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12.22 16:31

201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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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아기 예수의 오심과 나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강림절 제4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길을 안내하시고 삶과 죽음,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경건하게 기다리고 맞이하시는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탄절 예배가 25일(화)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예배 위원은 박성중 목사님 인도, 함옥분 장로님 기도이시고 공동식사는 임정희 집사님입니다.

3. 성탄절 예배 후 광화문광장에서 오후 3시에 열리는 난민과 함께 드리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연합예배'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4. 31일(월) 송구영신예배 전 저녁 8시 30분에 당회 및 구역회를 합니다. 예결산, 임원선출, 위원회 사업계획 보고 등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회원 자격과 관계없이 모든 교우들이 함께 참여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5. 한효균 부장님이 26일(수)에 은평뉴타운 우물골 단지로 이사를 하십니다. 

6.친교문화위원회에서 1월 4(금)~6일(일)에 '겨울놀이 : 제주 4.3 역사탐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위원회 공지사항을 참고하십시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카풀법 때문에 택시업계와 기사들이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와 강력하게 정부를 성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이전 정부 시절에 제정된 것이고 택시 서비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도 큽니다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택시기사들의 심정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성숙해가는 선택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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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누구의 것일까요?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가끔 생각해봅니다. 영적으로는 물론 하나님 것이고 법적으로는 감리교회 유지재단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목사꺼라고 생각할 겁니다. 실제 많은 교회가 목사의 카리스마(?)에 의해 성장하였고 또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갖고 강력하게 행사하니 그럴겁니다. 그렇지만 교인들도 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원하지 않으면 목사를 몰아내거나 교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목사와 교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교회를 봅니다.  

저는 교회가 공동체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도 공동체의 일원이고 한 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목표와 존재 의미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교회가 어떤 일에 재정을 투여해야 할지, 누가 교회 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할지는 목사의 독단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결정해야 하고 그래야만 모두가 소속감과 책임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두가 각 지체가 되는 성서의 말씀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위원회별 모임을 갖고 논의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모인 위원회는 예배영성위원회와 친교문화위원회였습니다. 교육위원회는 교회학교 예배가 있어서 나중에 따로 모이기로 하였고 다른 위원회는 참석율이 낮아 모이지 못하였지만 선교사회위원이신 남기평 목사님은 이번 성탄절연합예배 참여에 관하여 의견을 주셔서 수렴하기로 하였습니다. 친교문화위원회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송년행사와 겨울놀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것 같고 예배영성위원회도 여러 가지 주제로 폭넓게 이야기를 나누고, 좀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논의 결과도 제출해 주셨습니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위원회에 참여하여 주인의식을 갖고 이야기 나누고 또 제안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우리교회가 새로운 단계로 상승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865년 12월 24일    "미국 퇴역 남부 동맹군인들이 큐 클럭스 클랜을 결성"

