야 한다. 죄를 지니고 있는 상태를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거룩해지기 위하여 죄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과 죄의 관계는 능동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동적인 관계이고, 하나님과 죄의 관계는 능동적인 관계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지 않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강조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믿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리교는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용서함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거룩함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이 과정은 성화의 과정이고, 성화는 감리교의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람을 받아 거룩해지며”라는 감리회의 신앙고백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성화의 과정이다.
7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웨슬리의 구원론에서 칭의와 더불어 새롭게 거듭난(신생) 사람은 성화의 과정에 참여한다. 성화의 문자적인 의미는 거룩하여지는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은 변증법적 과정으로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우리 안에서 제거해야만 하는 요소라면, 긍정적인 측면은 우리 안에 더 충성하게 증가시켜야만 하는 측면이다. 부정적인 측면은 죄의 요소들이고, 긍정적인 측면은 사랑의 요소들이다. 즉,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죄를 제거해야만 한고, 반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더욱 더 충성하게 확장시켜야만 한다. 죄의 제거와 사랑의 증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계속)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43-48(새번역)
예수께서는 흔히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율법을 완성하는 이로 묘사됩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당시의 율법적 가치에 대해서 비판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있던 많은 이들은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 동안 믿고 있었던 ‘신앙의 상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래야만(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이 실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율법을 포함한 구약성서의 여기저기(출23:4-5, 레19:33-34, 욥31:29, 잠24:17, 잠25:21-22)에서 주구장창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원수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신앙의 전통 안에 흐르고 있던 근본적인 믿음의 가치를 재차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만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인 듯 믿고 따랐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께서 집요하게 파고 드신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건만, 나와 다른 존재를 적으로 규정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속성은 결국 ‘완전하신’ 하나님까지 곡해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만 사랑하고 "원하는 만큼"은 증오했으며, 어느새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과 증오, 차별과 멸시의 하나님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억울하게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의 이름이 아니라, 정죄와 보복, 공포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복음이 아닌 것(증오)을 복음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만의 통념으로 이웃과 원수를 나누고, 사랑할 대상과 증오할 대상을 나누는 ‘그 만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단호한 태도로 ‘어림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여기서 ‘완전함’은 원어로 흠잡을 데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한하게 개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타인을 사랑할수 있는 가능성을 각 자의 ‘그 만큼’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펼치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당신은 얼마만큼 사랑할수 있습니까?
태어나서 처음 본 감성영화 - 방정혁 학생
오랜만에 책모임과 함께하는 영화는 '어느가족'이였다.
이 가족은 피로 이루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만들어서 살아가고 있었다. 각자의 사연을 품은채 가족같이 살아가고 있었으며, 생계유지를 위해 때때론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의 주요 사건은 어린 여아인 '유리'를 가족으로 데려오며 시작된다. 유리는 자신의 부모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며 살아가고 있었고 폭력을 피하려 베란다로 나와 대피해있다가 이 가족을 만나게 된다. 이 가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족으로 데려오게 되었고, 같이 살게 되었다. 유리의 어린이집 교사가 유리를 신고하여 실종신고 되었지만 이 가족은 유리를 데리고 살기로 한다. 유리는 이 가족의 아들 담당의 '쇼타'의 여동생이 됨으로써 쇼타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쇼타와 아버지 담당 '오사무'의 도둑질에 가담하게 되면서 자신을 닮아가는 유리를 본 쇼타는 회의감을 느끼며 유리를 도둑질에서 손때게 하려한다.
이 가족은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부에선 이 가족을 곱게 보진 않지만 이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모든 가족이 마당에 모여서 하늘을 보며 각자의 이야기를 담았을 때는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지만, 모두 모였을때는 가족이라는 구성이 되면서 엄청 크게 느껴졌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감성영화이지만 다 보고나서 엄청 좋았던 경험으로 남았다. 다음에도 이런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합창단에 지원했다. 나름 노래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원할 때마다 번번이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너무 낙심되고 슬퍼서 괴로워하며 자책했다.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다면 좋겠는데 그럴 형편이 가정 형편을 탓했다.
어느 날 연습할 때 가던 공원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그마한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칭찬했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다시 공원에 가서 노래를 조용히 부르고 있자 할머니가 또 오셔서 참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하셨다.
이렇게 여러 날 반복되면서 소녀는 노래 부르는 재미를 느꼈고 수년 후 마침내 가수선발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
소녀는 갑자기 그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할머니를 찾았지만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뒤였다.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할머니는 청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듣고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귀가 성한 사람도 하지 못한 격려와 칭찬으로 소녀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노래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은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칭찬인지는 잘 모르는 듯합니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고래가 알아듣지 못하면 고래는 춤추지 않습니다.
칭찬은 살리는 말입니다.
무조건 잘한다는 것이 칭찬이 아니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나 상사를 향한 고언도 살리는 말이라면 그의 영혼을 춤추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생명은 살리는 말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