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5주일 및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이 처한 절망적 상황에 대해 관심 갖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다음주일로 예정되었던 청소년 주일은 연기하겠습니다.
2. 다음주일은 흩어지는 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추천 드렸던 가재울녹색교회, 한백교회, 함께여는교회, 새맘교회, 중앙루터교회 혹은 개인적으로 방문하기 원하시는 교회를 정하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오후에는 5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합니다.
4. 오후 기도회 후에 임수현 전도사님과 박차보라 어린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심방을 하겠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함께 해주세요.
5.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예수 성경 동성애]의 8장과 부록I을 토론합니다. 29일에는 야외수업으로 진행하며 부록II로 공부하겠습니다.
6. 토요일(25일)에는 교회학교 행사로 서울랜드에 갑니다. 어린이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고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창조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
지난 수요일, 예배당 옥상에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였습니다. 작년부터 우리 예배당 옥상에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마침 감리교 햇빛발전소 협동조합이 조직돼 문의를 하였더니 3Kw 정도 되는 시설을 설치하는데 300만원 정도 든다고 하였습니다. 생태환경 보존 신앙운동이라 생각하고 추진해 보려고 했는데 조합에서는 연락도 없고 예배당 리모델링 공사에 비용이 많이 들어 포기했었습니다.
올 해 들어 큰 것은 안 되겠고 작은 가정용이라도 하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조합의 신석현 목사님이 갑자기 연락을 하셔서 주소를 물으시더니 며칠 후 다시 연락을 하여 '수요일에 설치하러 갈겁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솔직히 '뭐지?' 하는 느낌이었는데 수요일 오전에 신 목사님과 설치 기사 두 분이 진짜 오셨고 36만원에 교회용과 가정용으로 두 기를 설치하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시고 가셨습니다. 이제야 뭔가 창조세계를 지키는 실천적 교회운동의 퍼즐이 맞춰진 느낌입니다.
요즘 보수 언론은 선진국이 친환경 발전에서 후퇴하고 있다는 기사를 쏟아내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의 비용이 훨씬 적다는 그래프도 곁들였습니다. 그러나 선진국 관련 뉴스는 가짜로 밝혀졌고 비용 추산에도 원전의 해체나 폐기물 처리 비용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원전으로 돈을 버는 기업과 언론, 반 문재인 극우 세력의 유착이 의심됩니다.
아무튼 생태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거나 적게 주는 태양광 발전 시설이 우리 교회에 설치돼, 뭔가 뿌듯하고 진짜 실천하는 교회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작은 실천의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합니다.
“고남곤 권사님 개업하신 수도꼭지 전문점에 심방하였습니다”
지난 11일, 고남곤 권사님이 새로 시작하신 사업장에 방문하여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고남곤 권사님은 올해 초 직장 동료였던 분과 함께 수도꼭지 전문점을 시작하시고 일산 후곡마을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셨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 뵈어 죄송하였습니다. 부디 사업이 어려움 겪지 않고 번창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귀한 일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고 주위에 수도꼭지 필요하신 분들에게는 많이많이 알려 주세요.
“즐겁고 뜻깊은 농촌생태활동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에서 봄철 농촌생태활동을 하였습니다. 잘 갈아 비닐 씌워놓으신 밭에 고추와 옥수수 모, 고구 마 순을 심었고 몇 년 동안 쌓여있던 장작용 나무 더미를 잘라 정리하고 한 쪽으로 옮겨놓고 거름터를 닦아놓았습니다. 김미영 사모님은 나물 비빔밥을 해주셔서 맛있게 잘 먹고 돌아왔습니다. 많은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땀 흘리며 노동의 의미를 깨닫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최근 세 명의 집배원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12일과 13일, 이틀 새 우체국 집배원 세 명이 과로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중 두 명은 자택에서 수면 중 심정지를 일으켰고 다른 한 명은 백혈병 투병 중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올해 서른네 살인 공주우체국의 무기계약직 상시집배원 이은장씨는 곧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람이 없다는 구실로 다른 구역의 배달까지 담당하는 등 평소에도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렸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관리자들의 부당한 지시도 참아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호소하였답니다. 작년에는 역대 최대인 25명의 집배원이 사망했는데 올해는 5월 현재 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집배원들은 퇴근시간을 미리 찍어 놓고 일을 할 뿐 시간 외 수당도 없고 노동강도도 높은 무료노동이 일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편사업이 적자라고 하지만 금융사업, 보험사업 등 전체 경영수지는 5년간 2조2천억 원 넘게 흑자를 기록했고,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에는 올해 7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토요근무 폐지 약속도 파기했다고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이은장 집배원을 비롯하여 죽어라고 일만하다가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의 영혼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더 적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더 힘들게 일을 시키는 기업풍토와 노동환경이 개선되고 주 52시간 노동제가 실질적을 자리 잡아 삶과 노동의 질이 향상되는 날을 고대합니다.
