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해방'의 달]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에서 놓여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사적으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만 사회 인권의 측면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억누르고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는 관습과 제도가 많습니다. 다양한 억압으로부터 놓여 하나님 자녀의 존엄을 누리며 살게 하십시오.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6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평화의 길을 걷는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고 있어 지역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에 교회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배 참여시 체온 측정과 손소독제 사용, 마스크 착용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정부가 종교시설에 대한 방역강화 조치를 시행하여 부득이하게 당분간 공동식사와 성만찬을 하지 않겠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4. 교우들과 가정의 행복과 평화,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주일(7월 12일 . 성령강림 후 제7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방현섭 목사 / 기도 : 민지애 사모
봉헌위원 : 임미화 집사 / 성찬보좌 : / 안내 : 함옥분 장로

목회서신
교회에 대한 금지 조치를 생각해봅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교회발 코로나19 확산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지난 10일 저녁부터 정규 예배(주일낮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심야예배, 새벽기도회)를 제외한 소모임과 시설 내 식사 제공 및 음식 섭취를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지침에 따르면 교회는 수련회와 기도회, 부흥회, 구역예배(속회), 성경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등을 금지하고 예배 시에도 찬송을 자제하고 통성기도 등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발하는 행위를 금지하였습니다. 물론 마스크 착용이나 최소 1m 이상 간격 유지, 출입자 명부 작성은 계속 해야 합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집합금지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부의 이런 조치에 기독교인들이 격렬하게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조치와 관련하여 시행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하였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37만여 명이 금지 취소를 요구하는 서명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 지방 목회자 단체톡방에서도 관련 링크를 퍼나르며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식당이나 클럽이나 웬만한 업장들이 다 영업을 하는데 왜 하필 교회만 콕 집어서 감염 확산의 발원지처럼 매도하고 차별하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교회가 감염 확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기사를 검색해보니, CBS의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 인터뷰한 이진오 목사님(세나무교회)은 5월과 6월, 두 달 사이에 약 60곳의 교회에서 550여명이 감염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 달동안의 국내 확진자가 2,030명인데 그중 약 1/4이 교회발 혹은 교회 관련 감염이라는 말입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정부의 조치가 좀 과하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벌금 300만 원이라는 단서를 보니 더 불편해집니다. 우리교회같이 작은 교회가 주일에 한 번 모여 식사를 나누며 서로를 챙기는 일조차 금지한다는 것에는 빈정이 상합니다. 그러나 550여명이라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확인하니 교회가 좀 더 긴장을 해야겠다는 수긍이 갑니다. 왜 교회만 차별하느냐고, 심지어는 종교탄압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에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차별금지법 제정 노력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집단이 교회인데 교회를 차별하지 말라는 주장은 너무 염치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지방 목회자들의 단체톡방을 나와버렸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갑니다. 예배와 소모임이 축소되면 재정과 공동체의 유대감에도 분명히 어려움이 있겠지요. 또 다수의 교회들이 묵묵히 감염확산 방지를 위해 협력하고 있는데 마치 감염의 온상이라도 되는 듯이 낙인을 찍는 것도 억울할 겁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현실에서 교회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코로나가 잦아든 이후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고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일도 많아질 것입니다. 교회가 먼저 나서서 더 적극적으로 코로나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도 부족할 텐데 말입니다.
교회발 확산세가 좀 누그러지면 이 조치도 완화되리라고 봅니다. 벌금이 무서워서 혹은 정부의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이웃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 교회가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이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나마 하던 것들도 잠시 중단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으로 잘 견뎌내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는 두 명의 저명한 인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명은 박원순 서울시장이고 다른 한 명은 백선엽 장군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평생을 인권변호와 시민사회운동에 바치다 2011년 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돼 유능한 시정을 펼쳤지만 최근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론하였고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하여 기부문화의 대중화에 앞장섰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일본이 만주괴뢰국을 세우고 창설한 만주국 육국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고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 등 군 요직을 거쳤고 퇴역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생을 민중에 헌신하며 살아온 박 시장의 죽음에 대해 성추행범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반면 친일, 독립군 토벌,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지휘 등의 의혹이 있는 백 장군은 100수를 누리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됩니다. 상이한 삶을 살아온 두 명의 죽음 앞에 우리는 지금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식민과 분단, 독재로 굴곡진 역사의 한 가운데를 살아왔던 이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고 가족들이 위로를 받기 원합니다. 이들의 실수와 오판으로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도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이들의 죽음에서 교훈을 얻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십시오.

