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신뢰할만한 그리스도인인가
성경 ; 요한복음 1,45-49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들어가며 : 봄에는 따스한 생명의 기운으로, 여름에는 생명을 기르시는 뜨거운 햇살로, 가을에는 오곡을 익히는 산들바람으로, 겨울에는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눈발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거룩하게 하신 날에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만에 하얀 눈발로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셨습니다. 눈은 추워야 오는데 이상하게 눈이 오면 푸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겨울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푸근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도 절망이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근하게 품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삶 가운데서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열어나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항상 애기하지만 성장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성장이 천 년 만 년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때에 맞는 모습이 있습니다. 유아기나 청소년기, 혹은 청년기에 있는 생물은 성장해야 정상입니다. 성장하는 때를 지나면 성장을 멈추고 서서히 몰락합니다. 몰락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회다 다 무작정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강성하던 다윗제국이 아직 있습니까? 바빌로니아 제국, 고마제국이 여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미국제국도 지금 시름에 겹습니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성장해야 할 때는 성장하고 성장을 마치고 몰락할 때는 몰락하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어느 시점에 서 있을까요? 몇 년 전에 우리교회가 창립 스무 돌을 맞았을 때 우리는 교회가 스무 살에 맞는 모습을 갖춰야 하겠다고 고백하고 기도하는 중에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고 오늘 이렇게 예배당을 건축까지 하였습니다. 스무 살이면 청년입니다. 남자나 여자가 외형적으로 가장 왕성하고 가장 아름다울 때가 스무 살 때입니다. 청년기가 넘어서면 외형적인 왕성함보다는 내면적인 왕성함이나 아름다움을 가꾸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성장을 이뤄야 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예배공간을 만드는 일에 결실을 거두었다면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내면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즉 내면적 힘을 기르기 위한 단계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로 결실한 이 예배당을 채우는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나의 전도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 너무 바쁘거나 사회생활을 할 겨를이 없어 우리는 마땅히 전도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전도에 소극적이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또한 우리 좋은만남 공동체 여러분에게 드는 의문입니다. 만약 내가 전도를 하면 그 전도를 받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빌립이 보기에 예수님이 참 좋은 분이시고 성경에 약속한 바로 그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절친한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대답은 썰렁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 앞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신실한 사람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정기적으로 집 앞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다나엘을 종종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을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얻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와서 보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은 순순히 따라 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예를 들어 ‘저기 구세주가 나타났소’하는 말을 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따라나서겠습니까, 아니면 별 시덥잖은 소리를 한다며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시덥잖은 소리 같다고 해도 나다나엘처럼 따라 나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절대 허튼소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말의 진위를 떠나서 그 사람에게 가졌던 그동안의 신뢰 때문에라도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진짜 같아서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신뢰로 인해 속는 셈치고 한 번,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마지못해서라도 나선다는 말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구세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 입술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빌립이 얻었던 나다나엘의 신뢰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신뢰일 것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그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하고 말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이 인도를 무력으로 식민 통치를 할 때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강조했던 간디입니다. 간디의 이 말이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시대에 꼭 물어보아야 할 말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예수는 믿지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안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성도는 믿음의 대상은 아니지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크리스찬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겟습니까?
목회와 신학 7월호를 보면 “한국교회 정직성”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는데 비그리스도인이 보는 한국 교회의 정직성 평가에서 “별로 그렇치 않다”와 “전혀 그렇치 않다”는 답이 71.3%로 조사 되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서 우리가 깊이 반성을 해야 됩니다. 여기에 대고 “와서 보라”고 외쳐 본들 어떤 반응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지라에 있는 우리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와 보라’고 했을 때 우리에 대한 신뢰 때문에라도 와서 보고 고백할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전도는 갖가지 선물을 떠안기는 것이 아닙니다. 갖가지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이 다 떨어지고 어쩌다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납니다. 또 어떤 이는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로 불신자를 공격함으로 공포심을 유발하여 전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의 결실로 할 때에 그들은 우리를 따라 주님의 품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며 : 나다나엘은 빌립을 신뢰하였기에 그의 말을 따라 예수를 찾아가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에게 있어 빌립은 신뢰할만한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의 말이라면 한번쯤 진지하게 들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의 열심이나 지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 변화된 인격과 삶을 함께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 믿을만한 사람, ‘와 보라’고 했을 때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사람, 혹은 좀 미덥지 않더라도 따라가 볼 만한 신뢰를 줄 수 있는 기독교인으로 살았는지 한 번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적당한 호감과 적당한 대인관계, 적당한 친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신뢰받을 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고 우리의 빛 된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도전으로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