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현대판 나봇의 포도원 강탈사건
성경 ; 열왕기상 21,15-19
15 이세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아합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십시오. 돈을 주어도 당신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하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서, 이스르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다. 17 주님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19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재산을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들어가며 : 사계절을 주시고 때에 따른 알맞은 은혜를 베푸시며 또 민족이 명절을 통해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사랑 많은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계속 터지는 사건, 사고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만 민족 명절을 맞아 우리의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기쁘고 설렐 줄 압니다. 아무쪼록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좋은 날을 가족과 친지와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해 주십시오. 이 명절을 통한과 상실의 분노로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 헤아리는 중에 내 마음이 저려옴을 느끼는 명절 또한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봇은 이스라엘 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이스르엘에 포도원을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왕인 아합이 이 포도원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포도원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그것을 팔 수 없었습니다. 생계가 달린 땅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신실한 사람이었는지 그는 조상에게 물려받고 또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였습니다(레 25,8-28). 아마도 돈의 유혹이나 왕의 청이라는 이유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거절당하자 화를 내며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워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일종의 단식투쟁이었나봅니다. 이를 본 왕비 이세벨은 간교한 꾀를 내어 지역의 원로들과 귀족들을 시켜 나봇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죽이게 하였습니다. 결국 나봇은 자신과 후손의 재산인 포도원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합 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도원을 삼키러 이스르엘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아 아합 왕의 죄악을 경고하기 위해 아합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왕의 권력이 요구하면 기꺼이 포도원을 내주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힘들어 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손을 쓰는 것은 당연한 아내의 일이 아닌가, 원로들과 귀족들이 왕비의 명을 받아 그대로 한 것도 무슨 큰 죄가 있을까, 괜히 튕기다가 죽은 나봇만 불쌍한거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있을 만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합은 많은 것을 소유한 왕이었고 나봇은 율법에 의해 조상과 자신과 후손들에게 주어진 포도원만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포도원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수단이었고 후손들에게도 그런 용도로 물려주게 될 땅이었습니다. 아합은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부린 것이고 나봇은 밥줄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긴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불평등하고 못된 행위입니다. 이 일은 주전 850년경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3,00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이와 똑같은 일이 한국 땅에서 벌여졌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덕담을 듣고 부자 되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데 불행하게도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상황입니다. 용산 철거지구에서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특공대의 생명이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것입니다.
사건 개요는 다 아실 것입니다. 용산에서 세입자로 가게를 운영하던 이들 30여명이 삼성건설이 주도한 재개발지역 철거를 당하게 되었는데 적절한(들어간 돈이라도 제대로 받는)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철거지구 내 5층 건물에 들어가 점거농성을 시작하였고 농성시작 25시간 만에 경찰특공대에 의해 침탈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게 왜 나봇의 포도원 강탈사건과 같은 것일까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 자신과 후손들의 생계를 위해 소시민이 소유한 최소한의 소유물마저 집어 삼키려고 벌인 추악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아합왕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일이 3,000년이나 지난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아합왕은 그 스스로가 부자이면서 권력자였지만 지금은 부자인 거대기업과 친기업적 정부인 권력자들이 합작을 하여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이는 분명한 죄악이고 하나님도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권력의 철퇴를 맞는 것은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 반정부활동가, 야당인사, 반체제 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권력의 철퇴 앞에서 피를 토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희생자 중 어느 누구도 소위 반정부 반체제 운동권 선수는 없습니다. 그저 생계를 위해 가게 한 번 해보려다가 재수 없게 철거지역에 들어가게 됐고 이미 들어간 권리금마저도 보전해주지 않겠다고 하니 그리로 올라간 것입니다. 자신이 전에 당했던 억울한 처지와 똑같은 처지에 빠진 이들을 도와 자신과 똑같은 실패를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용산으로 들어간 이들이었습니다. 그는 전문적으로 반대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생활인이었습니다. 단지 재수 없게 철거예정지에 가게를 낸 것뿐입니다. 아니, 그의 가게가 철거예정지가 된 것일 뿐입니다.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저항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국가와 자본의 자본 확장계획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민이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은 반드시 하나님이 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갖고 싶은 것은 강탈이라도 해서 소유했던 아합이지만 그는 전쟁에 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그 집안도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정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억울한 한을 마음에 품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복수나 한풀이를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이 악행에 갚으실 것임을 의심하지 말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 성도들 중에 누구라도 가게를 개업했다가 언제 어떻게 재수 없이 이런 올가미에 걸려 철거민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겠구나!’ 무슨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어느 누구라도 재개발의 희생양이 되고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듯이 철거민의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주는 대로 받고 군소리 없이 꺼져주시거나 옥상에 올라가 불에 타 죽거나!
이런 상황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안됐다, 쯧쯧! 그냥 주는 대로 받고 나가면 목숨이라도 부지하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존재의 발판, 생활의 기반은 의외로 연약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 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번 희생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열심히 가게 내서 잘 살아보자고 이를 악물고 살아왔지만 하필 재수 없게 그 시간 그 장소에 가게를 내는 바람에 꿈은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개업하는 날 뿌듯한 마음을 안고 열심히 잘 해서 살림이 좀 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설날은 가족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날입니다. 그러나 설날을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맞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 우리도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에는 나와 우리 가족만 누리는 기쁨과 정이 아니라 고난에 처해 기쁨도 잊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정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가며 : 우리가 가족의 범위를 우리의 이웃에게까지 확대할 때에 모든 인류는 우리의 가족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성인, 노인이나 모두 가족이 되고 서로에게 의지가 돼주는 세상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설을 맞고 지내면서 품고 배우고 실천해야 할 귀한 복음의 원리일 것입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답니다. 통탄하는 심령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귀한 민족 명절에 악이 제하여 지고 정의가 세워지고, 용산의 철거민 희생자 유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고난당하는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작은 기도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하며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