온라인 예배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교회에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온라인 예배의 확산일 것입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교회는 물론 기업들까지 온라인 모임, 회의를 많이 도입하였습니다. 기존의 유튜브는 물론이고 줌, 구글미트 등 생소한 이름의 어플리케이션이 우리의 일상으로 깊이 들어왔습니다. 현장 예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는 매우 유익한 대안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 개인적으로 온라인 예배가 현장 참석 예배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서 찬송과 말씀 외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라는 의식을 통해 연대의식도 형성하고 또 서로를 격려하며 문안하는 과정이 빠진다면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하며 삶을 나누는 과정은 포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번 같은 상황이 수시로 반복될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또 기존의 방식이 잠시나마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면서 교인들의 의식이 바뀌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우리에게 좀 더 유연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케이블TV를 통한 온라인 예배는 이미 많이 하고 있지만 일방적 시청 방식인 케이블TV와는 달리 요즘의 어플은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쌍방향 소통 기능은 온라인 예배에 가능성을 확장해줄 것입니다. 집례자의 인도에 따라 각 가정에서 준비하여 참여하는 성만찬도 생각해볼 수 있구요. 상황 때문에 아예 못 하는 것보다는 상황에 맞춰서라도 하는 게 월씬 낫겠죠!

제1화 판자촌 동네 아이들(2)
나의 삶에 가난이란 단어는 이처럼 첫 번째 키워드가 되었다. 가난했기에 노동을 일찍 시작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쯤 되었던 것 같다. 돈 벌기 위해 나간 부모님들은 저녁 10시나 돼서야 돌아오기 때문에 늘 방치된 상태였고, 물론 군것질할 돈도 없었기에 동네에서 빈 병을 주어서 공판장에 갖다 주면 과자나 라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가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가정들은 연탄을 땠다. 동네마다 연탄가게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연탄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리 동네는 가파른 오르막이 많지 않은 덕에 좀 수월했지만 어린 나이에 고된 일이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게 칠이 되어야 일이 끝났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계절도 안 타고 좀 안정적인 알바를 구했다. 신문 배달이었다. 3살 많은 동네 형이 신문을 같이 돌리자고 해서 돌리기 시작했고 내가 맡은 구역이 청파동이었다. 몸집보다 큰 가방에 60부 정도의 신문을 넣고 배달하면 한 달에 3만 원을 받았다. 첫 월급을 받던 날 서부역에서 만두를 사 먹은 것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부모님께서는 신문팔이 한다고 매질까지 했으나 이후에도 몰래 신문을 돌려 용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움과 불편함은 전혀 연관성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치 이런 문구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살라는 채찍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또한 가난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가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가난이 주어지기 때문에 나만 괜찮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 아니라 가난해서 받게 되는 부당함은 외부로부터 오게 된다.
우리가 가난을 저항한다고 가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가난이 해결되면 누군가는 가난이 시작된다. 우리가 의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자본으로 계층이 분리되고 누군가는 한강을 보고 누군가는 똥물 앞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부당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가난 앞에서 그 어떤 체제나 사상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은 늘 억울하다.
가난이란 단어에 어떠한 비관적인 수식어를 붙여도 잘 어울린다. 가난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가거나 가난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간다. 현재 잘 살던 못 살던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가난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욕구이다. 그러므로 가난의 전제조건은 부재이다. 부재하다는 것은 필요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는 것이며, 아무리 갈급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가난한 것은 아닐까?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如來란 곧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何以故오. 如來者卽諸法如義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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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탕에서 나온 것들이 나와서는 비록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바탕으로 돌아가면 하나다. 그래서, 그렇고 또 그렇다. 아닌 게 없다.
