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정의'의 달]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만 한국현대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합니다. 폭력으로 자유가 박탈되고 민주적 시민의 권리가 유린된 사회의 가정은 또다른 부조리였음을 깨닫습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해 함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6주일입니다. 우리 일상의 매순간이 부활의 체험과 감동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집회 방역수칙 준수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건강이 좋지 않거나 어린이들의 감염 우려로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교우들과 코로나로 해외 이주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한효균 부장님의 장녀 예원양이 이번 토요일(23일) 오후 4시 30분 더컨벤션 영등포점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축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3시 40분에 출발하겠습니다.
5. 5월 마지막 주일(31일)에는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청소년주일 등을 총망라하여 함께 축하하며 예배하겠습니다.
6. 이번 봄철 야외예배는 코로나19의 재확산 우려로 인하여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목회서신
목사님, 진실을 묻습니다.
두어 달 정도 됐을까, 저에게 무슨 대책위원회인가 하는 단체로부터 온라인 연락이 왔습니다. 성추문이 있는 감리교회 목사가 감독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는데, 제가 가입한 개혁적 감리교 목회자 모임인 '새물결'에서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것을 제가 온라인 언론에 올렸습니다. 그 단체는 성명서에 실명이 명시돼 있으니 법적 분쟁을 하겠다는, 다분히 협박으로 들릴 만한 글을 제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000으로 처리하였던가, 영문 머리글자인 J로 고쳤던가 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공중파TV 탐사 프로그램인 PD수첩에서 그 목사의 이름을 거론하고 얼굴을 공개하며 성추문을 고발하는 내용을 방영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남연회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 전준구입니다. PD수첩은 그가 미국과 대전, 서울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서른여덟 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추행, 강간시도를 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며 영적 지도자인 목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피해 여성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게 하고 성추행을 하는 그루밍을 하였으며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신천지, 스토커, 꽃뱀이라고 매도하고 꼬리를 쳤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방송에서 기자는 감리교 총회 재판 과정에서 재판위원들이 피해 여성들이 수치심을 느낄만한 질문을 하여 2차 가해를 하였다고도 하였습니다. 감독 선거 당시 감리교회의 개혁적인 조직들과 여성조직이 격렬하게 전 목사의 감독 당선을 성토하였고 감리교회 총회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죄, 기각 등의 최종 판결을 받았고 담임목사직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 목사가 감독 사퇴를 선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방송은 전 목사가 교인 600명인 교회를 3년 만에 1,200명으로 배가시킨 유능한 부흥사였다고 합니다. 교회와 장로들은 전 목사의 추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교회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덮고 넘어가자고 했으며 재판 중에는 선처를 요청하는 진정서까지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교회성장주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 목사는 어떻게든 살려내야 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한 피해여성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내가 그때 조금 더 똑똑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살아왔는데… 이걸 저지른 그들이 문제이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그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지…"
이 방송을 보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고 싶었습니다. 명망 있는 목사라는 작자의 이중성과 재판위원이라는 작자들의 자질이 부끄러웠고 중견교단이라는 감리교회가 이런 작자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맡기고 있다는 것,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경고했음에도 감독으로 뽑는 감리교회 성도라는 사람들에 다시 분노하였습니다. 이 방송으로 인해 더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야 할 여성 피해자들의 아픔도 느껴졌습니다. 교회가 성도착적 범죄자에 의해 부흥하고 성장한다고 한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이만희를 신처럼 모시는 신천지와 교회를 위한다며 성도착증 환자를 비호하는 감리교회가 뭐가 다릅니까?
방송에서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제가 가까이 지내며 존경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무지한 교권주의자들에 맞서 목소리를 높여 외치고 고발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아직도 힘세지만 거짓된 세력에 무릎 꿇지 않고 깨어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희망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갑질을 당장 멈추십시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인 최모씨가 지난 5월 10일,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습니다. 4월 21일 최씨가 주민의 요구로 평행주차된 차량을 밀어 옮기던 중 이를 본 차 주인인 심모씨가 폭언을 하며 경비원의 머리채를 잡고 코뼈를 부러뜨리는 폭력을 행사하여 상해를 입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입주민들이 평소 성실했던 경비원 최씨의 편을 들고 이 문제로 아파트 대책회의를 열자 심씨가 "그만두지 않으면 묻어버린다"고 문자를 보내 협박하자 이를 견디다 못한 최씨가 투신을 하였습니다. 이 안타까운 죽음은 입주민 중 한 명이 자초지종을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가해자인 심씨는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며 고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유족들은 심씨가 사과만 하면 용서하겠다고 하였으나 발인이인 14일까지 악플러 운운하며 경비실 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차별과 갑질은 심각한 범죄이자 반신앙적 죄악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와 윤리의식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제 갑질 없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모습과 재능에 따라 서로 협력하며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창조하셨습니다만 사소한 차이의 우월의식으로 갑질과 차별을 행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인하여 아파하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약한 이들의 이웃이 되어 이 비극을 막고 세상을 바꾸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34) 새로운 일상!
1
“요즘 학교는 어때?”
“그냥 그렇지 뭐.”
“학교는 나가?”
“수업은 해야 하니까.”
“참 학교도 답답하겠다.”
