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9일

by 좋은만남 posted Nov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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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강림절 제1주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강림절기의 의미를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코로나19 위기경보가 '심각'단계로 상향되었고 서울지역은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정규모임 인원 제한, 식사·소모임 금지는 물론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의 대면예배와 줌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여 드리오니 예배당에 오시는 분들은 유의하시고 방역수칙을 잘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3. 교우와 가정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4. 예배당에 나오시지 못하시는 가족 중 특별한 일이 있으신 분들은 꼭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십시오.

5. 12월 둘째 주일(13일)에 당회를 하겠습니다. 회의 방식은 추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다음주일(12월 6일, 강림절 제2주일) 예배위원

인도 및 설교 : 방현섭 목사 / 기도 : 목회기도

봉헌위원 : 재정부장 / 성찬보좌 : 안주영 성도 / 안내 : 임미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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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내년 목회계획서는 만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고 있어 온 나라가 비상입니다. 수능시험도 다가오고 연말 모임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방역당국은 강력한 모임 자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모임, 세미나 등 각 단체가 연례로 꼭 해야 할 행사들을 잡았다가 속속 취소하거나 축소, 온라인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원래 지난 금·토요일에 1박 2일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에서 주최하는 경남 밀양의 경남통일농업협회 견학 및 워크숍에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급하게 취소되었습니다. 12월 초에는 제주도에서 통일부 주최로 2박 3일간 열리는 포럼 일정이 있어 항공권도 다 발급받았는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연말이면 줄줄이 이어지던 단체들의 후원 행사도 올해는 조용합니다. 

아무래도 집단으로 모이는 교회에 대한 안팎의 긴장감은 더욱 높습니다. 연말이면 저도 담임목사로서 바빠집니다. 한 해를 정리하며 내년의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목회계획서 작성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목회계획서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올 한 해는 잡아 놓은 계획대로 행사도 하지 못하고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만든 목회계획서 내용 중에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라곤 교회 내부 절기 행사는 물론이고 야외행사도 연초 군산으로 겨울 놀이를 다녀온 것밖에는 없는 듯합니다. 당장 연말에 송구영신예배는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한 해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미리 계획을 세워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의 삶이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요구에 따라서 필요한 것을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미리 시간표를 짜놓고 그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면 쫓기듯 안달을 하고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봄에 날이 좋으면 '우리 꽃 구경 갑시다', 한반도 평화가 걱정될 때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예배 드립시다', 가을에 누군가 농사일 도와달라고 하면 '그러지요!'하고 자연스럽게 가면 될 텐데 미리부터 몇 월 몇 일에 가야 한다고 정해놓고 일정이 안 맞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사실 꼭 그날에 가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코로나라는 변수를 만나게 되다 보니 미리 세워놓은 계획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세워놓은 계획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더 많이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리 모든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거나 짜증을 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의미 있었고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넘어간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미리 세워놓는 계획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교우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참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계획을 잘 세우면 잘 세울수록 자발적인 참여와 자연스러운 섭리의 개입은 끼어들 틈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지요.

저는 내년을 위한 목회계획서를 만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내년도 코로나 변수가 계획을 많이 방해할 것 같고 또 코로나 핑계로 게으름에 익숙해진 제 몸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삶과 교회 운영에 좀 여백을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계획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백이 없어서 오히려 우리 삶이 더 빡빡해지고 경직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백만큼 여러분이 참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요. 내년 우리교회의 목회계획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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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12월 3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생과 재수생들이 대학 입학을 위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평가받는 중요한 날입니다. 올해는 49만여 명이 수능에 응시하는데 대학 정원보다 수험생 숫자가 적어지는 분기점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등교도 원활하지 못하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수업을 하느라고 불안한 요인들이 많습니다. 또 코로나로 인해 응시를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성적 등급이 불리해질까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최근 확진자 수가 500명을 넘나들고 있어 방역당국은 "가족과 이웃의 안전, 수험생들의 안심을 위해 지금 잠시 일상을 멈추고 방역에 집중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수능시험까지 어려운 시기에 노력하고 고생한 수험생들이 안전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국민의 관심과 협조가 절실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수능시험을 보는데 코로나19로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해온 시험을 코로나 감염 때문에 망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험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안전하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국민이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43) 종교의 기능

 

1

 

“종교의 역할 또는 기능은 무얼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줘요?”

채팅창에 답이 올라왔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그러게 일단은 믿어야 안정감도 생기겠지.”

오랜만에 채팅창에 연이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종교는 그럼 심리적 기능밖에 없어요?”

안경, 돋보기를 찾아 썼습니다. 노트북 화면 해상도가 1920×1080이고 글씨가 작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사실 온라인 수업이 양방향이 가능한 플랫폼을 사용하지만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오랜만 수업 중 채팅 대화입니다. ‘집중해야지.’

“맞아. 오늘 생각해 볼 주제가 바로 종교와 사회란다. 대 전제는 종교의 위치란다. 종교는 어디에 있지?”

“사회요.”

안경 수건을 꺼내 뽀드득 닦고 다시 썼습니다.

 

2

 

종교 수업 시간, 두 학자를 통해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1858~1917)이고 다른 하나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공산주의 혁명가입니다. 둘은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서 각각 종교기능론과 종교갈등론적 이해의 시작입니다.

