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일

by 좋은만남 posted Mar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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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마지막주일 및 여성주일로 지킵니다. 오랜 역사 동안 억눌리고 차별 받은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여성인권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이번 수요일은 성회수요일로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준비하는 이 절기를 경건하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오후의 묵상과 생활나눔 기도회에 많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일(17일) 오후에는 예배당 대청소를 하겠습니다.

4. 봄학기 수요성서대학을 13일에 개강하겠습니다. 지난 학기에 이어 어려운 구절 이해로 공부할 예정인데 다른 의견 있으신 분들은 제안을 부탁드립니다.

5. 3월 넷째 주일(24일)에 공동설교를 하겠습니다. 공동설교 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자원해 주십시오.

 

[3월 생일] 마정애 권사님(6일), 김경수 집사님(17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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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고 반갑습니다. 

  

감리교회가 똥통에 빠졌다고 표현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미자격자가 감독회장에 당선되는 일이 벌어져 감리교회가 뒤집어진 사건으로 아직도 제대로 수습이 안 되었습니다. 이 일이 벌어졌을 때 목회자 3,300여명이 서명을 하고 감리교회를 수습하고 개혁하기 위해 '전국감리교목회자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첫 모임으로 종교교회에서 모여 대규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모임은 흐지부지 해산되었고 결국 개혁도 물 건너가게 된 것이지요. 

그날 드렸던 예배는 기독교 전통에 따라 회개의 의미를 담은 다채로운 순서들로 채워졌습니다만 망둥이처럼 겁 없고 어린 저는 그 예배가 그저 보여주기식 버라이어티 쑈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에 실었습니다. 제 느낌에 솔직하게 쓴 글이고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여 나름 제가 좀 유명(?)해지게 된 글이지만 그 예배를 준비하신 분들이 참 좋은 선배 목회자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미 안면이 있는 분들께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화를 내거나 섭섭해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제가 잘 아는 분이 아니었는데 청소년 멘토링 일과 한국기독교연구소 일로 가깝게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음악적 재능이 있으셔서 작곡한 곡이 찬송가에 여러 곡 실릴 정도로 유능하신 분이셨기에 당시 그 예배 기획에 많이 관여하셨던 것입니다. 행사 마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때 일을 말씀드리면서 '열심히 하시는데 찬 물을 끼얹어 죄송하다, 어려서 그런 것이니 용서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던 일이었다 하시며 당시를 회상하셨고 여러 가지 뒷이야기들을 웃으며 해주셨습니다.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반성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러나 좋은 분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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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입학을 축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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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은 졸업입학 축하주일로 지켰습니다. 올해 우리교회에는 네 명이 졸업과 진학,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규현 어린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구산초등학교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방정빈 청년(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학생이라고 해야 할지...)과 박이하연 청년(이하동문)이 각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동대학교 호텔조리학과와 상명대학교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또 채보란 청년이 성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에 입학을 합니다. 부디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쉽게도 교회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아버지들이 대신하여 축하 선물을 받았습니다.

 

“중고 드럼을 장만하였습니다”

 

찬양의 활성화와 고품격화(?)를 위해 중고 드럼을 구해왔습니다. 방정혁 학생의 제안으로 추진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예배시간에 드럼을 치고 동생들에게도 드럼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중고 드럼이라 가격은 비싸지 않지만 제가 헌물하였습니다. 물건을 알아봐주신 다윗교회 임성호 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찬양시간도 좀 만들어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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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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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여덟 달 만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정상회담이 열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세계 언론이 최악의 지도자로 평가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두 정상이 가장 골칫덩이인 동북아의 비핵화와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협상이 결렬된 채 다시 만날 기약 없이 일단 헤어졌습니다. 양측이 전혀 상반된 이야기로 자신들의 입장을 말하지만 그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고, 많은 전문가들이 회담의 내용과 향후를 전망하지만 여전히 추측만 난무할 뿐, 다시 한반도는 오리무중에 빠진 것이 아닌가 당혹스럽고 안타깝습니다.

