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3일

by 좋은만남 posted Feb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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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제4주일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우리에게 나타나신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절기가 되시기를 빕니다.

2.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얻은 깨달음을 미리 메모하셔서 생활 이야기와 함께 나눠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민족의 큰 명절인 설을 맞아 가족이 함께 모여 즐겁고 다정한 시간을 보내시기 바라며 오가는 길에 안전하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설 가정예배 순서지를 만들었으니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 활용하십시오.

4. 2월 셋째 주일(17일) 오후 2시 30분, 신도중앙교회에서 은평동지방회가 열립니다. 지방회원은 목회자 네 분과 한효균 부장님, 임정희 집사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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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어느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보를 보내는 편지봉투에 주소를 쓰는데 이상하게 어리어리하고 흐릿하게 보이면서 약간의 어지럼증도 느꼈습니다. 

'왜 이러지?' 했는데 역시나 저에게도 노안이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창 때 시력이 2.0일 정도로 아주 좋아서 눈이 어둡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는데 컴퓨터 모니터 영향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간의 흐름 앞에는 장사가 없고 장담할 것이 없음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처가에 갔다가 우연히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장인어른이 본인이 쓰시던 돋보기라며 하나를 꺼내주셨는데 그걸 쓰니 완전히! 신세계입니다. 그러나 돋보기를 쓰니 눈은 밝아졌지만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왜 이리 세월이 야속한지, 평생 청년으로만 살 것 같던 자신감도 고개를 숙입니다.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이치인 것을, 그리고 이제 저도 한두 가지씩 타인 혹은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 잘났다!' 하면서 나 혼자, 내 능력으로 살아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50년을 살면서 제대로 몰랐던 것을 돋보기를 쓰는 순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만난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을 넉넉히 이겨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또 부모님과 친지, 이웃과 친구들의 덕분이었습니다. 제 생의 팔 할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돋보기를 쓰게 되어 나이 먹어가는 현실을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받은 도움과 앞으로 받을 도움을 생각하며 저도 타인에게 아주 작은 것이나마 베푸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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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부활 프로젝트”

 

어린 시절 삼촌들이 철필로 트레이싱 페이퍼에 글을 쓰고 그것으로 등사를 하여 주보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은 컴퓨터가 훨씬 더 멋지고 빠르게 그 일을 대신 해줍니다. 고마운 컴퓨터, 그러나 이게 한 번 먹통이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요. 지난 주일에 설교를 하시는 이관택 목사님이 설교 원고를 출력하려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하필 그날은 다른 컴퓨터들도 다 안 되더군요. 결국 예배도 늦게 시작하였고 아마 이 목사님 등골에 땀이 주르륵 흘렀을 겁니다. 재정 정리도 수기로 하였고요. 그리고 주중에 수리는 결국 나의 몫...

메인보드와 파워서플라이 두 개 중 하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테스트를 해보고 메인보드라 판단을 했습니다. 부품에 호환되는 새제품이 없어 결국 인터넷으로 중고메인보드를 구매하여 조립하였는데 잘 되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에 켜보니 다시... 먹통... 판매자에게 연락을 하니 창고가 파주 운정인데 그쪽으로 오면 테스트 해준다고 하여 급하게 달려갔더니 50대 부부가 친절하게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꼼꼼하게 다 보시더니 케이스가 낡아 전원 버튼에 문제가 있고 파워서플라이도 오래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파워서플라이도 새걸로 교체하고 전원버튼도 밖으로 빼주었습니다. 결국 세월의 문제였습니다. 새걸로 다시 태어나진 않았고 영생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컴퓨터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주가 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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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의 안식을 기도합니다

 

일제 강점기, 열 네살의 나이에 당국에 의해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로 끌려가 한 많은 삶을 사신 김복동 할머니가 1월 28일 오후 10시 41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김 할머니는 작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씨가 연기한 배역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26년 동안이나 유엔과 미국을 다니시며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고 작년 1월에 대장암을 발견하고 큰 수술을 하였지만 병마에 굴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신 여성인권운동가였습니다. 암이 온몸에 전이되는 상황에서도 포항지진, 우간다 전시성폭력피해자, 재일조선학교 등에 수시로 재산을 내놓으셨고 임종의 순간에도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일을 끝까지 해달라는 당부를 남기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으로 진행되었고 발인은 2월 1일에 하였습니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23명이 남았습니다. 연합뉴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한 분도 같은 날 돌아가셨다고 밝혔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힘의 논리로 약자를 착취하는 제국주의 탐욕의 역사에서 억울한 피해를 입고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던 김복동 할머니가 하나님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가해자들이 이 짐승같은 폭력을 반성하며 생존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노력하도록 우리가 기억하고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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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에 관심을 가졌으면... | 방정빈 청년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번 여행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아픔’ 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기 전부터 마냥 여행이라고 하기에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갈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주 4.3 투어라는 설명을 듣고 검색을 해 보았더니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순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제주도라는 지역이 관광 명소로 많이 유명하고 인기 있는 휴양지이지만 정작 제주도를 방문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4.3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은 10명 중 2~3명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 또래 친구들은 아예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4.3 사건과 그 외 더욱더 많은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이번 기행을 통하여 더욱 깨달은 것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제주도 올 때마다 한 번씩은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제 바램입니다. 저부터 다음에 제주도에 다시 들르더라도 제 코스에 4.3 관련 답사지를 방문하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며  | 방현섭 목사

