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4일

by 좋은만남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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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왕국절 제11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4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지켜주신 것과 귀한 열매를 결실하게 하신 하나님께 마음껏 감사하고 기쁘게 누리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공동식사 후에 월동준비를 위한 김장을 하겠습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4. 다음주일은 흩어지는 예배로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교회 예배에 참여하시고 주보 등을 지참, 방문 소감을 준비하여 셋째 주일(18일)에 모여 방문 소감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5. 내일부터 두 주 동안 예배당 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계획된 일정 내에 공사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협조와 기도를 부탁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남과 북 사이에 합의를 맺고 11월을 시작하는 날부터 하늘과 땅, 바다에서 서로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였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안보를 포기한 것이라고 정부를 비난하지만 한반도에서 이런 평화적 실험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시도를 통해 70년을 이어온 증오와 대결이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되고 평화가 정착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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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의 미래와 비전  ④ 외적 성장

 

교회의 미래가 밝지 않은 현실입니다. 고령화에 출산 인구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데 교회에는 젊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도 전망이 밝지 않습니다. 과연 지금의 몸집과 세력, 인원을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이번 토론회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교회의 분위기가 최고이지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목회자로서 솔직히 압박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선 우리교회가 새신자가 발붙이기에 쉽지 않은 분위기이고 교우들 관계가 가족 같다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오히려 새신자가 발붙일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기성교회와는 다른 예배 순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지적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새신자를 위해서 좀 덜 친한 척을 해야 하나? 언제 올지 모르는 새신자를 위한 배려는 어떻게 미리 준비해야 할까?

그러나 새신자가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교우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 또한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 관계가 깨지는 일로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특히 담임목사인 저의 말투와 송곳 같이 찌르는 듯한 말이 상처가 된다는 지적에 개인적으로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새로운 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하는 것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이웃이 우리 교우들의 삶과 태도를 보고 '저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동기부여가 더욱 의미 있을 것입니다. 외적 성장을 성취하기 위해 인위적 어떤 전도 프로그램이나 캠페인, 테크닉에 치중하는 것은 우리교회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외적 양적 성장이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만 치우쳐서 내면적이고 질적인 관계를 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의 에너지가 밖으로 발산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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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대학 야외수업으로 에버랜드에 다녀왔습니다”

 

좀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대학 야외수업을 지난 10월 24일에 용인 에버랜드에서 하였습니다. 야외수업이라기보다는 소풍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성서대학 학생들과 오진숙 권사님이 함께하셔서 총 여덟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동물들이 뛰노는 사파리도 해보고 놀이기구도 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회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밤 9시가 넘어 에버랜드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많아서 정신없고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지만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점심을 대접해주신 오진숙 권사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가을 농촌생태활동을 하였습니다”

 

지난주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오후 농촌생태활동 일정을 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을 하였지만 믿음으로 강화도로 출발하였습니다. 오후 3시쯤 도착해서 잠깐 쉬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고추밭과 고구마밭을 정리하고 울금을 캤습니다. 비가 와서 땅이 촉촉해 오히려 일이 수월하였습니다. 김형휘 성도님이 현수와 희수를 데리고 뒤늦게 도착하여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보탰습니다. 일을 마치고 이필완 목사님댁에서 차려주신 저녁을 맛있게 잘 대접 받은 후에도 한참을 흥겹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돌아왔습니다. 짧은 경험이지만 농업, 농촌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38년 11월 9일    "독일에서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나다"

11월 7일, 17세인 독일계 유태인 청년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이 독일의 유태인 박해와 관련,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를 암살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서 일어난 사건이다. 사실은 끔찍한 테러였지만 '수정의 밤(Kristallnacht)'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인 이 사건은 ‘깨진 유리의 밤’으로도 불리는데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나치인 요제프 괴벨스가 선전매체를 동원해 독일 국민을 선동하여 점포 815개소, 주택 171동, 유대인 예배당 시나고그 193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고 유대인 2만 명이 체포(비공식)되었다. 독일제국보안본부는 훈령을 내려 유대인 상점과 집은 파괴할 것, 유대인 예배당은 주변에 불이 번질 염려가 없으면 소각할 것, 경찰은 시위를 저지하지 말 것, 가능한, 부유한 유대인을 우선 순위로 체포할 수 있는 만큼 체포하라고 하였으며 유태인이 상점 파괴에 대한 보험금을 수령하자 라트의 암살에 대한 보상금이라며 몰수하였다. 혐오와 증오에 기반한 차별과 배제를 동력으로 삼는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테러의 악순환을 반복한다는 역사적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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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독립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는 2년차 초짜감독이다. ‘다큐멘터리’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아무 대책 없이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찾아가고, 기다리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인사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든 주인공과 말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시간을 달래는 일이 주요업무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일 텐데 다큐멘터리 작업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열고, 열고, 또 여는 작업이 아닌가. 

상처투성이로 떠밀려 거리노숙을 하는 홈리스에게 "당신의 삶을 보여주세요."라며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무지막지함’. 그리고 그 요구에 대해 응답하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느끼는 ‘막막함’이 바로 다큐 작업을 하면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상적 감정이다. '무지막지함'이야 송구한 마음으로 성찰하고 방향을 다듬어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의 태도를 수정하면 된다지만 '막막함'이란 감정을 이겨내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과 과정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점. 그렇다. ‘독립 다큐’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라는 상황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2 '혼자’에 익숙해지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이 ‘혼자’라는 상황이 ‘자유’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도 않는다는 점을 절감 할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이란... 우리의 실존이 ‘세상’이라는 구조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까. ‘혼자’서 기획하고 연출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다큐제작 과정을 때론 견디고, 때론 누리다 보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조건들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은 물론이며, 영화의 특성상 세상 사람들의 익숙한 시선과 편견으로 부터도 온당 자유롭지 않다. ‘혼자’라서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는 작업 초기에 이미 사그리 무너져 내리고,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서글픈 경험도 여러 번 하게 된다. 

