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by 좋은만남 posted Nov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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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감사'의 달]

2019년도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결실을 맺었는지 결산을 해야 합니다. 돌아 보면 기쁘고 즐겁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더 많았던 한 해인 것 같지만 또 한편 모든 순간마다 우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어려운 중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고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및 왕국절 제11주일입니다. 힘든 삶 속에서도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시고 또 결실하게 하신 것에 마음껏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공동식사 후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농촌과 농업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갖기 위해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월동준비(김장)를 하겠습니다. 또 셋째 주일(17일) 오후에는 성서대학 후 남기평 목사님 이사 심방을 하겠습니다.

4. 우리교회도 연대하기로 한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이재용과 함께하는 연합기도회'가 7일(목) 저녁 7시 30분 강남역 8번출구 고공농성장 인근에서 열립니다. 노동권 쟁취를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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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농촌생태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

 

이번 주일 오후에는 농촌생태활동을 합니다. 그동안은 10월 중에 했는데 올해는 야외예배 행사로 인하여 일정이 좀 늦춰졌습니다. 외부 활동이 많으면 아무래도 피로감이 있어서 일단 미뤘다가 이걸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강화 이필완 목사님도 '어려우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지속적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추수감사주일에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올해는 김장도 한 주 늦춰졌습니다. 생각해보면 농촌생태활동이 추수감사주일에 딱! 적합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종종 드리는 말씀이지만 한국이 자동차 강국, 반도체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자동차를 씹어 먹고 반도체를 삼킬 수는 없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농촌에서 생산한 농축산물을 먹어야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자동차나 반도체가 없다면 우리 삶이 매우 무료하고 불편해지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농촌이 죽고 농산물이 고가에 거래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농업이 붕괴된다면 자동차 한 대  팔아 쌀 한 가마를 사게 되는 일이 헛된 망상이라고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식량이 무기가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얼마 전 정부가 WTO 농업부문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나마 노령인구들만 남아 지키는 농촌이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농촌과 농업인에 대한 감사함을 너무 모르고 살았습니다. 농업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신앙은 감사와 사랑 그리고 정의를 발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에 대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사랑,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대한 확신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할 것이며 농촌생태활동이 그런 목적에 부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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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 중인 김용희 이재용 노동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번 목요일(7일) 저녁 7시 30분, 사회의 변혁을 바라는 기독교인들이 강남역 8번 출구 앞에 모여 기도회를 합니다. 기도회는 강남역 인근 통신탑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두 노동자와 연대하고 그들의 안전과 노동자의 승리를 위함입니다. 김용희 노동자는 서초동 삼성 본관 뒤에서 농성하다 유언장을 써놓고 6월 10일에 철탑 위로 올라갔으니 벌써 다섯 달이 다 돼갑니다. 그는 철탑 위에서 환갑을 맞았다고 합니다. 철탑 위에는 이재용 노동자도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삼성의 황제 이재용과 동명이인입니다. 두 노동자는 법이 인정하고 보장하는 노동조합 결성 및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삼성으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당하여 가족과 떨어져 철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삼성은 그들에게 납치, 테러, 성폭행 조작, 간첩혐의 등을 가하였습니다. 이재용 노동자는 무려 열한 번 대공분실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세계일류기업' 삼성은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노동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노동자 없이는 삼성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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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세계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탄압하며 부당해고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맨몸으로 철탑에 올라 투쟁하는 김용희 이재용 노동자와,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의 정의에 대한 열망을 기억해 주십시오. 두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고 의의 최후승리를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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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한 영화<조커>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조커>는 히어로 장르물로는 이례적으로 개봉 전 이미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 받았지만 평단조차 이토록 폭발적인 흥행세를 이어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런(악당)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 영화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암울하고 염세적이라는 점, 인물의 심리묘사와 폭력묘사가 극사실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기존의 히어로물이 보여주었던 방향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트하우스 영화(예술영화)에 가까운 작품이 2019년 개봉한 그 어떤 영화 보다 뜨거운 대중적 관심을 자아내는 요인은 무엇일까. 

