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2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평화의 길을 걷는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확산으로 인하여 예배가 비대면으로 전환되어 주일 오전 10시에 유튜브를 통하여 예배 및 설교 영상을 공유하오니 가정에서 상황에 따라 경건하게 예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김경수 집사님(임미화 집사님)의 부친 김지현 님께서 지난 19일에 향년 80세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고인의 안식을 빌며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4. 안주영 성도님 가정이 이번 금요일(28일)에 합정동으로 이사를 합니다.
5. 옥바라지선교센터가 노량진수산시장 강제이전 반대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벼룩시장을 준비하며 28일(금)까지 기부물품을 받고 있습니다. 기부물품이 있으신 가정은 연락 주시면 방문 수거하겠습니다.
■ 다음주일(8월 30일 . 왕국절 제1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박성중 목사 / 기도 :
봉헌위원 : 안주영 성도 / 성찬보좌 : 윤재민 청년 / 안내 : 방정혁 학생

목회서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면서?
아시다시피 지난 19일부터 교회 대면 예배 금지가 전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국무총리는 온라인 등 비대면 예배만이 허용되고 소모임, 현장예배 등 모든 형태의 대면 모임을 금지하며 협조를 부탁한다고 담화하였습니다.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여름 휴가철을 맞아 경계가 느슨해졌고 일부 극우 개신교 집단이 8.15 반정부 집회를 강행하면서 세 자릿수로 감염이 확산되고 있어 그 불똥이 전체 교회에 튀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교회는 강력하게 반발하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미 신천지 집단에 의해 대량 감염 사태를 겪었는데 여론은 오히려 신천지 때보다 더 비판적입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들어 교회의 예배강행과 일부 집단의 감염검사 비협조 행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기꺼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생명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무모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아는 것을 정작 일부 기독교인들은 외면하고 있으니 비웃음을 당할 만 합니다.
그래서 상식 있는 교회와 교인들은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 사과하는 교회는 이미 감염 방지를 위한 방역을 잘 하는 교회들일 겁니다. 검사에 붕응하는 이들은 큰소리를 치며 정부 당국의 검사 수치를 조작이라고 하고 바이러스 테러를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교회들은 오히려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세상은 항상 선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욕을 먹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인류를 위해 몸 바쳐 희생하신 예수님도 온갖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셨으니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강타, 의료진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14일, 21일의 파업에 이어 26일에도 파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한방 첩약 급여화, 비대면 진료 육성의 정책 추진을 한다고 밝히자 의협이 격렬하게 반대, 수련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것입니다. 정부는 지방 소도시의 의료환경 열악과 의료진 부족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책을 제안하였지만, 의협은 극한경쟁으로 몰아가는 악법이라고 규정하고 의사들에 대한 처우개선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코로나 진정까지 정책을 보류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의협은 '신뢰할 수 없는 정치적 수사'라며 파업 강행 의지를 보였습니다. 의사도 직업인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집단행동을 할 수 있지만 국민의 반응은 냉담하고 이기적인 태도라고 비판하는 쪽이 많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한 의사들의 파업은 극단적 집단행동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합리적 타협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코로나19 사태에서 헌신적으로 방역 활동에 앞장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의사들이 지금 집단행동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복무하는 의사들이 이성을 되찾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바라며 모두가 함께 협력하여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코로나19로 세계가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이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건만,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가득매운 길거리는 여전히 생경하다. 한 마디로 SF적이다. 이는 여느 SF영화가 그리고 있는 어둡고 암울하며 자극적인 디스토피아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처럼 보여진다. 떠들썩한 핵전쟁도 없었고 외계인의 침공도, 그렇다고 지각변동으로 인한 엄청난 재난 한 번 없이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게 멈춰버렸다. 마치 80년대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 했던 핸드폰(스마트폰)이 자연스레 지금의 일상이 된 과정처럼 디스토피아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조용하게 우리 일상을 잠식하며 도래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 속에서 고통을 토로하며 절규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 공동체가 대면하는 방식이다. ‘비일상의 일상화’가 당연스럽게 진행되는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하나의 배경음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매일같이 감염자 숫자를 카운트하며 국난극복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정부와 언론도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조용한 절규’에는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우리 공동체가 누군가의 절규를 무음으로 치부하고 ‘조용한 절규’를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그 시점이 바로 진짜 디스토피아의 시작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1997년 IMF 외환위기 상황 속에서 같은 절망을 겪은 바 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싶은 노래는 90년대 대표적인 친자매 그룹으로 손꼽히는 ‘한스밴드’의 <오락실>이라는 곡이다. IMF 직후인 1998년 당시 이 경쾌한 노래가 전달하고 있는 가사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중략)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엔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한스밴드 1집 <오락실> 중-