‘혼자’이기 때문에 좀 더 쉽고 빠르게 타협하고, 좀 더 쉽사리 비겁해질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다 보면 과연 온전히 ‘혼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것일까라는 회의감마저 스멀스멀 피어나기도 한다. 

 

3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다큐멘터리를 수식하고 있는 ‘독립’이라는 단어를 매우 애절하게 바라본다. 흔히 인디(independence)라는 영어단어로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저항’이라는 늬앙스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데, ‘혼자’를 진정 ‘혼자’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저항’하겠다는 선언이자 실천적 지향성을 담고 있다.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또 특별히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 속에서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복기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세상의 편견과 익숙한 정서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진정한 ‘혼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꼭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 수 있다. 

단순히 혼자 밥을 먹는 일에도, 혼자 영화를 보는 일에도, 혼자 여행을 가는 일에도 일종의 저항적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혼밥’, ‘혼술’을 찬양하며 1인 라이프 생활이 유행인 듯 강요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저항적 감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저 유행과 상품 판매를 유도하는 자본에 의해 자신도 모른 채, 또 다시 진정한 자유를 침해 받고 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진정한 ‘혼자’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애절할 수밖에. 또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더욱 애절할 수밖에.

 

4 그러고 보니 문득 영화관에 가고 싶다. 사실 난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 보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어두컴컴한 영화관 속에서 네모난 스크린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태아마냥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상상과 사유의 여행을 떠난다. 영화를 볼 때 물리적으로 수백 명의 관객이 함께하지만, 오롯이 나 혼자임을 느낀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와 내 삶의 이야기가 때론 병치되고 갈등하며 호흡을 만들어 가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은 현실의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흔히 영화를 혼자 보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 극장에 둘이 가건, 셋이 가건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동안에는 오롯이 혼자 보게 마련이다. 다만 영화가 끝난 후 각자의 감상을 함께 나눔으로 더욱 풍성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혼자’라는 인생의 여정을 자유롭게 살아낸 영혼들만이 서로의 나눔으로 이 땅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올 가을에는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진정으로 자유하며, ‘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 페이퍼 2018년 가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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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교회 I (1)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 6조는 교회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6조의 전반부는 교회의 사명을 언급하고 있고, 후반부는 교회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교회의 본질을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고백하고,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로 고백하고 있다. 비록 감리회 신앙고백은 교회의 본질에 앞서서 교회의 사명을 먼저 고백하고 있지만, 교회의 사명보다 교회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교회의 본질을 먼저 고찰하려고 한다. 12장에서는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고, 13장에서는 교회의 사명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십자가가 달려 있고 강대상을 비롯한 성구가 있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십자가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팔려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교회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건물들을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예수가 궁극적인 그리스도임을 부정하면서 특정인물(교주)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이단주의자들도 십자가와 예배의 공간을 가진 건물을 사용한다. 이러한 건물도 역시 교회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십자가와 성구들이 없다고 하여도 몇몇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예배하는 곳이면 그곳은 교회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에 대한 정의를 건물에서 찾는 것은 외형적인 정의이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정의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것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다. 이 뜨거운 고백은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교회의 본질적인 정의는 이 고백에 기초해야 한다. 웨슬리의 종교강령도 교회를 “참 믿는 이들의 모인 공회”로 규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용된 ‘교회’라는 말의 의미도 건물보다는 신앙고백에 근거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희랍어이다. ‘에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 모두 114번 등장한다. 사도행전에서 23번, 바울서신에서 46번, 복음서 중에서는 마태복음에서 2번 사용된다(마태복음 16:18, 18:17).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대략 A.D. 50sus경에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기 이전에 희랍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사용하고 있었던 단어이다. 아테네에서 에클레시아는 모임을 지칭하였으며 “그 회합은 군주를 선출하고 정치적인 결정들을 추인하며 사법 결정들에서 제기되는 탄원을 듣기 위해 함께 만난 모임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가정이나 특별한 장소에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로 표현하였다. 골로새서 4장 15절에서도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눔바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문안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초대교회에서 교회라는 말의 사용은 건물과 같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구성원들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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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목수가 39살에 죽어 하늘나라에 올라갔다. 이 목수는 젊어서 죽은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그래서 천국 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에게 따졌다. 

“한참 일할 젊은 나이에 부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자수성가해서 이제 살 만하게 되었는 데 부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39살에 이 곳에 온 것이 억울합니다.” 

끝까지 듣고 있던 천사가 장부를 들춰 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39살밖에 안 되었다고 말했소? 당신의 나이는 100살이 넘었는데 무슨 소리요?” 

목수는 천사의 말에 놀라며 자신은 39살인 것을 강변했다.그러자 천사가 목수 앞에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당신은 새 가구를 만들 때마다 당신이 일한 시간을 불려 돈을 청구하였지요. 삼 일 일하고 10일 일하였다고 거짓말 하였지요. 5일 일하고 20일 일한 것이라고 속였지요. 

그리고 깍아 주는 척, 잘 해 주는 척 하지 않았소? 그 시간들을 계산해 보니 벌써 100살이 훨씬 넘었소! 

살만큼 살았으니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은 마시오!”

 

하나님은 진실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껍질을 보시지 않고 알맹이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산법과 우리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강단에 선 사람입니다. 자기가 한 설교대로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설교에서 그 행동의 열매를 찾으려든다면 어떻게 할까 오늘도 두렵고 떨려 입이 오그라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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