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by 좋은만남 posted Jul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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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해방'의 달]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에서 놓여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사적으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만 사회 인권의 측면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억누르고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는 관습과 제도가 많습니다. 다양한 억압으로부터 놓여 하나님 자녀의 존엄을 누리며 살게 하십시오.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5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평화의 길을 걷는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고 있어 지역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에 교회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배 참여시 체온 측정과 손소독제 사용, 마스크 착용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방정빈 청년의 휴가가 이틀 연장되어 오늘 부대 복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4. 교우들과 가정의 행복과 평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주일(7월 12일 . 성령강림 후 제6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남기평 목사 / 기도 : 정지수 집사 

봉헌위원 : 임미화 집사 / 성찬보좌 : 한효균 부장 / 안내 : 함옥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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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익숙하기에 당연한 듯 생각하는 일상

 

지난 27일에 제 맏아들 빈이가 군 입대 후에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1월초에 입대한 후 거의 170여 일만에야 첫 상봉을 하였습니다. 보통은 넉 달이면 첫 휴가를 나온다는데 본인도 그렇겠지만 가족들에게도 꽤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근무지가 GOP(민간인통제구역 초소 근무)라 외출 외박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 다른 부대에 비해 휴가일수 더 많다지만 코로나19로 외박과 휴가 등이 잠시 중단되어 그저 그림의 떡이었습니다만 아무튼 건강하게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하고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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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명이 함께 생활하는 부대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복무기간도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고 병사 복지도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전방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식사나 간식도 잘 나온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병사들 간 관계에 크게 불편한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공을 살린 보직인 취사병 일을 잘 해서 병사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는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어 고맙다고 하니 그 마음도 건강해서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그러나 군대는 군대이겠지요. 게다가 제가 복무하던 시절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오디오 세대인 저와는 달리 지금은 비디오 세대, 인터넷 미디어 세대이고 풍요로운 시절에 자유분방하게 자란 세대이니 군대라는 담벼락, 민통선이라는 철망 안에 갇혀서 지내는 일상이 저의 세대보다 더욱 갑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게 분단국가에서 나고 자란 남자의 운명이니까요.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고 그 사이 벌써 1/3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휴가 나오면 무엇을 제일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오토바이가 제일 타고 싶었다고 하길래 하루 시간을 내서 빈이와 부모님 계시는 인제에 다녀왔습니다. 느즈막한 오전에 집을 나서 저녁 8시쯤 돼서 돌아왔습니다.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고 펄쩍 뛰시던 아버지도 막상 휴가 나온 손자 얼굴을 보니까 걱정보다는 반가움이 얼굴에 가득하십니다. 날이 더워져 닭장 위에 차양망을 씌우는 일을 해야 한다며 한숨만 쉬시길래 모처럼 아들과 달려들어 땀을 흘리며 뚝딱 해치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닭을 잡아 백숙을 끓여주셨습니다. 건강하게 성장하고 군생활도 잘 하고 있는 손자가 그저 대견하신지 부모님 얼굴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아마 저에게도 그런 표정과 미소를 지어주셨을 텐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익숙하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일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가족과 부모님 사랑하는 이들의 존재, 편안하고 반복적인 일상들, 땀 흘리며 하는 일, 가족들이 함께 둘러  앉은 밥상, 우리를 흐뭇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며 짓는 미소들… 그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건만 우리는 꼭 손실과 부재, 위기와 고난 앞에서야 비로소 그것들을 발견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가는 제 자신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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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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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청 소속 트라이애슬론(철인삼종경기) 최숙현 선수가 감독과 팀닥터, 선배 선수들에 의한 지속적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지난 6월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체중감량과 태도를 이유로 최 선수에게 구타와 가혹행위를 일삼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최 선수는 올해 초 팀을 옮기고 몇 년 전부터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내는 한편 경찰에 고소를 하면서 구제를 호소하였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였고 이런 정황은 사후 가족들에 의해 녹취록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2019년 3월 뉴질랜드 전지훈련 당시의 녹음파일에는 팀닥터가 욕설을 하며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하고 감독이 방조하는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한국체육대학교 핸드볼부 선배들이 후배들을 상습적으로 때리거나 라면을 얼굴에 붓고 흉기를 휘두르며 가혹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고 최숙현 선수의 안식을 빌며, 수십 년간 공론화되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과 가혹행위가 근절되기를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비인간적 폭행과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난 고 최숙현 선수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 품에 안아 주시고 꽃다운 청춘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십시오. 선수들이 폭력에 의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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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부터 낯선 침입자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낯선 침입자'라는 말이 맞는지도 의문입니다. 사실 인류보다도 먼저 존재했지만 없는 듯 대한 성가신 존재이기에 낯설지도 않고 침입자도 아닐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치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다룬 SF영화처럼 아무런 대비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그 공격 앞에 맞닥뜨린 지 벌써 여섯 달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아주 익숙한 그러나 불편한 이웃처럼 돼버린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동거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개인과 사회, 교회의 일상을 바꿔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고 인류는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정부는 국가 재정을 재난기본소득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나눠주면서 경제와 사회, 생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무너지는 국민경제는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실업자는 늘고 있으며 학교처럼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많은 기관들이 거의 멈추다시피 하였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 이후 매주일 아침이면 활짝 열렸던 교회의 문은 꽉 닫혔고 각자 집에서 네모난 화면을 보면서 예배를 대신하였습니다. 그저 이 기약 없고 총성 없는 전쟁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도 익숙했던 지난날의 일상 그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맞이하게 될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지도 오리무중이고, 특히 교회의 미래는 더욱 암담한 것이 현실이고요. 지금은 끊임없이 질문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미래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자문자답을 하는 사이 뭔가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이 지면을 통해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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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판자촌 동네 아이들 (1)

