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9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9주일로 가을철 야외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에서 그 솜씨를 마음껏 찬양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공동식사 후 오후 프로그램을 진행하겠습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성서대학으로 모입니다.
4. 박근조 임수현 전도사님 차남 박차올라 어린이가 지난 18일에 시각교정수술을 받고 회복중입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5. 11월 첫째 주일(3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겠습니다. 한해의 결실로 감사하는 절기가 되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예배 후 공동식사를 마친 후 강화도로 농촌생태활동을 하러 가겠습니다.
6. 올해 월동준비(김장)은 11월 둘째 주일(10일)에 하겠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모저모
야외예배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야외예배를 위하여 저와 임정희 집사님이 인천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무의도의 도로가 좁아 좀 막힐지도 모르겠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해수욕장에 있는 팬션을 하나 빌릴 예정입니다. 팬션에서 주일예배도 드리고 점심식사도 하고 또 편안하게 쉬실 수 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다함께 해상관광탐방로를 둘러보겠습니다. 600미터 길이의 교량인데 해안의 멋진 경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트래킹과 갯벌체험을 하겠습니다. 호령곡산에 잘 만들어 놓은 트래킹 길을 따라 산책을 하시거나 조개잡이 갯벌체험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트래킹은 환상의 길을 들어서서 가다가 경관숲길로 접어들어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코스로 총 1.6Km입니다. 코스가 어렵지 않아 넉넉히 한 시간이면 편안하게 산책을 하실 수 있습니다. 갯벌체험은 해수욕장 오른쪽 체험장에서 하는 유료 프로그램입니다. 주로 조개를 잡는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마치면 편안하게 자유시간을 보내시면서 쉬시면 되겠습니다.
저녁식사는 한 시간가량 이동하여 김포 고촌의 소고기와 돼지고기 구이집에서 할 계획입니다. 영종도에도 맛집이라고 알려진 곳들이 많긴 한데 한 쌈밥집에 들러서 점심을 먹어보니 반찬 무한리필도 해주고 공간도 넓긴 한데 가격에 비해 큰 메리트가 없는 것 같아서 임정희 집사님의 추천으로 이 식당을 정하였습니다. 이번 가을 야외예배가 모두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많이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 돌아오는 길에 파주 운정의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만두가게를 들러서 지난번에 못한 축복기도를 해드리고 왔습니다.
목회서신
앞집의 이웃이 고독사하였습니다.
지난 11일이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서 주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창밖으로 보니 경찰이 와서 어디론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리가 '문을 따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전 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보니 앞집 통일빌라에 사는 어떤 이웃이 고독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차가 와서 시신을 수습해 실어갔는데 골목에는 시신이 부패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경찰과 병원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여호와증인 신자인데 연락이 안 돼서 와보니 고독사했다, 열흘 정도 지난 것 같다, 열흘이면 시신에서 수분이 다 빠져 말랐을꺼다'라고 합니다. 병원에서 온 사람들은 '지난번에 죽은 사람보다 더 뚱뚱하다'는 말도 하면서 웃기도 합니다.
우선 교회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이 고독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부끄러워 밖에 제대로 나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환경에 사는 이웃을 알지도 못하였고 죽어가는데도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어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자주 이사를 오가니 이웃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이 도시생활'이라며 셀프 무죄선고를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었고, 그것도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는데 그 죽음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들의 무덤덤한 태도도 안타까웠습니다. 죽음도 그저 업무이고 일 처리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 사회의 비정함과 무심함 앞에,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지 묻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자행되는 혐오와 비방을 규탄합니다.
1994년생 가수이자 배우인 설리(본명 최진리)가, 스물 다섯의 꽃다운 나이, 연예인으로서 한창 끼와 청춘의 아름다움을 발산할 나이에 극단적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성에 따라 옷을 입었고 소신에 따라 사회적 발언도 하였습니다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지독한 비난과 악플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우울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예인이나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도 인터넷 상에서 자행되는 혐오와 증오, 비난과 욕설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인터넷에서 아시아 아프리카계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가 조직적 인종차별 수준이며 성소수자와 장애인 비하도 많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비대면 공간이고 익명적 관계이다 보니 상대방에 상처를 줄 수 있는 험한 말들을 쉽게 하게 됩니다만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자 연인,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최진리양과,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던 모든 이웃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위로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인터넷에서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웃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사라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7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법을 설한 바 있는가? 수보리가 아뢰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살피건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붙일 정법定法은 없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이라고 이름 붙일 정법 또한 없습니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須菩提가 言하기를, 如我解佛所說義건대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요 亦無有定法名如來可說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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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던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미 지니고 있던 것을 지니게 되는 것이 ‘얻음’이다. 부처가 부처로 되는 것이 ‘성불成佛’이다.
