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은 2월 4일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태어난 날입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지했으며, 세속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역할에 대한 견해로 중요한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를 타도하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투옥되어 처형당했다. 그가 죽은 뒤인 1951년 출판된 〈옥중 서간 Widerstand und Ergebung〉은 그의 신념이 담긴 가장 심오한 글이다.
초기교육
아버지 카를 본회퍼가 정신의학 및 신경의학 교수로 있던 베를린대학교의 학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923~27년 튀빙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대학교에서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라인홀드 제베르크, 카를 홀 같은 역사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카를 바르트가 스위스에서 주창한 새로운 '계시신학'에 크게 매료되었다. 비판적 입장에서 바르트에 동조한 그의 태도는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 Sanctorum Communio〉(1930, 〈The Communion of Saints〉로 1963년 영역)에 담겨 있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교회를 사회학적·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행위와 존재 Akt und Sein〉(1931)에서는 선험철학과 존재론, 지식과 존재에 대한 칸트 철학 및 칸트 이후의 이론들이 개신교 신학과 가톨릭 신학에 끼친 영향을 추적했다. 1928~29년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인 교회의 부목사로 일한 뒤 뉴욕 시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1931년 독일로 돌아와 곧 베를린대학교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받았다.
나치에 대한 항거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반(反)유대인주의를 공언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1933~35년 런던에 있는 조그만 독일인 교회 두 곳에서 목회를 하느라 18개월 동안 독일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에 대한 개신교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던 고백교회의 지도적인 대변자가 되었다. 1935년 핑켄발트(포메라니아)에 고백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고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이 신학교는 1937년 정권에 의해 폐교당했지만 1940년까지 위장된 형태로 존속했다. 이 신학교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책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1939)에 명시해놓은 기도의 실천, 개인고백, 공동규율을 실행했다. 이 기간에 산상수훈에 관한 연구서인 〈나를 따르라 Nachfolge〉(1937)를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개신교 교회들(특히 루터파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값싼 은혜'를 비판했다. 값싼 은혜는 하느님이 제한 없이 용서를 베푼다고 믿음으로써 사실상 윤리적인 방종을 은폐하는 태도를 말한다. 본회퍼는 처음에는 이렇게 엄격하고 심지어 금욕적인 모습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이 모습은 훗날 그가 주장한 '그리스도교의 세속성'과 모순되지는 않지만 대조를 이룸). 이 시기에 그가 국제문제에 대해 취한 입장은 평화주의에 가까웠다.
1931년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대회에 참석한 뒤 '교회를 통한 국제우호증진 세계연맹'(World Alliance for Promoting International Friendship through the Churches)의 유럽 청년부 간사로 임명받았고, 독일에 민족주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에큐메니컬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노력하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벨의 지지를 받았다. 1938년 변호사인 매형 한스 폰 도나니의 소개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단체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회퍼는 점점 더 정치성을 띤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9년 미국 망명을 고려했으나 뉴욕 시에서 불과 2주 동안 체류하다가 후원자인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에게 "만일 지금 내 동포와 함께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에게 가해지는 온갖 제약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보국에 위장 취업하여 저항운동을 위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는데, 사실상 이 군사정보국이 저항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42년 5월 스웨덴으로 가서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어 베를린에 수감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본회퍼가 암살음모에 직접 관여했음을 밝혀주는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고문을 받고 결국 처형당했다. 수감되기 직전 약혼을 발표했지만 결혼은 못했다.
윤리 및 종교 사상
1940~43년 그리스도교 윤리학에 관한 책 1권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썼지만 일부밖에 완성하지 못했으며, 그 내용은 사후에 〈윤리학 Ethik〉(1949)으로 출판되었다. 본회퍼는 '두 영역으로 나누는 모든 사고방식', 즉 이원론적으로 교회와 세계, 자연과 은총,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에 관한 교리)에 근거한 통합적이고 구체적인 윤리를 요청했고, 노동·혼인·정부를 창조질서로 보기보다는 하느님이 부여한 역동적인 임무나 기능(위임)으로 보는 윤리를 요구했다. 그리스도교와 휴머니즘이 현대의 전제정치에 대항해 손을 잡는 것을 환영했고, 개신교 사상에서 '자연적인 것'의 개념을 재발견하라고 주장했다. 옥중에서 쓴 글들은 1951년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는데, 문화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에 대해 두드러지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끌며, 본회퍼가 친구이자 훗날 그의 글을 편집하고 전기를 쓴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펼쳐보인 신학적 주제들 때문에 관심을 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의 세속화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신이라는 가설 없이도 인간이 자기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키워온 것은 그리스도교가 이제까지 토대로 삼아온 '종교적 전제'가 쇠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교회가 인간 지식의 결함들을 찾거나 인간의 연약함을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기초로 강조하기보다는 '성인이 된 세계'에서 사는 인간의 성숙함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세에 치중하고 개인 구원에 몰두하는 '종교'의 껍질을 벗어버리면 그리스도교는 실제로 해방되어 유대교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현세를 중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특권들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었던 예수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에 일어난 교회와 목회의 개혁운동들, 영국 울리치 주교였던 A.T.로빈슨이 시작한 '신에게 솔직히' 논쟁, '세속적인 그리스도교' 또는 '복음의 세속적 의미'를 주창하려는 노력들, 1960년대에 일어난 '신 죽음'의 논쟁, 그리고 좀더 다른 관점에서 보면 '희망의 신학'의 등장에 영향을 끼쳤다. 본회퍼의 주요저서들 가운데는 위에 언급한 것들을 제외하고도 〈창조와 타락: 창세기 1~3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Creation and Fall: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1933)과 짧은 글들을 엮은 〈전집 Gesammelte Schriften〉(5권)이 있다.
F. Sherman 글 / (다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