70년 분단이 한두 번의 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분단의 시간 만큼 긴 조욜과 협상, 상호 이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이 한반도에 몸붙여 사는 8천만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쥐락펴락 하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이고 절망스러울 뿐입니다. 민족의 문제를 스스로 풀아나가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화해와 협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것을 보면서 많이 안타깝고 아쉬웠습니다. 사람들은 원인 분석을 하면서 북한과 미국을 각각 비난하기 바쁩니다만 미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를 작습니다. 화해와 회복을 원하는 8천만의 간절한 염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평화의 능력을 주십시오.

 

 

이슬람 하면 생각나는 것은?

 

1

 

“이슬람 하면 생각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아이는 관심이 없습니다. 입시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마니아(mania)가 아니라면 IS(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의 폭력과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거부입니다.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관심에 과다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성전(聖戰)’으로 번역되는 이슬람의 ‘지하드(Jihad)’는 일반적인 이슬람 공포의 하나입니다. 사실 IS나 알-카에다(Al-Qaeda)와 같은 무장조직들이 이슬람 경전 『꾸란』의 원래 뜻을 왜곡하고 이슬람 대중을 그릇된 길로 이끌면서 생긴 것입니다. ‘지하드’의 언어적 의미는 ‘분투하다’로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이 선을 행하고 부정과 불법, 압제, 악을 제거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을 뜻합니다.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부정적 정보들 말고 다른 걸음을 시도하면 어떨까요? 조금만 찾으면 우리 역사 속에 스며있는 이슬람을 볼 수도 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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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신라 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습니다. 이 괘릉을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 ‘무인석(武人石)’입니다. 얼굴에 서역인(西域人)의 특징이 담겨 있어 신라가 아랍과 교류한 흔적으로 생각합니다.

846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hibah)는 지리서 『도로와 왕국총람』에서 신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맨 끝에는 산과 왕국들이 많은데 그곳에 신라라 불리는 섬이 있다.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그곳에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그곳에 정착하고 만다.” [EBS 역사채널ⓔ, 『역사e 3: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북하우스, 2014), 261.]

 

고려의 기록에서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중국 원(元)나라 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Qubilai)를 섬겨 서기가 되었고, 삼가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고려에 귀화했습니다. 왕은 그에게 장순룡이란 이름 주었고 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현재 덕수 장씨(德水 張氏)의 시조로 알려진 그는 중앙아시아의 위구르-터키계 출신의 이슬람인으로 추정합니다.

“세종대왕께서 정초 경복궁의 경회루 앞뜰에서 좌·우로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지그시 눈을 감고 한 이슬람 원로가 낭송하는 꾸란 소리에 빠져 계시더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에 정착한 이슬람 지도자들은 궁중 조회에 참석하여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이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는데 이를 ‘회회송축’이라 했습니다. [이희수·이원삼 외, 『이슬람』 (청아출판사, 2010), 419-439. 참조.]

 

경주에 가서 무인상을 보고, 덕수 장씨 친구와 함께 경복궁 경회루 앞 호수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색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낯선 외모라 놀리지 말고요.

 

3

 

낯섦이 두려움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기 너머에서 오는 이가 적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적이라 생각했을 때는 그가 적이어서가 아니라 적인 이유를 만들기도 합니다. 적인 이유를 찾고 만들고 그 이유를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적이 되어 버립니다. 

적으로 규정한 것이 스스로라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스스로 그 규정을 번복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가 생산해낸 적이라는 규정이라면 어렵습니다. 이제 그가 적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을 넘어 그 적이라는 공동체의 규정에 공감하지 않을 때 공동체로부터 버려질 두려움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낯섦을 만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가 낯선 사람인 것처럼 우리도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낯선 자라는 점을 이해해야 낯선 자와 만남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이들에게 용감히 맞서야 합니다.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낯선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공동체는 언제든지 낯선 자로 드러나는 이를 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나요?”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를 금하고 있습니다. 『꾸란』이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신자들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면 음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친구라 생각하고 외식을 생각한다면 함께할 음식이 많지 않습니다. 