가사를 살펴보면 시험을 망쳤다는 청소년 화자는 오락실에 가서 뜻밖에 아버지를 만나고 모처럼 아버지와 함께 게임을 하며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한숨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며 IMF 대량실업 사태에 관한 현실의 비정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소녀의 희망적이고 경쾌한 목소리를 통해 더욱 역설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족에게 조차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못하고 숨죽인 채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정리해고자의 실존이다. "오락실"에서 사랑하는 딸을 마주쳐야 했던 정리해고자는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조용하게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청소년이었던 1998년 <오락실>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당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우리 집을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빚쟁이들 때문에 집의 창문은 항상 닫혀있었고 커튼도 쳐져있어야 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는 침묵의 공간, 그 조용한 정막을 깨뜨리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IMF 실직사태에 대해 보도하였고, 정부도 다양한 대책을 간구한다고 했지만 정작 직장에 쫓겨나 공원이나 오락실을 배회하던 이들, 또 빚쟁이들을 피해 집안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의 절규는 한낱 자연스러운 배경음으로 치부되었다. 연일 호도되는 국가적 난재 앞에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고, 도움도 구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소리 내어 절규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은 다만 침묵할 것을 강요했다.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너무나도 조용하게,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했다. ‘조용한 절규’의 주인공들은 숨죽인 채 하나 둘 죽음으로 내몰렸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정리해고자가 되거나 거리 홈리스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IMF 이후의 세상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거리 노숙인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비정규직과 계약직 노동 또한 당연한 상식이 되었으며 서로를 향해 ‘부자 되라’는 민망한 인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지금 또 다른 디스토피아의 시대로 이행되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조용한 절규'를 대면하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여전해 보인다. 한 기사를 보면 지난 2020년 6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수령한 가구의 비율은 전체의 99.5%라고 한다. 이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원금을 신청한 이들 중에 0.5%가 지원금을 전혀 수급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전국민에게 지급되어야 할 재난지원금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0.5%는 과연 누구일까? 이어서 기사는 재난지원금을 신청한 서울지역 홈리스의 비율이 35.8%라는 통계를 이야기한다. ‘비대면’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가 완전 정지된 상황에서 생존자체가 가장 절박한 홈리스의 절반이상이 재난 지원금을 아예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거지가 불안정한 홈리스일수록 ‘주민등록지의 불일치’, ‘신원증명수단의 부재’ 등 빈곤이 만들어낸 신청 장벽으로 인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거가 불안정한 절대적인 빈곤층이 감염병으로부터 가장 취약하다는 자명한 사실은 이미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조용한 절규’는 그저 삭제되거나 편집될 뿐이다.

“오늘도 긴 여행이 시작됐어 오늘도 어제처럼 뜻밖이야
거리엔 넥타이 맨 검은 새들 어디론가 날지 못해 걷고 있어
누군가 노랠 불러 나를 불러 어디선가 바람 따라 내게 들려와
오늘도 긴 여행이 시작됐어“ -패닉 3집 <여행> 중-
고립무원(고립되어 구원 받을받을 데가 없음)의 디스토피아가 일상이 되어가는 오늘, 마치 1998년에 발표되었던 그룹 패닉의 <여행>이란 노래의 가사처럼 ‘조용한 절규’를 읊조리는 이들이 향하게 될 서글픈 발걸음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조용한 절규’의 소리를 귀 담아 들어야 할 텐데. 그리고 ‘허탈한 여행’ 가운데 생의 위기를 경험하는 발걸음들의 동행자가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당신이 코로나로 호들갑스러운 지금 과연 어떤 몫소리를 듣고 있는가? 문득 20년 전 오락실에서 딸을 마주해야 했던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자주 만나던 홈리스분들의 20년전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에겐 긴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길의 동행자가 되고 싶다.