 

저는 솔직히 비행기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행기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다른 탈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물론 내가 타지 않는다고 해서 비행기가 안 뜨는 것도 아닙니다만 비행기를 타거나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아무튼 불편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볼일이 있다고 비행기 타고 철마다 때마다 다니나' 하는 것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철저한 환경주의자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고 비웃지도 말아주세요. ^^)

그렇지만 꼭 한 군데는 우리 교우들과 함께 비행기 타고 가고 싶었습니다. 바로 제주도입니다. 제주도가 무슨 대단한 관광지라서가 아니라 아픈 사연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4.3사건 이야기입니다. 지난 2002년인가에 교우들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도 한번 4.3과 관련된 지역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4.3이 여전히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탐방지도 없었습니다. 제주도가 한가하게 관광이나 하고 다니기에는 그 감춰진 아픔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2002년 제주여행은 유채꽃 노란색의 느낌으로만 기억에 남았고 제주의 아픔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제주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된 것은 신학대학교에 들어갔던 스물일곱 살 때인 1995년입니다. 선배들을 통해 역사를 배우면서 4.3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4.3사건의 전말을 담고 있던 그 책은 당시 불온서적이었고 전경들에게 걸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4.3을 거론하는 사람은 불온한 사람, 불순분자에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운동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4.3사건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그 말을 하는 순간 불온세력이 될 각오를 해야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때 당시의 느낌, 그저 우리 민족의 수많은 부끄럽고 아픈 역사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4.3은 단순하게 한 생각보다 훨씬 깊고 큰 상처였습니다.

재작년인가 대북 인도주의 활동을 하는 단체들의 협의회에서 제주도에 워크숍을 가는데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정에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둘러보는 일정이 하루 잡혀있었습니다. 그때 섯알오름, 알뜨르비행장, 백조일손지묘 등을 둘러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듣는 4.3 이야기였습니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으로 느끼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나와 내 가까운 이웃, 친척과 친구들이 당한 일처럼  가슴이 뜨겁고 서러웠습니다. 그리고 꼭 우리 교우들과 이곳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4.3사건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고 폭도로 몰렸던 이들의 명예회복도 조금씩 이루어지는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과 함께 제주도를 다시 찾아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제 마음의 짐도 조금 덜어냈습니다. 

작은 교회의 교인 열댓 명이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찾아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거 보고 온다고 해서 제주도의 피해가족들에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앞으로 계속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이 정말 큰 힘입니다. 우리가 바로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망각하면 피의 역사는 반드시 반복됩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치유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이번에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신 이유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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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에큐메니즘 I (3)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1. WCC의 시작과 출범(3)

 

WCC 총회의 주제와 장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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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CC에 대한 오해와 진실(1)

 

WCC 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는 WCC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냈다. 부산총회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환영하였고,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강하게 반대하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은 WCC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한다. WCC가 추구하는 방향과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본다. 첫째로 WCC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WCC에 대한 많은 비판 중에서 처음부터 줄곧 제기되는 왜곡된 비판은 하나의 교회(super church)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WCC는 하나의 기관으로 성격화하면서 통일된 하나의 교회를 결코 지양하지 않는다.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온 교회의 전체적 과제와 관계되어 있는 기관이다. WCC는 교파를 초월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교파와 다양한 교회의 연합을 추구한다. WCC는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지만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통합되어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감리교와 장로교 각각의 정체성을 전제하는 일치이다. 그러므로 WCC의 일치운동은 ‘조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WCC는 용공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1차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에 월 스트리트 저널은 WCC는 마르크스주의 냄새가 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한국의 많은 보수적인 교파에서도 용공주의라고 비판한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WCC 중앙위원회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UN이 세계 질서를 바로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에서 경찰노릇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WCC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WCC는 교파의 연합체로서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선택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WCC는 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성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근거로 하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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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들을 잃고 절망해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한 마틴 아브데이치라는 구두수선공이 순례여행을 하던 성자를 만나서 상담을 합니다. 그때 성자는 그가 실의에 빠진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면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사서 읽어보라고 권유합니다.

그의 조언을 듣고 이 구두수선공은 성경을 사서 읽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어느날 주님이 자기에게 찾아오신다는 음성을 듣게 되고 그분을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불쌍한 처지에 있던 늙은 군인 스테파니치를 집으로 초청해서 차를 대접하고 추운날씨에 간난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을 초대해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자신의 낡은 망토를 주고 전당포에 맡긴 숄을 찾으라고 그녀에게 20꼬페이크 주화를 줍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사과장수 여인의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은 할머니를 설득해서 그를 용서하게 만듭니다.

이 일이 있은후 그가 성경을 읽으려고 할때 그에게 “나요”하면서 스테파니치가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요”하며 아이를 안은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나라니까요”하며 사과장수 노파와 사내아이가 걸어나왔다 사라져 버립니다. 마틴은 기뻐하며 펼쳐진 곳의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펼쳐진 곳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틴은 비로서 자신의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세주가 실제로 자신에게 오셨고 자신이 구세주를 영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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