 

때는 바야흐로 20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내 나이가 벌써 마흔한 살! 사회에서는 중년이고, 목회자로서는 아직 한참 어린 나이에 인생을 논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할 때면 어쩔 때는 어린 것도 창피하게 느껴지고, 나이가 든 것도 창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영화에서나 봤을 그런 가난 속에 살았다. 뭐 지금도 나아진 것은 없다. 3대째 가난을 유산을 물려받고 살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가난에 대해 논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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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는 우리 집이 경기도 파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당시에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나와야 갈 수 있던 동네였다. 한글도 아직 못 깨우친 어린 시절 나는 파주의 한 농촌에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다. 기억이 생생하지는 않지만 고무신을 신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항상 나와 내 동생을 보시며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 했다. (아~! 나는 나와 똑 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이 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건축 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도망치듯 서울로 오게 되었고 오갈 때 없었던 우리 가족을 받아 준 것은 중림동 이모였다. 당시 부모님은 자리 잡을 때까지 몇 개월 머물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왔으나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중림동에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꽤 오래 빌붙어 살았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아는 동네,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 ‘중림동’ 그곳이 우리 가족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 동네이다. 이 동네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발전도 늦고, 정말 가난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였다. 지금은 높은 고층의 값비싼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꽤 역사가 있는 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산업화로 인해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오갈 때 없어 판자로 집을 짓고, 구두공장과 봉제공장을 하며 모여 있는 동네, IMF때 노숙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던 그런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87년~90년대 중반까지 정말 데모를 많이 했던 해였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앞을 지나는 무리는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여의도에서 기독교 집회를 하고 시청으로 행진하는 집단과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면서 행진하는 집단이다. 우리 동네는 이상하게도 최루탄의 매운 냄새가 항상 멈추지를 않았다. 신촌과 여의도에서 아현동을 지나 시청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중림동이다. 어려서 나는 이유도 모르고 대학생 형, 누나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신이 나서 같이 따라다녔던 기억이 있다. 뭣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그 현장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명 지랄탄이라는 최루탄과 백골단의 사과탄...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터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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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선배들이 저항하던 시절의 얘기를 들어서 잘 알게 되었지만 어린 나이 내가 살던 동네의 아이들과 나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다. 아이들의 놀이는 항상 시대를 반영한다. 당시 제일 재미있던 놀이가 대모 놀이였다. 우유팩의 양쪽 면을 안쪽으로 접은 다음 그 안에 연탄재를 넣고 잘게 부순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강하게 내려치면 연탄재의 흰 가루가 마치 최루탄을 뿜는 듯 날리다. (칠판 지우게 털 듯이) 두 팀으로 나눠 상대방에게 뿌려대며 도망친다. 그러다 서로 지치면 놀이는 끝이 난다. 이런 시대를 거름망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온 당시의 아이들은 지금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따라갔던 데모의 현장이나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서 신나게 연탄재를 날리던 놀이는 30년이 훌쩍 넘어서 돌아보니 웃고 넘길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의 변화에서 제일 크게 피해를 입고 살고 있다. 군부독재도 가고, 문민, 국민, 참여, 닭, 쥐 정부도 지나갔는데도 변한 것이 없다. 지금이나 30년 전이나 가난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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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여. 실로 법 없이 여래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수보리여, 만약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 부처님이 나에게 그대가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지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예언하시지 않았으리니 실로 법 없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그런 까닭에 연등 부처님이 나에게 예언하시며 이르시기를, 그대가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지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佛言하시기를 如是如是로다. 須菩提여. 實無有法하여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여. 若有法하여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면 然燈佛이 卽不與我授記하기를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여 號釋迦牟尼니 以實無有法하여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是故로 然燈佛이 與我授記하고 作是言하시기를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여 號釋迦牟尼라 하시니라.