맞습니다. 답답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 않지만, 출근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일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출근을 하면 교사동 입구에 설치된 체온감지 검색대를 통과합니다. 발열체크입니다. 그게 뭐라고 검색대 노란 라인 안에 들어갈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 몇 번 일 없는 경고음을 듣고 나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노란 라인 안에 딱 맞추어 섭니다. 교무실에 들어가서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고 손을 30초 이상 비누로 닦습니다. 그도 모자라 보건실에서 나누어준 소독제로 파리모양 미안합니다. 수업 시간이 되면 교실로 들어서 또 창문을 열고 손을 소독하고 혼자 앉아 노트북에 점점한 아이들과 수업을 합니다. 식사 시간 식당 앞 자리한 체온감지 검색대, 노란 라인 앞에 주눅 들고,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 나무 젓가락, 식기를 들고 자율배식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칸막이로 막힌 식탁에 앉아 밥을 먹습니다. 퇴근을 하기 전 교사 체온 입력 파일을 열어 출근 시 체온과 식사 시 체온을 기록합니다.
자동차 키를 두고 갔는지 다시 들어와 책상을 뒤지던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2
플라톤(Πλάτων, BCE 427~347)이 다루는
’변화‘입니다. 플라톤은 ’현상‘과 ’실재‘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를 설명합니다. 드러나는 현상은 모두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하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것을 이것이라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보기에 현상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래 그의 생각은 실재입니다. 실재는 변화하는 현상들 너머의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중요합니다. 현상은 실재의 그림자입니다.
플라톤의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선배인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 BCE 535~475)는 만물은 움직이고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으며, 두 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가 맞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그 변화의 현장에 놓여 있습니다. 플라톤의 실재가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변화를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그리 속 시원한 답은 아닙니다.
3
1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창세기 12:1-2(새번역)
고향을 떠나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변화라는 불안에 직면합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 불안, 두려움은 필연입니다. 그가 선 장소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이나 저것‘에 대한 선택을 요청합니다. 그는 떠남을 선택하고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이제 ’아브람אַבְרָם, 고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אַבְרָהָם, 무리의 아버지‘함입니다. 그리고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고 선택할 것입니다.
4
영어 ’norm’의 라틴어 어원은 ‘norma’입니다. ‘목수의 사각형, 규칙, 패턴’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상’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규칙과 패턴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대말은 부정접두어 ‘ab’를 붙여 ‘abnormal’, ‘비일상’으로 번역합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비일상’이라 경험합니다. 돌아가야 할 곳을 ‘일상’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일상’의 ‘규칙’ 속에 변화가 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일상이 변화한다’는 규칙입니다. 그러니 이제 ‘비일상’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고 돌아가야 할 ‘일상’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사람들은 ‘new normal’, ‘새로운 일상’을 제안합니다. ‘일상’이 ‘변화의 규칙’을 포함한다면 같은 뜻 단어의 반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필연의 강조쯤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리고 나면 아마 ‘new normal’은 ‘newnormal’처럼 한 단어가 되어 익숙해질 것입니다.
물음을 엎으려 합니다.
“돌아갈 ‘일상’이 없습니다.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지요.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 능히 받아 지니고 외워서 널리 남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가 그 사람을 당 알고 그 사람을 다 보아 저마다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끝이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공덕을 능히 이루리니,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자기 몸에 짊어지는 것이다.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여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고 悉見是人하여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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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위없이 높은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자기 몸에 짊어졌다는 말은, 여래가 얻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여래가 그를 다 알아 다 본다는 말은, 여래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뜻으로 새긴다. 내가 나를 알 듯이 그렇게 아는 것이다. 몸이 몸을 아는 것이다. 머리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있는 것을 지니게 되었는데 무엇을 얻었다고 하겠는가? 깨달음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 가지는 게 아니라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마땅히,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곧 부처 마음이다. 마음 바깥에 따로 부처 없고 부처 바깥에 따로 마음 없다.”(馬祖)
◆
어찌된 까닭인가? 수보리여. 만약에 작은 법을 즐기는 자라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는 이 경을 능히 듣고 받고 읽고 외워 남에게 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何以故오, 須菩提여. 若樂小法者면 著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하여 則於此經을 不能廳受讀誦爲人解說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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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에 이르기를, 둔근鈍根(근성과 기량이 둔한 자)은 작은 법(小法)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뜻을 낮은 데 두어서 대승심大乘心을 내지 않는 자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견邪見에 떨어져 大乘最上乘法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윽고 이 경을 손에 넣어도 듣고 외지를 못하거늘 하물며 능히 남을 위해 설해 주겠는가? 아견我見과 인견人見 등에 집착함은 사견에 떨어짐이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대승을 구하는 자는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다.”(陳雄)
둔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작은 법을 좋아하고 가장 높고 큰 법을 깨닫고자 애쓰지 않으면 그가 바로 둔근이다.
“만약에 수행을 하고자 할진대는 마땅히 정법正法에 의할 일이다. 마음이 생각을 여의고 허공과 같아져서 성범聖凡에 떨어지지 않고 몸과 마음이 평등하도록,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곧 정법이다.”(正法眼藏)
한양에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농사일이 바쁘다보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밭에서 돌아온 부인은 기절초풍할 장면을 보았다. 시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다가 아기를 깔고 자면서 아기가 죽고 말았다. 부인은 그 아기를 안고 얼른 바깥으로 뛰어 나왔다. 혹시라도 시아버님께서 ‘자신이 아기를 깔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하실까’ 하고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부인은 엉엉 울면서 아기를 안고 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아기의 뺨따귀를 후려쳤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한테 깔려죽어서 할아버지의 심기를 괴롭히느냐 이놈! 너 같은 불효자식이 천하에 어디 있느냐 이놈!” 하며 뺨따귀를 세차게 내리쳤다.
그 순간 죽었던 아기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 후 이 동네 이름이 효자동이 된 것이다.
효도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요 인간의 도리요 신앙의 기본입니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남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천륜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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