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상징물> 4월 9일(1975년) 인혁당 사형판결

by 좋은만남 posted Apr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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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확정 18시간만에 사형…사법부도 함께 죽었다

영남 진보인사 8명 ‘반국가단체’ 조작

군법회의 공판조서 ‘부인→시인’ 변조

국제법학자협 “4월9일은 사법암흑의 날”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3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사법살인

조작 또 조작
1974년 4월3일 박정희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4월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수사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5년 4월9일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날 대한민국 사법부도 같이 죽었다.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이날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혁신계 인사들을 반국가단체 조직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기소했던 사건이다. 중정이 사건을 수사하여 검찰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의 검사들이 도저히 기소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며 사표를 던지고 기소를 거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들이 10년 세월이 지나 다시 잡혀 온 것이다. 악연이었다. 1차 사건 당시 부하들의 항명으로 체면을 구긴 검찰총장 신직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건을 총지휘했고, 당시 중정 수사과장이던 이용택은 정치적 사건의 처리로 악명 높은 중정 6국 국장으로 수사 책임자가 되었다.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 강창덕, 나경일 등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다수는 박정희의 출신지인 대구·경북지역에서 3선개헌 반대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활동에 앞장서온 인물들이었다. 박정희가 담화문을 발표한 4월3일은 아직 민청학련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지도 않았고, 인혁당 관련 인물들은 한 명도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박정희의 담화문에 인민혁명이란 말과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이란 말이 들어감으로써 수사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다. 이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된 것은 4월25일 신직수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밝힌 다음부터였다.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신직수의 발표를 보고도 멀뚱멀뚱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10년 전에도 인혁당은 있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을 ‘재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자신들이 이 엄청난 사건에 연루되리라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사건의 실체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르지만 ‘인혁당 재건위’ 라는 조직은 공소장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공소장에는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이라는 세 개의 단체가 나온다. 아무리 조작을 일삼은 중정과 유신 검찰이라 하더라도 혁신계 인사들의 느슨한 만남을 도저히 하나의 조직으로 묶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실체가 있는 실정법 위반이라면 하재완이 이북방송을 녹취한 노트를 몇 명이 돌려 본 것뿐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을 전후한 시기, 혁신계 인사들은 늘 이북의 통일정책을 궁금해했다. 하재완은 군 시절 특무대에서 이북방송을 녹취했는데, 그가 이북방송에서 조선노동당 5차당대회 보고문(1970)을 노트에 받아 적어 주위 사람들과 돌려 본 것이 다였다. 그저 반공법 위반으로 가볍게 처리해도 될 사건을 유신정권은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사건을 부풀린 것이다. 6국장 이용택은 1주일에 두 번 박정희에게 직접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연결고리로는 하재완네 아이들 가정교사였던 경북대 출신의 여정남이 지목되었다. 처음 중정은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 등 서울대생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으로 조서를 작성했다가, 부랴부랴 여정남이 이철과 유인태를 지도한 것으로 조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등 저명인사를 제시하고, 또 일본인 기자를 엮어 넣어 민청학련이 국외 공산계열과도 연결된 것으로 조작했다. 그러나 명망가와 외국인을 엮어 넣자 사람들이 수사의 허점을 파고들어 시끄럽기만 할 뿐 별 효과가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붉은 칠을 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어넣으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반독재운동을 해오던 진보적 인사들이 그렇게 희생양이 되었다.

1심과 2심은 군법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변호인의 접견도 허락되지 않았고, 가족들의 면회도 금지되었다. 변호인이 요구한 증거는 모두 채택되지 않았고, 검찰 쪽 증인이 증언하던 날 변호인들은 반대신문은커녕 자택에 연금되어 법정에 출두할 수도 없었다. 피고인 임구호는 법정에서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가 검찰관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별을 단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검사의 질문에 반박하려 하면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고 답변을 끊었다.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국방부 출입기자의 방청은 허락되었으나 아무도 수첩을 꺼내 취재하지 않았고, 외신기자들의 방청은 “재판 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한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에서는 강신옥 변호사가 “직업상 변호인석에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라고 발언했다가 구속되어 원대로 피고인석에 앉게 되었다.

공판조서 변조
이렇게 어이없는 재판에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판조서가 변조된 것이다. 대법원의 재판은 피고인을 직접 심리하지 않고 기록만으로 사건을 판단하기 때문에 공판조서의 변조는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인 김종길 변호사는 1974년 9월 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면서 공판조서 변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법정에서 분명히 아니라고 부인한 부분이 대부분 공소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발설자 조사>라는 중정의 내부 문건에 의하면 김종길 변호사는 1974년 10월 중순 사무실을 찾아온 우홍선과 전창일의 부인에게 “공판조서의 기재 내용이 피고인의 진술 내용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5년 2월 초에는 조승각 변호사도 이수병·김용원 등의 공판조서 열람을 대법원에 신청해서 타자로 된 공판조서 등본 1통을 교부받아 검토했다. 조승각 변호사 역시 많은 부분이 자신이 공판정에서 직접 들은 피고인의 진술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이수병 진술 중 피고인의 진술과 정반대로 작성된 공판조서 부분에 “---와” “x”로 표시해서 2월 중순 이수병과 김용원의 부인에게 나눠줬다. 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가 공판조서가 실제 답변과 다르게 작성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은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결의를 한 사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8명이 사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혐의 때문인데, 검찰 쪽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피고인들의 자백이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지만, 군법회의는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했고 대법원은 날조된 공판조서에 의거해서 사형을 확정했다.

사법살인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도 처음 군법회의에서 7명이나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1974년 7월20일 여정남을 제외한 대부분이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때 벌써 민청학련은 살리고, 인혁당은 죽인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8월15일에는 육영수씨가 피격·서거하여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1975년 2월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 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석방하는 유화 조처를 취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기대와는 달리 석방된 사람들은 ‘자숙’하는 대신 개선장군 대접을 받았고, 풀려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격분한 박정희는 인혁당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간첩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며 극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간첩이란 북이 보낸 남파간첩이 아니고, 미군정보기관이 북쪽으로 침투시킨 간첩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은 사이공 함락이 임박하는 등 정세가 악화되자 인혁당 관련자의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형집행은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시작되었다. 구속 이래 1년 가까이 면회를 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아침 일찍 서대문구치소에 왔다가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들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변조되었다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반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더는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군법회의에 보내지 않고 일반 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멀어져 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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