* 함께 듣는 음악
* 참조 기사
“묘길상보살妙吉祥菩薩이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살생의 업을 지었으니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터인즉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보살이 곧 사람으로 몸을 바꾸고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생의 업을 지었으니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앞 사람이 그 말을 듣고서, 나 또한 그러하다고 말하매 사람으로 몸을 바꾼 보살이 이르기를, 오직 부처님이 구할 수 있다, 하고 함께 가서, 사람으로 몸을 바꾼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제가 살생의 업을 지어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사오니 바라건대 부처님께서 살려 주소서.
부처님이 곧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살생의 업을 지었다고 했는데 어느 마음으로 그 업상業相을 일으킨 것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약에 과거심으로 일으켰다면 과거가 이미 없어졌으므로 그 마음을 얻을 수 없고, 미래심으로 일으켰다면 미래가 아직 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심으로 일으켰다면 현재가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얻을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아무것도 일어난 바 없고 아무것도 일어난 바 없으니 그런 까닭에 어디에서 죄상을 찾겠느냐?
착한 사람아, 마음이란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고,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고, 마음에는 모양이 없고, 푸르지도 누렇지도 붉지도 희지도 않은 것이 마음이다. 마음에는 조작造作이 없으니 이는 지어내는 자(作者)가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허깨비가 아니니 이는 본디 참되고 알찬(眞實) 때문이요, 마음에는 가장자리가 없으니 이는 한량限量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잡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니 이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허공과 같으니 이는 장애가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더럽고 깨끗하고가 없으니 이는 모든 헤아림(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아,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모든 법法 가운데서 마음을 구하지만 얻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마음의 자성自性이 곧 모든 법의 성(法性)이요 모든 법이 공하니 이것이 곧 참되고 알찬(眞實) 성性이기 대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이제 너는 마땅히 헛된 두려움을 일으키지 말 것이다.
이때에 사람으로 몸을 바꾼 보살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곧 부처님께 여쭈기를, 제가 비로소 죄업의 성性이 공임을 깨달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진짜로 살생의 업을 지은 자가 또한 부처님께 아뢰기를, 제가 비로소 죄업의 성이 공임을 깨달아 다시는 두렵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未曾有經)
깨달은 자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을 지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에게도 죄는 없다. 다만 그 흔적과 죄책감이 있을 뿐이다.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은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다.(누가복음 5:20) 그가 용서를 빌기도 전에 이미 그의 죄는 용서받았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 말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더러움이라고 하는가? 생사조작취향生死造作趣向이 있어서 그것들이 더러움이다. 곧장 도를 깨닫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곧 도다. 무엇이 평상심인가? 만들어 내지 않고(無造作) 옳고 그르고가 없고(無是非) 잡고 버리고가 없고(無取捨) 미워하고 좋아하고가 없고(無憎愛) 범인과 성인이 없음(無凡聖)이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범부행凡夫行도 아니고 성현행聖賢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했다.” (馬祖).

1955년 12월 1일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했다. 특히 남부에서 흑인들은 버스를 타더라도 뒷자리에 앉아야 하거나 그나마도 필요시엔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로자 팍스(Rosa Parks)여사는 버스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내 백인 승객이 올라왔고, 그녀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알라바마주 몽고메리 지역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런 “범죄”(?)로 체포된 흑인은 로자 팍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거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그녀는 일약 흑인 인권 운동가로 자리매김 된다.
1955년 12월 5일, 킹 목사 주도로 흑인들은 몽고메리 버스승차거부운동을 전개한다. 수많은 흑인들이 도보로 걸어서 출근하거나 차를 가진 흑인들은 동료 흑인들에게 카풀을 제공했다. 어떤 흑인은 노새를 타고 출근하기도 했다고 한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서 취재에 열중했고, 그 중심은 로자 팍스였다.
기자들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용기있는 행동을 했습니까?” 로자 팍스는 기자들을 올려다보며대답했다. “용기라뇨? 그 버스 뒤쪽까지 걸어가기에는 그날 너무 피곤해서 앉았을 뿐이예요!”
역사를 변화시키는 불씨는 탁월한 지도자의 원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한 사람의 변화를 바라는 작은 행동으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LPG가스가 가득 차 있는 공간에 불씨가 던져지면 폭발하듯이 변화를 위한 대중의 갈망이 충만했을 때 한 사람의 행동은 변화의 불씨가 됩니다. 최근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기독교 신앙인들의 갈망은 충천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불씨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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