 한국과 미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화 외적인 논란까지 더해져 ‘수작’을 넘어 감히 ’문제작’으로까지 평가 받고 있는 ‘조커 현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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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조커>는 개봉 전 부터 미국에서 이미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상영을 금지해야 한다는 움직임부터 심지어 개봉 날 극장 주변에 경찰병력을 배치하는 소동까지 겪은 그 배경에는 7년 전의 한 비극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2012년 7월 20일 자정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오로라 센츄리 16극장’의 9번 상영실에서는 영화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기 위해 421명의 관객이 모여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연막탄이 터지고 무차별 총기난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참사로 인해 결국 12명의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7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영화<조커> 개봉을 두고 오갔던 논란은 오로라 극장의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참사 이후에도 총기관련 규제에 무기력한 사회적 시스템, 폭력에 관한 사회적 합의 등의 내용이 그 중심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이 같은 논란이 영화 <조커>에 와서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다. 사실 <조커>와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연결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빌런은 톰하디가 연기한 ‘베인’이었다.)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등장 시키며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전시하는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중에는 직접적으로 배트맨을 주인공으로 하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 등과 같은 영화도 포함된다. 또한 총기 소지가 허용되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은 지난 7년 동안에도 총기와 관련한 대형참사를  끊임없이 마주하며 논란에 논란을 겪었지만 여전히 변화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조커’에 이르러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영화<조커>는 한 마디로 강렬한 영화이다. 이미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는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캐릭터와 비쥬얼의 강렬함을 선보인 바 있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조커는 그 자신이 주인공인 만큼 분량 면에서나 캐릭터의 성격묘사의 디테일 차원에서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보여 준다. 특히 ‘아서 플랙’이라는 장애를 지닌 채 가난하게 살아가는 극중 주인공이 희대의 악인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은 코믹스 특유의 과장된 묘사가 아니라, 진지한 드라마의 서사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악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내면의 갈등과 그를 둘러싼 불의하고, 모순된 시대상은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이 지점 때문에 자칫 지루하고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전개를 토드 필립스 감독은 감각적인 촬영과 미술 그리고 음악과 놀라운 연기까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동원하여 <조커>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연출하는 것으로 메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머릿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아서플랙의 웃음소리, 페이소스 가득한 표정,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연약한 육체,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로 분한 아서가 계단 위에서 멋들어지게 보여주는 춤사위의 잔상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가열되고 있는 조커에 관한 논란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이 강렬하고, 디테일한 연출이 조커를 미화하고 있고, 악인의 폭력을 정당화 한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면 이는 장애를 가진, 또 사회의 온갖 불의에 희생당한 한 개인이 악인으로 변모하여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고, 나아가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는 과정 속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정작 영화<조커>의 놀라운 점은 오히려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기 위해 감독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히어로 영화들에서 빌런을 그저 ‘악한’으로만 그리는 평면적인 연출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블영화의 ‘타노스’가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과거 배트맨 영화의 빌런들 조커, 펭귄, 투페이스, 미스터 프리즈, 포이즌 아이비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빌런은 나름의 이유가 있고,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빌런의 상황에도 감정이입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연출하는 방식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하지만 영화<조커>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은 주인공 아서 플랙에게 관객이 감정이입 할 수 있는 몇 가지 길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서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오프닝에서 아서를 공격하는 10대들, 지하철에서 아서를 괴롭히는 3인, 아서를 곤경에 빠트린 직장동료, 아서에게 가해진 아동학대를 방조한 어머니, 아서를 이용하려는 쇼의 진행자 머레이)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평범한 인물들이다. 아서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치로서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상대를 등장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을텐데 감독은 의외의 선택을 하고 있다. 영화의 유일한 단점으로 지적되는 갈등요소가 적다는 평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또 영화는 아서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현실에서의 일인지 아서의 망상 속에서 일어난 일인지 종잡을 수 없게 뒤섞어서 보여주고 있고, 이를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의도적인 혼란을 주고 있다. 아서와 옆 집 여성과의 연인관계가 ‘망상’이었던 것처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목욕을 시켜주는 아서와 어머니의 친밀한 모습이 과연 진짜 현실인지 망상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아서의 불명확한 시점을 따라 온전히 감정이입하기에 분명 한계가 있다.

아마도 감독은 관객이 아서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오히려 막음으로써 조커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보여주기 보다는, 세상의 시점으로 바라본 '조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조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내용보다는, 세상이 조커의 이미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더욱 집중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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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조커>는 한 개인이 변화하는 성장담(?)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을 모순된 세상이 어떻게 상징화하고, 소비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나아가 ’조커’가 탄생되어가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오히려 조커 자체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영화 속 세상의 모습은 최근 ‘조커현상’이라 불리는 현실의 우리 모습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어쩌면 조커에게 반응했고, (조커가 선동하지 않았지만) 선동되었고, 손가락질 했고, 추앙했던 영화 속 사람들이 정작 아서 플랙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통념과 상황, 욕구에 따라 조커를 상징 이미지로 소비 했듯이 어쩌면 작금의 사회적 논란은 영화의 내용과 상관 없이 영화자체를 그저 상징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영화<조커>를 강렬한 영화라고 했다. 이는 조커가 가진 ’악’의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했고, 또 영화에서 그 이미지를 강렬하게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성서에서 종종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카인을 보면 ‘악’은 그 내용보다 ‘이미지’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했던 카인. 결국 질투심에 불타 동생을 살해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그것이 창조설화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악의 기원’이자 ’악의 상징’이 된다. 과연 카인은 어떤 이유로 동생 아벨을 살해했는가? 이는 여전히 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질문이지만 그 답에 접근하는 길은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다. 카인의 개인사정과, 디테일한 내용을 굳이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또 알고 싶어해서도 안되는 것이 소위 2000년 넘은 교회의 통념이 아닌가. 기존에 통념으로 지켜온 ’악의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훼손의 사건이 된다.(성서 속 인물들을 재해석했던 문학, 영화, 공연 등에 대한 논란을 상기해 볼 수 있다.)  