여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이다. 바탕이니 그게 다 그러다. 그래서 여여如如라고 한다.
도道란 무엇인가?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도의 움직임(動)이라고 했다.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잘 보면 보인다.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먼지들도 결국은 제가 떠난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보았는가?
◆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여, 실로 법 없이 부처가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니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는 그 가운데가 차 있지도 않고 비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여래가 말하기를 모든 법이 다 부처의 법이라고 했거니와 수보리여, 모든 법이라고 말한 것이 모든 법이 아니요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모든 법이라고 하였다.
若有人이 言하기를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면 須菩提여 實無有法하여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須菩提여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니라.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 하거니와 須菩提여 所言一切法이 卽非一切法이요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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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가 텅 비어 있음(虛)으로 가득 차(實) 있다. 그러면 우주는 차 있는 것인가 비어 있는 것인가? 둘 다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왔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저 빛과 같다. 빛은 인간의 감각으로 미칠 수 없는 실체다.
감각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실체가 없음이 곧 마음의 실체다. 텅 비어 있음이 바로 가득 차 있음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마음)을 ’순수 의식pure awareness’이라고 부른다.
“물론 ‘영靈의 이야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맨 처음에 우리가 단순히 순수 의식pure awareness(순수한 깨어 있음)이엇따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순수 의식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그것을 서술할 수 있는 단어가 영어에는-아마 다른 언어에도-없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그것이 동시에 모든 것everything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nothing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고 형태가 없으면서 모든 형태를 다 지니고 있다. 순수 의식은 영soul을 초월해 있는데 그런데도 모든 영들souls이 그것의 부분이다. 그것을 일컬어 신God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또한 아직 물질계에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지 않는 ‘내재현현內在顯現(the immanent manifest)’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Ram Dass)
우리가 ‘그것’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제가 그것의 부분인 전체의 이름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부분이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전체의 존재를 또한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신을(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면서 모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내 안에 불성佛性이 있음 또한 분명하다.
그림자에 속지 말아라.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그늘을 아니 밟고서
어느 열매인들 손에 넣으랴?
그늘을 밟지 않고서는 나무에 닿을 수 없다. 허상을 외면하고서는 아무도 실체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법이 다 부처의 법이다. 그러나 ‘모든 법’이라는 게 따로 있는 줄 알면 속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보이는 그림자다. 그래서 ‘모든 법’이 아니라 ‘모든 법이라는 이름’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이 허상임을 알았거든 이제 그것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밟아 보이지 않는 실체에 이를 것이다. 그늘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나무가 서 있게 마련이니, 멀리 갈 석 없다. 선 자리에서 부처가 되지 못하면 달리 부처가 될 길이 없다.

찬양사역자 밥 소르기(Bob Sorge) 목사는 기름부음 넘치는 찬양 인도자이며 세미나 강사이자 탁월한 피아노 연주가이다.
그의 찬양이 깊이가 있고 균형이 있는 느낌을 주게 된 동기가 있다. 그는 찬양집회 도중 성대를 다쳤고 이후에 목소리를 잃고 전혀 찬송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기조차 힘들었다. 찬양을 전문적으로 하는 그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한다. “저는 제 목소리가 이렇게 되기 전에는 우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밤마다 울었습니다. 울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입니까?’ 제 평생에 그렇게 강렬하게 하나님을 추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 속에서 수많은 꺾임을 경험했지만, 거기서 일어섰을 때 도리어 더 큰 축복을 맛보았다. 그는 말했다. “저는 목소리를 잃은 이후에 찬송을 보다 넓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좁은 의미의 찬송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리는 찬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연약한 목소리였지만 그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지역에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도우셨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고난 중의 하는 찬송은 진실한 것입니다. 찬송할 상황이 아니더라도, 감사할 형편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찬송할 때 그 찬송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오늘 당신은 찬송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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