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8일

by 좋은만남 posted Nov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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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11주일입니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 땅 위에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예배당에서 대면예배를 드리지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방역수칙을 잘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당 출석이 어려우신 분은 온라인 비대면 예배로 참여해 주십시오.
줌 ID : 282 736 9589 / 암호 1234
3. 오늘 예배 후에 월동준비로 김장을 하겠습니다. 김장배추는 방인웅 장로님 부부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4. 다음 주일 오후에는 강화 이필완 목사님 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함께해 주십시오.
5. 교우와 가정의 평화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  다음주일(11월 15일, 왕국절 제12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남기평 목사 / 기도 : 한효균 성도
봉헌위원 : 박순용 집사 / 성찬보좌 : 송윤혁 집사 / 안내 : 오호숙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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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벤트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다 아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국가이다 보니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겠지요.
트럼프 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가 격돌한 선거에서 민주당 바이든 후보가 승기를 잡았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가 예측과 출구조사를 뒤엎고 대통령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변이 없었습니다. 이번 선거의 이변이라면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불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됐습니다. 코로나19라는 대재앙이 닥쳤음에도 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염 확산에 기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하여 차별적이고 분열적인 정책을 밀어붙여 많은 사람이 우려하였고 세계의 평화를 위한 역할을 하기보다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강령을 앞세워 대결적 외교 관계를 일삼았고 그 힘을 평화가 아닌 착취와 강요에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국가가 우려와 비웃음으로 미국을 지켜봤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재 상황은 내전 혹은 폭동을 염려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트럼프는 비록 선거에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국민의 절반 가까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또 어떤 나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들은 왜 트럼프를 지지하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어떤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겠지요.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도 북한과 마주 앉았던 트럼프가 재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물론 저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지만 트럼프는 전 세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지난 4년을 보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좋자고 그런 사람이 재임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세계 인류를 또다시 갈등과 분열로 밀어 넣어도 된다는, 정말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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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힘을 주셨다면 그 힘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생명과 평화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권력의 위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나라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미국은 아슬아슬하지만 그것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인류도 미국의 선거를 지켜보면서 이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모저모
다음주일에는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봄, 가을에 하는 농촌생태활동은 우리에게 생명 감수성과 농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중요한 행사인데 코로나19 때문에 봄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을에는 한 번 기회가 왔습니다. 마침 강화 이필완 목사님도 오라고 하시니 기꺼운 마음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다음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출발하겠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과 작물을 정리하는 일과 깨를 터는 일을 할 예정입니다. 또 많지는 않지만 감 수확도 돕겠습니다. 일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라도 농촌을 찾아가 작은 손이나마 거드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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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 역무, 주차, 상담 등을 담당하는 코레일 자회사 계약직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 약속 이행을 요구하며 9일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정책을 약속했고 이에 따라 철도노조와 코레일은 시중노임단가와 저임금 공공기관 인상률 등의 적용을 반영하는 위탁개약을 합의, 체결하였지만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는 명세서 공개와 처우개선 인건비 지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또 정년 1년 연장 약속도 이행하지 않아 연말 200여명이 정년최직 처리 될 예정입니다. 조지현 노조 철도고객센터 지부장에 따르면 계약직의 임금은 코레일 정규직의 44% 수준이고 90%가 노동자 최저 임금을 받는데 이마저도 근속기간이 길수록 더 적은 기본급을 받는 체계라고 합니다. 노조는  “대통령의 약속과 정책은 오간 데 없고, 기재부의 지침과 국토부·코레일·코레일네트웍스 관료들 말만 있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환경을 바꾸는 발걸음이 되도록 지지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동일노동을 함에도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정부가 약속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정책은 비정규직 채용 관행을 근절하는 전환점이 돼야 합니다.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현장의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지지하며 기도합니다.
 
 
(42) 진학 지도 변천사
 
1
 
“요즘은 대학교를 어떻게 보내나?”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시 50분 도착 예정’이란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달려온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한 친구의 그만한 뜬금포 질문입니다.
“우리 때는 배치표라는 게 있었지.”
“기억력들도 좋다.”
30년 전으로 돌아가 배치표가 있었습니다. J학원, D학원 등 유명 입시 학원들이 만든, 대략 전지 크기의 대학 진학 가이드입니다. 위에는 학원명이 크게 그리곤 모두 깨알 같은 글씨입니다. 제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커다란 표인데 칸 구성이 이렇습니다. 왼쪽은 학력고사 점수가 아래로 낮은 순으로 정렬이 되어 있습니다. 그 오른쪽은 대학의 이름이 ㄱㄴㄷ 순으로, 대학의 이름 아래로는 왼쪽 점수에 따라 학과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 의자 뒤 회색 철제 캐비닛에는 배치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자를 빼 배치표를 향해 반쯤 돌아앉은 선생님의 왼손에는 반 자른 당구 큐대가 들렸습니다.
“모의고사 평균이 몇 점이지?”
“256점이요.”
선생님의 당구 큐대는 왼쪽 점수에 맞춰 배치표에 가로로 자리합니다. 그리고 당구 큐대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원할 대학 학과는 이 밑이다.”
선생님의 지도에 이의 또는 반신반의할 때는 대가가 따릅니다.
“엎드려.” 그리곤 배치표를 젖히고 열린 캐비닛 안 야구방망이.
“이건 번트죠.” 풀 스윙입니다.
 
2
 
배치표가 진화했습니다. 요즘 학교의 선생님들은 일반적으로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의 ‘Sen-Jinhak’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합니다. 선생님에 따라 개인적으로 ‘비○’, ‘대○’, ‘진학○’ 등 사설 진학 프로그램으로 지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학교의 프로그램은 무료이지만 사설 프로그램은 유료입니다. 이 사설 프로그램은 마트 복숭아 통조림 시식처럼 맛보기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지만, 전체 기능을 사용하려면 유료입니다. 그리고 유료에 더 신뢰가 간다는 건 거의 신앙입니다. 비쌀수록.
 