KKK단으로 익히 알려진 쿠 클럭스 클랜(영어: Ku Klux Klan)은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反)로마 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는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백인임을 과시하여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기 위해 흰색 천으로 온 몸을 감싼다. 미국 남북 전쟁후 연방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급진파들이 해방된 흑인들을 정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계획하자 이에 반발해 1865년 12월 24일 테네시주 펄래스키에서 여섯명의 은퇴한 남부군 장교들이 남부의 재건을 목표로 급진적인 지하 저항세력 KKK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흑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는 것과 흑인들과 백인들을 분리 격리시키려는 목적으로 흑인들과 동조자,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자들을 테러, 폭력과 협박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는데 극단적 폭력행위로 단속을 받자 형식적으로는 해체되었으나 1960년대 민권운동이 활발해지자 다시 산발적으로 재등장하였다. 평화의 왕 예수의 탄생을 기리고 축하하는 성탄전야에 이런 단체가 결성되었다는 것이 매우 비극적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는 KKK단과 다르지 않은 인종차별과 우월주의가 사회적 약자를 향해 다양한 폭력과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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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필자가 몸담고 있던 영화모임에서 <남미영화특별선>을 주제로 4주간의 영화상영회를 진행한 바 있다. 영화계의 변방으로 일컬어지는 ‘남미영화’를 만나는 일. 그것은 영화의 선정부터 상영에 이르기까지 매순간 낯설면서도 신선한 경험의 연속이었는데, 정보도 제한적이고, 상영본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여러 순간 어려움에 봉착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당시 상영작품은 <중앙역(1998)>을 포함하여 <검은신 하얀악마(1964)>, <늪(2000)>, <시티오브갓(2002)> 등 4개의 브라질-아르헨티나 영화였는데, 각기 독특한 매력을 풍기며 강렬한 인상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특별선을 마치고 나름대로 정리한 남미영화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현실묘사가 매우 직접적이라는 점(리얼리즘), 두 번째는 ‘가족’을 중요한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가족주의), 마지막 세 번째는 다분히 종교적이라는 점(기독교 신앙)이다. 실상 남미영화가 가지는 이러한 특징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적인 현대사 & 빈곤한 현실’이라는 컨텍스트(context)와 따로 떨어뜨려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구조 속에서 분출되는 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견고한 가족주의와 가톨릭 신앙에 기대어 부박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제3세계 영화운동의 계보를 잇는 남미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영화 <중앙역>은 앞에서 언급한 남미영화의 특징을 고루 잘 담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감독의 노력은 남다르다. 예를 들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을 인위적인 연출 없이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하는가 하면, 심지어 전문배우를 10여명밖에 투입시키지 않는 대신에 현지인들을 영화에 직접 출연시켜 사실감을 극대화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한 물건을 절도한 청년을 사설업체 보안요원이 그대로 사살했던 사건, 아동 장기매매 등 당시 브라질에서 크게 문제시 되었던 일들을 영화에 고스란히 등장시켜 특유의 리얼리즘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영화 <중앙역>은 1960-70년대 제3세계 영화운동인 “시네마누보의 부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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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기본 플롯은 비교적 간단하다. 브라질의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앙역에서 우연히 얽히게 된 중년부인과 어린 소년,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 ‘세상의 끝’이라는 마을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일종의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이다. 

 냉소적이다 못해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중년여성 도라(페르난다 몬테네그로 분)는 전직 교사이지만 지금은 중앙역사 안에서 글 모르는 이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작성해주는 편지글 속에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틋한 사랑의 고백과 안부의 메시지가 가득하지만, 그녀에겐 그것들이 단지 거짓과 가식의 목소리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유일한 낙은 일마치고 귀가하여 그 날 보냈어야 했던 편지들을 부치지 않고 조롱하며 찢어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도라 앞에 난데없이 귀찮은 골칫덩이가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어린소년 죠슈에(비니시우스 드 올리베이라 분)다. 죠슈에는 여느 어린아이 같지 않은 당돌함과 조숙함을 지닌 소년이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았고, 집도 절도 없는 천애고아가 되었음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지금 죠슈에에게 유일한 꿈이며 그리 미덥지 않지만 도라 아줌마가 자신을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영화 <중앙역>은 나이와 경험이 많지만 그만큼 상처도 많아서 속물적이고, 냉소적이며 매사에 주저하는 도라와 어린만큼 순수하며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죠슈에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과 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여느 로드무비와 마찬가지로 ‘중앙역’에서 출발하여 ‘세상의 끝’에 이르는 도라와 죠슈에의 여정은 변화와 화해 그리고 구원으로 이르는 순례길이 된다.   

 

 앞서 남미영화 특징 세 번째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 <중앙역>은 상당히 종교적인데 재밌는 것은 영화의 주제와 소재 심지어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까지 노골적인 기독교 신앙의 메타포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제목인 ‘중앙역’이라는 공간은 욕망이 가득한 거대도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언제라도 그 곳을 떠날 수 있는 출발점(회심의 시작)이기도 하다. 역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가. 중앙역에서 출발하여 땅 끝으로 가는 길은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을 점점 비우는 과정이며,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향하고, 나아가 땅 끝에까지 이르는 여정이다. 이는 결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처럼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되는 신앙여정을 뜻한다.   