영화<조커>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조커’의 이미지를 훼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악은 영화에서 처럼 조커의 뒷배경으로 보여지는 일상적 풍경으로 드러나거나 텔레비젼의 내레이션 소리로 희미하게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사족이지만 글을 마무리하며 문득 카인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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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經에서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저 사람보다 크니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여,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누다라샴막삼보리법이 죄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여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니 何以故오, 須菩提여.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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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은 문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문자로 담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은 보이는 손가락이지만 보이지 않는 달을 가리키고 있다. 경이 가리키고 있는 그 ‘달’에서 삼라만상이 나왔다 해와 달도 거기서 나왔고 사람도 짐승도 물고기도 나무도 모두 거기서 나왔다. 부처도, 부처가 깨달은 법도 모두가 거기서 나왔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라는 게, 그게 다 무엇인가? 경에 담겨 있는 그것, 순수 의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연自然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공空 또는 무無라 부르기도 하고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도무지 어떤 이름으로도 가서 닿을 수 없는 그것(또는 그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경經은 대지大地와 같으니 어떤 물건이 땅의 소생所生 아니겠으며 모든 부처님들의 오직 한 마음(一心)을 가리키고 계시니 어떤 법이 그 마음의 세운 바(所立)가 아니겠는가?”(忠國師)

‘경經’을,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문자’들과 동일시하면 잘못이다. 경은 문자로 되어 있지만 문자가 아니다. 사람이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세포가 아니듯이.

경의 한 구절을 남에게 읽어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이다. 만물은 생어유生於有하고 유有는 생어무生於無라, 모든 것이 유에서 나왔고 유는 무에서 나왔다.([老子] 41장) 그러니 만물은 유有의 자식이고 무無는 유의 어미다. 자식이 아무리 커도 어미만큼 크지는 못한 법. 따라서 온 세상 칠보로 보시를 해도 그 공덕은 경 한 구절 읽어 주는 보시의 공덕에 견불 바가 못 되는 것이다.

 

삼천계 가득 찬 보물로

복전福田을 일구어도

다만 누업漏業을 이룰 뿐이라.

끝내 인천人天을 떠나지 못하네.

경을 몸에 지녀 사구四句를 잡으면

성인聖人들과 더불어 좋은 인연 이루느니.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고자 하거든

반드시 반야선般若船을 타시게나. (博大士) 

 

여기서 어리석은 아무개, 또 한마디 사족을 단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물질로 보시하는 일의 무용無用을 말하고, 따라서 지금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허튼짓’을 하지 말라고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글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향선배악向善背惡을 하지 않고서 선악을 함께 버리는 길로 곧장 가는, 그런 중생은 없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조차 못하면서 어찌 경經을 지녀 그것을 남에게 설할 것인가? 다만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잊지 말고, 보이고 잡히는 것에 머물러 안주하지 말라는 그런 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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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심령이 뜨거워져서 “사탄과 맞서 싸우겠다!”라고 결단을 하고 성경책을 들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사탄이 역사하는 곳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술집, 도박장, 사창가를 아무리 돌며, “사탄아! 나와라!”하고 소리쳐도 그곳에는 사탄이 없었다. 하루 종일 허탕만 치고 지친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 지붕 위에 새까맣게 들러붙은 마귀들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마귀들이 잔뜩 교회 지붕 위에 붙어 지붕을 뜯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이 소리쳤다. “이 마귀들아~ 왜 술집, 도박장, 사창가에 있지 않고 여기 교회에 들러 붙어 있는 것이냐?” 

그러자 대장처럼 보이는 마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미 내 수중에 들어온 곳에 뭐 하러 간단 말이냐? 우리가 진짜 목표로 삼는 곳이 바로 여기 교회다! 여기만 무너지면 다 끝나는 것 아니겠느냐?”

 

복음주의적인 성도가 갖추어야 할 4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1.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구속 사역의 인정

3. 개인적인 회심과 용서에 대한 경험

4. 성경 말씀과 선교에 대한 순종과 동참

이러한 가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부정직과 탐욕, 성공지향주의와 맘모니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죽은 개 뼈다귀를 햩고 있는 한 복음주의는 계속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속에 적을 무찌르고 세상 속에서 예수 닮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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