진화는 맞지만 큰 틀은 비슷합니다. 다만 다른 점은 예전 학력고사 시절 대부분 총점으로 진학을 했다면 대학별로 반영하는 과목이 다르고 배점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이를 프로그램이 알아서 계산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편리합니다. 또한, 아이들의 수능 점수 입력뿐 아니라 그간의 고교 성적을 모두 입력 분석하기 때문에 아이의 성적 변화 추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이 프로그램의 합격 예측, 적중률입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그 간의 축적된 대입 지원과 결과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과를 예측하고 그 결과는 예측으로 반영됩니다. 이 예측과 적중률을 바탕으로 자기를 광고합니다.
 
그러나 30년 전입니다. 복도에는 여전히 아이들의 긴 줄이 있습니다. 배치표를 대신한 컴퓨터 모니터가 있고, 자신의 가로 선과 통계 세로 선이 만나는 교차점 아래가 배치표 당구 큐대 아래입니다. 그리고 대학교 합격자 발표입니다. 선택에는 결과가 따릅니다. 합격과 불합격의 이유가 필요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패스, 대부분 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배치표, 가로 당구 큐대 가로선 과 모니터, 합격 가능 교차점 언저리 아이들에게는. 아닙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능숙하게 배치표를 읽어내렸던 선생님과 진학 프로그램에 능숙한 선생님들에게 필요합니다. 자신의 진학 지도에 대한 성공의 칭찬과 면죄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합니다. 대학 진학은 자신의 진학 지도의 우수성이고 탈락은 배치표와 프로그램 예측 실패 때문입니다. 한 해는 ‘비○’의 오류, 다른 해는 ‘진학○’의 오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의 성패는 분명 다시 자기 자신의 능력과 코로나-19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통계와 경험이 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3
 
“다음.”
긴 복도 줄을 향해 열린 문틈을 파고 나온 호명입니다.
“네.”
호명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온 아이는 배치표의 당구 큐대 아래에, 모니터의 가능 대학 목록에 스스로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교무실을 빠져나가 말합니다.
“네 차례야.”
아이들은 두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네.’와 ‘네 차례야.’입니다. 지금 자신의 진학에 대해, 넓게는 진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때.
 
선생님의 선생님답지 않음은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아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전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보다 교육의 근본으로 묻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닌 아이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영혼 없이 배치표에 배치되고 목록에서 선택되는 수동적 삶을 깨달을 수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말을 들으라!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그러하니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나를 혼동하지 말라.”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 (청하, 2011), 189.
 
“이건 번트야.”, 풀 스윙을 부를 위험한 요청입니다. 그런데 이 요청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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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세존께서 게송(偈)으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모습으로 나를 보고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爾時에 世尊而說偈言하시기를, 若以色見我하고 以音聲求我면 是人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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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을 있는 데서 찾을 일이다. 없는 것을 없는 데서 찾으니 도무지 고달프기만 하고…
 
“여기서 말하는 ‘나(我)’는 진아眞我요 성性이요 불佛이다. 여래 또한 참된 성의 부처(眞性之佛)를 말한다. 만약에 모습(色)으로 나를 보고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은, 참된 성과 부처는 꼴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꼴과 모습으로는 볼 수가 없고 또한 음성으로는 구할 수 없는지라 만약에 꼴과 모습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면 이 사람이 가는 길은 그릇된(邪) 길이라는 말이다. 꼴·모습·음성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끈다. 그러므로 꼴·모습·음성으로 부처를 구하면 그 가는 길이 그릇된 길인데 어떻게 바른 깨달음을 얻고 한결같이 참된 성과 부처를 보겠는가? 그래서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여래는 곧 이른바 진아眞我요 성性이요 불佛이다.”(王日休)
 
그러나 여기서도 착각하지 말 것!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道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데 속하지 않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있지도 않다(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고 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바를 가지고서 도를 구해도 잘못이지만 그것들을 떠나서 도를 구해도 잘못이다.”(涵虛堂)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신 분이 같은 입으로 말씀하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또 말씀하신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외면하고 어디에서 조물주를 뵐 것인가? 그러나 피조물에 눈길이 갇힌다면 또한 어찌 조물주를 뵙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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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후 관점디자이너가 쓴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추운날, 두 친구가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 친구가 뒤늦게 도착해서 막 가게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술집 입구에서 꽃을 팔던 할머니가 다가왔다. “신사 양반, 꽃 좀 사줘요.” 친구는 안따까운 생각에 물었다. 
“이렇게 추운데 왜 꽃을 팔고 계세요?”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손녀가 아픈데 약값이 없어서 그래요. 꽃을 팔아야만 손녀딸의 약을 살수 있다오.”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는, 할머니가 말씀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꽃을 샀다. 
꽃을 들고 술집으로 들어서자, 다른 친구가 꽃장수 할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그 꽃, 저 할머니한테 샀지?” 친구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다른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할머니 사기꾼이야. 저 할머니는 저기에서 항상 손녀딸 아프다면서 꽃을 팔거든? 그런데 저 할머니, 아예 손녀딸이 없어.”
그러자 속았다며 화를 낼 줄 알았던 그 친구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진짜? 손녀가 없어? 그러면 저 할머니 손녀딸, 안 아픈거네? 정말 다행이다! 친구야, 한 잔 하자. 건배!” 
 
무엇을 보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관점만 바꿔도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급변하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이 고정되어 있거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갇혀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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