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1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리고 기다리는 절기로 육체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경건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주일(17일) 오후에는 봄맞이 예배당 대청소를 하겠습니다.
3. 이번주 수요일(13일)부터 봄학기 수요성서대학을 시작합습니다. 어려운 구절 이해로 공부할 예정입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4. 3월 넷째 주일(24일)에 공동설교를 하겠습니다. 공동설교 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자원해 주십시오.
5. 환우들과 해외여행 중인 교우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지난주일 오후에 생활 나눔을 하면서 언급했던 신학대학교 후배의 아내가 이틀 후인 화요일 새벽에, 사랑이 깊고 감성적인 남편과 어린 아들을 남기고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조만간 올 소식이었음을 알았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후배가 겪고 있을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음을 알기에 그저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조문을 갔는데 꼭 10년을 살고 헤어진 사별인데다 고인이 너무 젊었기에 장례식장 분위기는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후배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조문객마다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메인 목으로 '네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며 꼭 안아주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헌화를 하고 식당 한쪽에 앉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배가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데 허기를 느끼는 제가 미웠습니다만 밥을 두 공기나 먹었습니다. 잠시 후 신학교 동문들이 하나둘 들어옵니다. 바로 엊그제 만났던 이들도 있고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이별로 무거웠던 마음들이 반가운 인사와 근황을 묻는 이야기를 건네고 받느라고 밝아졌습니다. 이렇게 떠나간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슬프지만 또 반갑게 인사하게 한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느꼈습니다.
후배의 사별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인간은 왜 항상 타인의 아픔과 불행을 보면서 그 상처에 동화되기보다는 자신이 피하게 된 불운과 누리는 행운에 감사하게 되는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지요. 부디 송수경 님이 안식하시기 바라며 후배와 어린 아들도 새 힘을 내기 바랍니다.
“수요성서대학을 개강합니다”
어느덧 즐거운 방학이 끝나고 다시 성서대학 개강 시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인원이 더 줄어들게 생겼습니다. 정지수 집사님의 근무시간이 바뀌어서 수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에 휴무를 하게 되셔서 성서대학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날이 부흥해야 할 성서대학이... 아쉽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지난 학기에 이어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하고자 하였으나 임미화 집사님이 함께 책을 읽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자는 의견을 주셔서 여론을 모으고 있습니다. 외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이나 거리 문제로 쉽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원래 계획대로 시작하고 준비가 되는대로 우리끼리 책을 읽고 공부하는 방식으로 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빠지는 사람이 생겨 아쉽지만 남은 사람들끼리 열심히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예배시간의 드럼 반주, 어떠셨습니까?”
지난 주일부터 예배 찬양 반주에 드럼연주가 가세하였습니다. 방정혁 학생이 나름대로 연습도 열심히 하고 연주한 것인데, 예배당 사이즈에 비해 과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떠셨나 모르겠습니다. 첫 연주라 실수가 많았다고 본인이 시인하던데, 음알못(!)인 저는 나름 괜찮았습니다. ^^ 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찬양시간도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고 장자연 배우의 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지난 7일은 탤런트 고 장자연씨가 성접대 강요와 성폭력에 시달리다가 성남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0년째 되는 기일이었습니다. 당시 장씨는 성접대 대상으로 거론된 이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유서로 남겼지만 경찰은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를 성접대와는 무관한 폭행 등의 혐의만 적용하여 집행유예 처벌을 하였을 뿐입니다. 소위 ‘장자연 리스트’에 거명된 이들은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 재계의 유력 인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경찰이 축소 은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커졌고 최근 국민청원에 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 요청이 올라와 25만여 명이 동의 서명하였습니다. 10주기를 맞은 날, 장씨의 동료 배우 윤지오 씨가 용기를 내 방송에 출연하여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장씨 사건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문재인 정부 들어 출범한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와 대검찰청 과거진상조사단의 조사대상에 선정돼 현재 조사를 벌이고 있고 이르면 다음 주에 조사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역배우로 출연하던 자매가 방송계 관계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끊는 사건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의 꿈을 짓밟고 권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가하는 이들의 악행이 반드시 처벌 받기를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연예인이 되려는 장자연 씨의 꿈이 권력을 악용해 더러운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10년이 지났습니다만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정의로 반드시 심판해 주시고 이런 억울한 젊은 영혼들을 그 품에 쉬게 하십시오.