 

 

내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면 법이 있어 깨달은 것이므로(깨달은 ‘나’가 따로 있으므로) 아직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으랴?

 

내가 깨달았다고 하되, 그 ‘나’가 누구냐가 문제다.

 

“석가釋迦의 뜻은 능인能人이고, 모니牟尼의 뜻은 적묵寂默이다. 능인이기에 심성무변心性無邊하여 모든 것을 끌어 안고, 적묵이기에 심체본적心體本寂하여 동정動靜이 어지럽지 않다. 석가께서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년 4월 8일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스스로 일곱 발짝을 걸어 오른손을 들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니 아홉 마리 용이 공중에서 청정수淸淨水를 토하여 태자太子의 몸을 씻었다.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했는데 돈길頓吉이란 뜻이다. 목왕穆王 53년, 임신년 2월 15일 구시라국 대성大城 보리수 나무 사이에서 숨을 거두니 세존이 세상에 머문 지 79년이었다.”(王日休)

 

만법萬法이 본디 공空이다. 만약에 어떤 법이 있어서 그 법을 가지고 무엇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는 아직 상相을 잡고 있는 것이요 그 마음이 무엇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어찌 그렇게 깨달으셨겠는가? 

 

문간에 서 있는 나무를 깊이 생각한다. 새들로 하여금 깃들게 하는데 

深念門前樹 能令鳥泊棲

오는 자 무심코 받아들이고 가는 자 다시 오길 바라지 않는다. 

來者無心喚 去者不幕歸

사람 마음이 저 나무 같기만 하다면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련만. 

若人心似樹 與道不相違一龍牙和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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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새로 이사온 후 과일가게에서 수박을 사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웃는 것이었다. 

계산을 할 때 직원도 웃고 나와서 길을 걷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었다. 

남자는 집에 돌아와서 수박을 건네며 아내에게 말했다. 

“이 동네는 마음씨 좋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아. 만나는 사람마다 웃더라구. 이사 정말 잘 왔어~~~.”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바지에 붙은 ‘씨 없는 수박’ 스티커나 떼세요.”

 

누군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캐스퍼 애디먼 (Caspar Addyman)은 웃음이 단순한 반사활동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도구라고 했습니다. 또한 웃음은 사람에게 건강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을 통해 체내에 산소가 많이 채워지면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돼 휴식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동시에 심장·폐·근육이 자극돼 맥박과 혈압이 안정됩니다. 장기적으로는 면역기능이 향상되고 우울증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미국 종합병원 메이요 클리닉 의료진은 ‘웃음의 효능은 최고의 약’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은 웃음으로 시작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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