(16) '우리' 밥상 단상
1
박정희 정권, 1972년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가진 대통령의 종신(終身) 집권을 목표한 대통령제 유신헌법이 통과됩니다. 1975년 5월 14일 『조선일보』 제호 옆 1면에 ‘국가안전·공공질서 수호 긴급조치 9호 선포’가 실립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 반대를 위한 집회·시위 금지와 이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 등 초헌법적 내용입니다. 그리고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십여 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됩니다. 그들의 성명서
‘우리의 교육지표’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교육지표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인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제정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日帝하下의 교육敎育칙어勅語’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애족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긴급조치 9호는 ‘국민교육헌장’이 교육 실패의 본보기이며, 이를 행정부가 독단으로 추진하는 것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본제국 하 교육칙어를 연상하게 한다는 문제 제기에서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보고 있습니다.
1968년 발표된 ‘국민교육헌장’. 이후 헌장은 교과서의 1면을 차지하고서 집단주의의 가치를 학생에게 이식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헌장의 ‘우리’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강요된 암기와 체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누군가를 ‘우리’로 묶어 사명을 강제하는가? ‘우리의 교육지표’는 헌장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적 물음이었습니다.
2
“드디어 우리 부서 회식입니다.”
정말 드디어가 맞습니다. 요즘 함께가 부쩍 어렵습니다. 그런데 딱 맞았습니다.
“자, 우리 뭐 먹을까요?”
부장은 한껏 들떴습니다. 법인카드와 가오는 같이 갑니다.
“빕스요.” 생각지 않게 발 빠른 제안입니다.
“저도요.” “좋지요.” 그리고 기다린 듯한 동의와 재청입니다.
“오케이, 그럼 우리 닭한마리 먹으러 갑시다.”
“오늘 주번 누구지?”
종례 시간, 교탁에 선 담임은 우선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리곤
“이게 교실이냐, 쓰레기통이냐.”
물음표가 맞을 텐데, 마침표가 적절합니다.
“의자 올리고, 우리 청소하자.”
어제, 그리고 그 어제처럼 아이들의 엉덩이는 들리고 의자는 한걸음 뒤로 미끌립니다.
“드드득.”
“그게 조용히 안 되니. 회장, 끝나면 교무실로 검사 맡으러 와.”
‘우리’의 용법입니다. 그리고 의심스럽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라는 단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라는 단어는 아무나 쓸 수 없기도 합니다. 쓸 수 있는 이들은 ‘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권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말하며 ‘우리’ 안과 밖을 선택하여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3
우리는 많은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 아빠, 우리 아들 등등. 그리고 여기에 우리나라까지 이르면 ‘우리’의 익숙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와 나라의 합성어지만 띄어 쓰지는 않습니다. 익숙함만큼 묻지 않는 일상적 ‘우리’ 하지만 ‘우리’의 사용은 ‘우리’에 대해 묻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일까?”
“선생님은 ‘우리’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넌 뭐라고 생각하니?”
“공동체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우리 의식이 있어야 사회가 안정되잖아요.”
4학년 때 이후로 쭉 착한 학생입니다. 그래 괜히 삐쭉합니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필요한데. 그럼 ‘우리’는 있니? 있으면 가지고 와 봐.”
“‘우리’요? 그걸 어떻게 가져와요?”
“못 가져오는구나. 그럼 ‘우리’는 없는 걸로 하자.”