새삼 무엇을 얻고 알고 또 무엇으로 되었단 말인가?
“사람들의 근기根機가 예리하고 둔한 바 있어서 정진精進을 하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는지라 그 감당할 만한 능력에 따라서 설법을 한다. 이런 까닭에 법에는 정해진 모양(定相)이 없는 것이다. 다만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다를 뿐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얻은 바 없는 것 같고 깨닫고 나면 얻은 바 있는 것 같지만 얻음과 못 얻음이 모두 헛된 생각(妄見)이다. 다만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중도中道에 머무는 것이라. 어찌 정해진 법이 따로 있고 또 그것을 말로 할 수 있겠는가?”[法華經]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잡을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고, 법이 아닌 것이요 법 아닌 것도 아닌 것이려니와, 그 까닭은 모든 성현이 다 무위법으로 차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요 不可說이요 非法이요 非非法이려니와 所以者가 何오, 一切聖賢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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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에게 중학생이 알아들을 만한 것을 중학생이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가르친다. 대학생에게는 대학생이 알아들을 만한 것을 대학생이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가르친다. 그러니 가르침의 내용과 수단이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성현이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차별을 두어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무위법無爲法이다.
법이 따로 있다고 하면 없다고 대답해야 하고 없다고 하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았다’고 생각될 때 이미 “이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과연 무엇을 깨달은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것 아닌 것’이 있어서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과연 법을 설했느냐는 세존의 질문에 수보리는 직답直答을 피하고, 세존께서 설하신 법은 법이라고 할 수 없는 법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니 세존이 법을 설했다는 말이냐 설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묻지 말아라, 대답할 말이 없다. 내가 그대에게 허공을 안겨주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주지 않았는가? 주었다고 말하면 받은 바 없다고 할 것이요 주지 않았다고 말하면 받았다고 하리라.
나도 그것이요
너도 그것이요
그것도 그것이다.
모두가 천상천하에 유독존唯獨尊인 ‘아我’의 출현이다. 내가 나에게 나를 주었으니 누가 무엇을 받았다는 말인가? 또 누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제 우리는 두 손 놓고 주저앉아 가만히 있을 것인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일’이니 그럴 수가 없다.
베푸는 자도 그것을 받는 자도, 둘 다 공空이다. 그래도 ‘베풂’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보시(無住相布施). 그것이 바로 우주요 정토淨土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기원전 406년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에서 스파르타군을 크게 무찌른다. 아테네 시민들은 영웅들의 혁혁한 전과에 열광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 여덟 명은 기세를 몰아 어려움에 빠진 자기 편을 돕기 위해 전함을 휘몰아 나갔다.
스파르타와 싸우다 침몰한 배의 생존자 구조는 다른 두 사람에게 맡겼다. 그 때 예상치 못한 폭풍이 몰아쳤고 생존자 구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테네는 분노로 들끓었다. 장군 여덟 명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겁에 질린 두 명은 도망치고 나머지 여섯 명만 귀국을 감행했다.
민회는 소크라테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섯 명에게 투표로 유죄 결정을 내렸고 형이 집행됐다. 스스로 영웅들을 죽인 아테네인들은 곧 후회했다.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한 이들을 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2년 뒤 아테네는 패망한다.
사회가 광기에 휩싸이면 영웅을 죽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사실인지를 판단할 기준을 정치인의 입을 통해 찾으려고 들면 어리석은 군중이 되고 맙니다. 정치인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나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주민 센터에 가서 더 많은 혜택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저녁에 모여 앉아 과도한 복지라고 주절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여론이 꼭 정의는 아닙니다.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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