『꾸란』에는 돼지고기 외에도 금지된 음식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허용된 음식도 있습니다. 이것을 ‘허용된’이라는 뜻의 ‘할랄(halal)’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 음식의 큰 원칙에 대해 『꾸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먹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경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으니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꾸란』 2:172-173)

 

“먹을 수 없지. 그들의 신념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이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할랄 규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면 안 될까?”

 

돼지고기에 대한 질문은 수업 마지막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 『꾸란』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이것이 이슬람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고 바꾸어야 하는 낯섦에 대한 관용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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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처녀가 꿈에 한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그에게 소원을 물었다.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내게 한 단어로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에게는 원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돈도 벌고 싶었고, 남자와 사귀고도 싶었고, 또 결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천사는 분명 자신의 소원을 한 단어로 말해 달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빠르게 자기가 바라는 바를 천사에게 일러주었다. “돈, 남자, 결혼.” 천사는 그 즉시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여자는 소원을 이루었다. 머리가 ‘돈’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인터넷에 ‘돈이 전부가 아닌데....’라는 글이 떠돌고 있습니다. 

첫째,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을 살 수는 없다. 

둘째, 돈으로 책을 살 수는 있으나, 지혜를 살 수는 없다. 

셋째, 돈으로 집을 살 수는 있으나, 가정을 살 수는 없다. 

넷째, 돈으로 유흥을 즐길 수는 있으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다섯째, 돈으로 약을 살 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 수는 없다. 

여섯째, 돈으로 시계를 살 수는 있으나, 시간을 살 수는 없다. 

일곱째, 돈으로 쾌락을 살 수는 있으나, 사랑을 살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물질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어도 그 가운데 평안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평안이 없으면 가진 것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며 감사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안은 찾아옵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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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에큐메니즘 II (4)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3. 평화의 공동체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믿습니다.

 

감리교의 복음적 에큐메니즘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다. 평화는 쉽게 왜곡되어 거짓된 평화로 변질될 수 있는 개념이다. 식민지적 질서에서 식민지적 통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 식민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평화의 상태라고 선언할 수 있다. 독재국가에서 독재자에 대한 저항이나 반정부 시위가 없이 독재적 질서가 잘 유지될 때 독재자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위장된 평화이고 거짓된 평화이다.

출애굽기로 본다면, 출애굽 사건 이전에 히브리인들이 바로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하여 노에로 살아가던 시대가 바로와 애굽인들에게는 평화로운 시대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고난과 고통의 시대였다. 히브리인들에게 참다운 평화의 시대는 애굽의 시대가 아니라 출애굽 이후의 시대다. 예수님이 살아가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평화의 시대였을지 모르지만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에게는 결코 평화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어느 입장에서 평화를 규정하느냐에 따라 평화는 참다운 평화가 될 수도 있고, 위장된 평화가 될 수도 있다.

참다운 평화의 상태는 지배자나 상위계층이 아니라 피지배자와 하위계층의 입장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평화는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입장이나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평화가 아니었다. 당시 소외당하고, 고난당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화를 추구하셨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지배자들의 편으로 기울어진 정의는 피지배자들을 억압으로 몰고 갈 수 있으므로 위장된 평화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동반해야 한다. 위장된 평화는 지배자들만을 만족시키는 평화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남미 해방신학이 주장하였던 당파성은 실천적으로 정당성을 지닌다. 남미 해방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보편적인 분이시지만 이 땅과 역사에 당신의 정의를 심기 위하여 당파적이다.

감리교가 고백하고 있는 평화는 사회 계층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참다운 평화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복음적 에큐메니즘이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는 인간들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 피조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우주적 평화이어야 한다.? 

 

4. 평등한 공동체(1)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고백한다. 이 말씀은 사람은 인종이나, 계급이나, 성별로 인하여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고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도 백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셩상을 지니고 있고,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