 죠슈에(여호수아)의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마을의 이름은 “붐 제수스(좋은 예수)”, 죠슈에의 형제들의 이름 또한 아이쉬아(이사야)와 모쉬르(모세), 심지어 아버지 이름은 “제수스(예수)”이다. 다시 말해 죠슈에는 아버지이자 자신의 창조주인 제수스(예수)를 찾으러 지금 땅 끝 마을에 와 있는 것이다. 이  곳에서 죠슈에는 형제들을 만나고, 아버지가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결국 도래하게 될 ‘그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도라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서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화를 위한 새로운 희망을 품으며 그 마을을 떠나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실상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그 곳이 도라에게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자 진정한 ‘중앙역’이었던 셈이다. 고난 가운데 신비가 있고 죽음 가운데 부활이 있다는 어찌 보면 모순된 듯한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듯 영화에서 ‘중앙역’과 ‘땅 끝’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공간적으로 구현된다.          

 

 영화 <중앙역>의 가장 큰 미덕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것과 동시에 ‘라틴아메리카’라는 컨텍스트(context)도 간과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로 꼽는 장면은 두 사람이 ‘세상의 끝’ 마을에 도착한 후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직전, 도라가 죠슈에에게 하는 말이다. 

 

“네가 상상했던 아빠가 아닐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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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터 줄곧 유지해 오던 도라의 이 냉소적인 시선은 죠슈에가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를 만나기 일보 직전 자신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것은 ‘의심’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전환이다. 혹 죠슈에가 상상했던 전형적인 아빠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분명히 더 멋진 삶을 함께 일구어갈, 혹여 상상해본적도 없는 새로운 동행자의 모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돌아보면 영화는 도라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을 이상하리만치 착하고, 긍정적이며, 순종적 인물들, 즉 전형적인 종교적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조슈에 조차 한 없이 해맑고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니 말이다. 죠슈에는 외친다. “아빠는 분명히 훌륭한 분이고, 나를 완벽하게 구원해주실 꺼야!” 전형적인 사람들이 고백하는 전형적인 신의 모습은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한가. 영화는 이야기 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가 겪어내고 있는 작금의 서글픈 현실 속에서 전형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신앙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여전히 불의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지배만 영속시킬 뿐이라고. 결국 중앙이 아니라 땅 끝에서. 우리가 도무지 상상치 못했던 그 곳에서 진정한 해방은 시작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지만 그 만큼 우리의 상상력이 가냘파지진 않았는지. 때론 우리의 상상력 안에 하나님을 가둬놓고, 우리의 힘겨운 현실을 버티는 버팀목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해방과 정의의 하나님.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비록 우리가 상상했던 신의 모습이 아닐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구원의 역사는 도무지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의 끝을 ‘중앙역’ 삼으실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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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코코> 

리 언크리치 감독, 115분, 미국, 2017. 

 

애니메이션 <코코>는 전형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남미 명절인 ‘죽은 자들의 날’을 주요 무대로 뮤지션을 꿈꾸는 미구엘의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모험이야기는 생각보다 유쾌하고, 의미 있다. 여기서 가족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남미영화의 특징이 전면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특히 ‘기억’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앙역>과 <코코>를 보면서 의아하게 느껴지는 점은 분명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무속신앙적인 면모를 생각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지점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생활, 전통과 가치는 삶의 환경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다. 좋은 나무는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마7: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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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교회 II (3)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1. 예배와 친교(2)

     우리는 예배와 친교...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참다운 근거는 삼위일체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친교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의 본질이고 방식이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수직적인 친교와 수평적인 친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교인의 친교이며, 후자는 교인과 교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예배와 활동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과 수직적인 친교를 열어 나가야 한다. 수직적인 친교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더 나아가서 수평적인 친교를 통하여 교인들이 서로 서로 권면하고, 기도하고,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수평적인 친교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친교를 넘어서 이 세상을 떠나간 신앙의 선배들과의 친교도 포함한다.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고백은 살아 있는 성도들 사이의 친교만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친교는 “세대 간의 교제와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통해 인간의 삶을 더 인간답고 풍요롭게 해준다.”