 

종교기능론은 종교가 유기체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집중하는 관점입니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보통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회통합의 기능입니다. 종교는 현재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것을 통해 사회 안정의 기능을 합니다. 둘째는 사회통제의 기능입니다. 종교는 사회에 의무와 금기의 형태와 같은 규범을 제공하여 무규범 상태의 혼란을 방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종교갈등론은 종교가 사회의 갈등적 상황이라는 전제에서의 역할에 관심합니다. 지배와 피지배로 구성된 사회에서 종교는 지배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종교는 고대 시대 노예제도를 정당화했고, 중세기의 농노제도를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 자본의 축적을 축복으로 해석해왔습니다. 지배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에 왔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오늘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너무 부정적이지 않나요. 실제로는요? 특히 기독교요.”

‘이 녀석, 이럴 줄 알았지.’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수업 시간 사회 속 종교의 실제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수업 시간 뼈 때리는 비판적 태도가 썩 마음에 든 학생입니다.

 

3

 

사회적 사실로서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관념 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현실 기독교입니다.

 

“어느 민족의 어떤 종교도 분명히 이러한 목적을 가지며,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어떤 시민법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심성(Gesinnung, 태도)을 산출해 내는 일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G. W. F. 헤겔, 「기독교의 실정성」, 『청년 헤겔의 종교론집 1권 [베른 시기] 

헤겔의 종교론집』, 정대성 옮김 (한들출판사, 2001), 153.

 

게다가 여기까지 가면 난감합니다. 헤겔의 가장 비판적 제자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입니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123-125.

 

헤겔과 마르크가 보고 있는 현실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시민법을 만드는 태도(Gesinnung)도 만들지 못하며, 또한 그것이 가진 본래 가치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수업을 마치며, 종교의 주요한 기능을 소개했습니다. ‘사회변혁의 기능’입니다. 많은 혁명의 바탕에 종교가 있으며, 종교는 체제 속에 수동적인 인간을 능동적으로 세우고, 이 능동적 인간이 실천해야 할 ‘사회변혁’을 요청하며, 이 ‘사회변혁’이 바라보아야 할 이상을 제공해 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신학이, 남미의 해방신학이, 아주 예전 로마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예수가 그랬습니다.

 

아이에게 헤겔이 사용하는 ‘실정성’(實定性, Positivität), 기독교가 현실이 될 때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보다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하지 않는 것이라.” 그래야 아이를 현실로부터 나아가 구조로부터 독립시켜 주체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을 그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주체임을 깨닫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돌아와 앉은 교무실에 한 선생님이 찾아 왔습니다.

“이번 교원 성과급 평가 기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분명 국·영·수 교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준이 보건 영양 등 비교과 교사에게 적용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성과급을 찬성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렵습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목적에 따라 인간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교만이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꿈을 꾸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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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수보리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래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란 좇아서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니 그런 까닭에 여래라고 이름한 때문이다.

 

須菩提여, 若有人이 言하기를 如來가 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라.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요 亦無所니去 고로 名如來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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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의 존재를 비유로 말한다면 허공虛空과 같다. 저는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있게 한다. ‘없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여래다.

 

그가 가고 오고 앉고 눕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두는 것이다. 여기와 저기에 아울러 있는 존재가 여래다. 시작 없는 과거와 마침 없는 미래를 아울러 품고 있는 ‘지금’이 여래가 있는 곳이다.

 

예수님이, 내가 너 있는 곳에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존재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하느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그가 모든 고ᅟᅥᆺ에 아울러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딜 가는가? 고요함에서 왔다가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왔다 간다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다만 거죽의 모습이 바뀌고 또 바뀔 따름이다.

 

“여래는 오면서 오지 않고 가면서 가지 않고 머물면서 머물지 않고 움직임도 아니요 고요함도 아니요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합하여 아래로는 여러 중생과 같아 하나의 성性으로 평등하니 그래서 여래라 부르는 것이다.”(疏鈔)

 

눈앞에 돌멩이를 본다. 저 돌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면 빛의 속도로 원자핵을 돌고 있는 무수한 전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놓여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돌멩이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가만히 있는 것인가?

 

부분은 움직이고 전체는 가만히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분이면서 전체이기 때문이다.

 

인연 따라 쉼없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시체다. 그러나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나는 모시고 있는가? 앉고 눕고 오고 가면서 중심에 정적靜寂을 유지하고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앎’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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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짝사랑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저 예쁜 여자와 결혼하게 해주시면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습니다. 만일 바람을 피운다면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는 사모하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살다 보니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 남자는 바람을 피우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서원한 약속이 생가나 두려웠으니 죽지 않게 되자 몇 번이고 더 바람을 피웠다. 이젠 하나님께 서원한 것도 기억에서 지워버렸고 하나님이 계신 것도 잊어버렸다. 

3년이 흐른 어느 날 배를 타게 되었는데, 큰 풍랑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위기를 만나자 갑자기 하나님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 그 때 남자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나 혼자도 아니고 백 여 명이나 함께 배를 탔으니 설마 나 하나 죽이려고 배를 가라앉히진 않겠지’하고 생각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 같이 약속 안지키는 놈 백 명 모으느라 3년이 걸렸다.”

 

하나님과 한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을 잊고 계신 것이 아니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용서와 분노의 두 대접을 들고 참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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