23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24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서 말하였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27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마태복음 8:23~27(새번역)
우리네 삶은 마치 고요한 검은빛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는 작은 조각배의 여정과 같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하며 조심스레 항해하는 이 작은 조각배는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고,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어쩔 때는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쌩하고 앞으로 내달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잠깐, 이내 작은 파도에도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큰 폭풍우라도 만나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조각배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높다란 검은 파도를 도저히 감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은 이다지도 무력합니다. 개개인의 삶뿐만이 아닙니다. 거대한 국가공동체로 확대해서 보아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한 풍요의 시대를 맞이했다며 호들갑 떨고 있지만, 실제 한국사회의 속내는 어떻습니까? 세계자살률 최고와 출산률 최저를 오가는 수치가 이야기 해주듯,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젊은이들에게서 조차 미래를 향한 꿈과 설레임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회 아닙니까. 그야말로 침몰 직전의 하수선한 불안감을 느끼며 오늘 하루도 겨우겨우 항해하고 있는 한없이 약하고, 불완전한 조각배 위의 신세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거센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신 기적이야기입니다. 이는 위태롭고 불안한 삶의 여정을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센 폭풍우가 출렁이던 갈릴리 밤 바다에서 공포에 질려있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계셨던 예수님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거센 풍랑이라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배 어딘가에 숨어서 잠을 주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폭풍우는 몰아치고, 모두가 곧 죽게 생겼는데도, 예수께서는 분명 이 배 어딘가에서 잠을 주무시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반드시 깨워야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당면한 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가서 깨우고, 모두와 함께 아주 잔잔해진 평화의 바다를 맞이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호’가 침몰한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주무시고 있는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문 속의 제자들처럼 진정으로 절실하게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깨우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찾고 깨우는 길이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구약의 요나서에는 배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 사람을 바다에 바쳐 희생시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또 다른 폭풍우를 만나면 또 다른 사람이 희생을 당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이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는 불의한 세상에서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깨우지 않는 한 이 같은 일은 계속 반복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우지 않는 한
고난 받는 이들의 피눈물이 멈출 줄 모르는 이 땅에서.
당신은 지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깨우실 것인가요?
천국에 가면 이상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사람들은 그 나무의 이름을 “슬픔의 나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그 나뭇가지에 걸어 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당하는 불행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으면 천사는 그를 데리고 슬픔의 나무 앞으로 간다. 천사는 그 사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을 벗어서 그 나뭇가지에 걸어 놓으라고 한다.
그리고 난 뒤에 천사는 그에게 일러준다. “이 나무 주변을 빙 둘러보고서 다른 사람이 벗어 놓은 것을 대신 하나 가지고 가도록 하세요.” 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걸어 놓은 슬픔들을 자세히 살펴본다. 자기 것 대신에 다른 것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그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기가 벗어 놓았던 원래의 슬픔이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나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줄 아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들만의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내게 맡겨진 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갔다 오면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거리의 노숙자를 보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시험도 나 혼자만 당한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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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에큐메니즘 II (5)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4. 평등한 공동체(2)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감리교가 추구하는 복음적 에큐메니즘은 성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를 추구한다. 한국사회도 이제는 이주 노동자들의 증가로 단일민족/문화의 사회가 아니라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이 거부하는 힘든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그들의 가정은 소외당하고, 차별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문화와 민족의 다양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감리교는 한국 사회를 평등한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만들어감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 감리교의 사회신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감리교도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매/형제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웨슬리의 후예들이 되어야 한다.
제16장
종말 I (1)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의 마지막 조항인 8조는 종말과 관련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생명은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세상의 삶과 저 세상의 삶의 분기점은 우리들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신약성셩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이땅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상은 심판과 부활을 동반한다. 종말을 다루고 있는 8조의 조항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영생을 언급하고 있고, 후반부는 의의 최후 승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다. 16장에서는 전반부를 다루고 17장에서는 후반부를 다루려고 한다.(계속)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마태복음 11장 19절]
자기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흠집내려고 안달을 하며 별명을 지어 붙였습니다. 그것이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이 별명은 성서 번역본에 따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개역개정)',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표준새번역)',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 사람(공동번역)'으로 나타납니다. 악의적인 별명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잘 먹고 마시면서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시는 분, 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잔치자리를 펼치셨던 분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을 보니까 딱 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고, 비주류(요즘 말로 아싸!)들과 주로 어울리는데다가 저는 머리까지 장발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교우들도 딱 예수님의 별명하고 어울리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먹고 마시고 사람 안 가리고 노는 일은 예수님과 딱 닮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제가 '한 일', 사는 모습, 가치관, 실천, 신념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집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만 예수님 닮을 것이 아니라 삶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