‘우리’라는 단어의 실제 사용에서 만나는 문제는 ‘나’들의 상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나’들이 있을 분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많은 ‘나’들을 칭하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강제하는 어떤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사용해 왔고 그 ‘우리’의 실제인 ‘나’들을 그 ‘나’들 속의 ‘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나’들 없는 ‘우리’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실제가 없는 이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4
다시 ‘우리의 교육 지표’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교육’입니다. 교육은 ‘나’들에게 무엇인가를 위한 ‘우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은 ‘나’에게 ‘나’를 보고, 서게 돕는 것이며 이런 ‘나’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연대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들을 지칭할 때만 ‘우리’라는 단어가 교육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밥 먹을까?” 김밥과 과일 도시락입니다.
“선생님, 저 딸기 하나 먹어도 되나요?” 아이들은 이럴 때 “갑자기?”라고 합니다.
딸기를 먹던 아이가 망고 아이스크림을 내밉니다. 한 입 가져가는데.
“우리 내일 또 먹어요.” 합니다.
책 이름에 관하여
'금강金剛'은 다이아몬드다. 쇠붙이 가운데 가장 단단한 놈이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prajna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뜻은 '지혜智慧'다.
'바라밀波羅密' 역시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의 한자음으로 '저편 언덕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이다.
'경經'은 대개 경徑으로 새긴다. 길이란 말이다.
이 단어들을 붙여서 읽으면 '저편 언덕에 이르게 하는 금강석 같은 지혜를 담은 책'쯤 되겠다.
참고로, 이문회李文會라는 이가 책 이름을 풀었는데 다음과 같다.
“금강은 굳고 날카로운 물건이라 능히 만물을 깨뜨릴 수 있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중국말로 지혜다. 지혜가 있으면 일체 번뇌를 깨뜨려 가지고 그것을 아주 잘 써먹을 수 있다. 바라밀은 역시 산스크리트어인데 중국말로 도피안到彼岸(저편 언덕에 이름)이다. 아무 상相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안彼岸(저편 언덕)이라 하고 이런저런 상相에 집착해 있는 것을 차안此岸(이편 언덕)이라 한다. 또는 말하기를, 마음이 미혹되어 있으면 이편 언덕이요 마음이 깨어 있으면 저편 언덕이라 했다. 경經은 경徑이니, 견성見性의 도로道路다.”
그럼 이제부터 본문을 읽는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如是我聞이로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이 넉 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설說도 많고 말도 많은가 보더라만 문외한은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좇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읽는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부터 하는 말이 모두 앞사람한테서 들은 것이지 자기 머리로 짓거나 꾸며 낸 게 아니라는 얘기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공자님의 가르침이나 모두가 전에 없던 무슨 신통한 묘수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그렇게 나 있는 기를 일러 주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法(Dharma)을 만드신 분이 아니라 깨달으신 분이다. 법은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도 그렇게 있었다. 종교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뜨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미 그러셨거늘 감히 누가 여시아설如是我說이라, “이렇게 나는 말한다”고 나서겠는가? 오직 여시아문如是我聞일 따름이다.
제7장 미국장로교회를 위한 건의들
성경해석의 가장 좋은 방법은 고대 근동의 역사적 문화적 편견인 남성 우월주의 대신에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은 어떤 특정 구절을 그 상황에서 빼내어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교회법을 만드는데 이용합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불평등에 대해 제도적, 집단적, 개인적으로 사과하고 교회법들을 수정하는 실천을 통해 교회를 치유해야 합니다.
대부분 교단들은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표준을 위해 신조, 고백, 상징, 공식, 정의, 신앙선언 등의 문서를 갖는데 동성애자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것들을 수정해야 합니다. 장로교회는 니케아신조, 사도신경과 16세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20세기의 바르멘 신학선언 등 11개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들은 바뀔 수 있으며 성경처럼 편견과 제한을 반영하는 언어학적, 문화적 맥락들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1962년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87번은, 1961년에 번역된 새영어성경을 인용하면서 '동성애적 도착'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전의 번역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동성애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편견을 담은 이 문구와 인용은 많은 교단이 수정 및 복원하였습니다.
동성애자의 직분 안수를 금지하기 위한 장로교의 1997년의 규례서 조항 G-6.0106b는 근소한 차이로 승인되었으나 교인들의 오해와 문구의 애매모호함, 현대와 맞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였고 결국 몇 과정을 거쳐 삭제되었습니다. 신앙고백과 규례는 이전보다 더 큰 포용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라는 렌즈로 성경을 해석할 때,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제한은 신앙의 근본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