감리회 신앙고백이 예배와 친교를 함께 묶어서 고백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예배와 친교는 분리되는 측면보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깊이 연관되는 측면이 많이 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친교를 맺을 수 있고, 죽은 자와 산 자의 추평적인 친교를 맺을 수 있고, 산 자와 산자의 수평적인 친교를 맺을 수 있다. 또한 수평적인 친교를 통하여 나누어지는 삶과 신앙은 예배에 반영되어 사적인 예배가 아니라 공적인 예배를 형성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배는 친교이고, 친교는 예배이다. 예배와 친교를 구체적으로 아우르는 의식은 성만찬이다. 우리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감사한다. 웨슬리는 지속적인 성만찬(Constant Communion)을 힘주어 강조하였으며 실제적으로 그는 한 주에 2~3번의 성찬에 참여하였다. 웨슬리는 새로 안수 받는 이들에게 “주일마다 주님의 성만찬을 거행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성만찬이 잘 거행되지 않는다. 감리교는 웨슬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가능한 한 자주 성만찬을 거행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시화시켜 나가야 한다.

 

2. 교육과 봉사(1)

     우리는... 교육과 봉사...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은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야 하고, 웨슬리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성화의 과정을 계속적으로 밟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다. 진정한 교육은 삶 속에서의 실천으로 연결되고 봉사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봉사를 통하여 참다운 교육을 실천하고, 교육을 통하여 각각의 시대가 요구하는 적합한 봉사를 깨달아야 한다. (계속)

 

* 홍현설은 교리적 선언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지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는 모든 구원받은 자,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지닌 모든 자, 그와 더불어 연합한 모든 자들(지금 이 땅위에서 살고 있거나 이미 죽음을 통해서 영광으로 변화된 자들)을 포함한다. 이 까닭에 초대교회가 그 신앙고백 중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즉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구속 받은 자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한 생명 안에서 하나의 교제(Fellowship)로 연결되었다는 뜻이다.(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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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주가 지은 ‘당신이 나를 웃게 합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길가에서 35년간 노숙인으로 지낸 노인이 있다. 긴 세월 늘 같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레이문두는 마치 도로의 붙박이 풍경처럼 보였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생각에 잠기는 순간을 제외하면 레이문두는 언제나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길을 지나다니던 살라는 어느 날, 매일같이 무언가를 적고 있는 남루한 노숙인에게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그저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맞추고 인사해 준 살라에게 노인은 조용히 시 한 편을 읊어 주었다. 레이문두가 35년간 적어온 것은 다름 아닌 시였다. 살라는 이 놀라운 노년의 시인을 꼭 안아주었다. 

그 후 살라는 레이문두의 꿈인 시집 출간을 돕기 위해 웹페이지를 만들고 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사연이 알려지면서 시에는 발이 돋았다. 레이문두는 소식이 끊겼던 형제와 조우했고 마침내 그가 쓴 시를 묶어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단 한 사람이 기울여 준 오직 한 번의 관심, 한 번의 대화가 레이문두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상채기를 남기기도 하고 자기 가슴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세월 강을 따라가면서 상처 받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나도 상처를 주는 사람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이 보충되지 않으면 나는 마침내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살이는 서로의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자국에는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것과 희망을 앗아가는 부정적인 자국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보여주는 작은 관심은 용기와 힘이 됩니다.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윤활유가 됩니다. 성탄은 보잘 것 없는 곳에 태어난 보잘 것 없는 아기 예수에 대한 들판에서 찾아온 가난한 목자와 먼 이곳에서 찾아온 이방인 박사들의 관심을 통하여 빛났습니다. 아기 예수를 빙자한 자기 쾌락의 정점으로 달리는 성탄 기간에 진정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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