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시는 위로 / 누가복음 7:12-16

by 좋은만남 posted Mar 0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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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

성경 ; 누가복음 7,12-16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들어가며 :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과 평화가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입니다. 봄기운이 퍼지면 가녀린 새싹들이며 새 잎들이 돋는데 그 색깔이며 그 자태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합니다. 매서운 겨울 동안 어디에 숨어서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그 생명의 기지개를 폅니다. 그래서 봄은 부활의 계절, 회복의 시기입니다. 매서운 추위도 밀어보내고 생명의 기운으로 온누리를 감사는 봄의 능력으로 우리도 생명력 넘치는 계절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은 고난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만 예수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성실하게 사순절기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들어가서 ; 예수님은 나인이라고 하는 나사렛 가까운 동네에로 들어가셨습니다. 나인에 들어가시자 곧 긴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자레풍습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비슷비슷할 겁니다. 장례행렬을 우두커니 지켜보니 이게 심상치 않은 장례식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죽은 이의 가족이라고는 여인이 하나였습니다. 그 여인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간신히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을 메고 갔다는데 그 관은 뚜껑이 없는 관이었던 듯 보입니다. 얼핏 스쳐본 관 안에 누운 고인은 젊은 남자였습니다. 그 남자는 아직 명을 달리하기에는 너무나도 젊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정황을 추측해보니 죽은 이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이 여인의 아들이었고 또 독자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도 없는 것을 보니 과부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유일한 피붙이, 모든 기대를 걸었던 외아들이 어쩌다 유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이런 장레식을 상상해본다면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갑니다. 젊은 사람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할텐데 죽은 이도 죽은 이지만 남겨진 여인은 이제 당장 어떻게 밥을 빌어 먹어야 할지도 난감한 그런 상황입니다. 그 여인은 아마도 외아들을 키우면서 여러 가지 희망을 함께 키웠을 것입니다. 과부라는 손가락질과 설움에 이 아들이 위로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들이면서 또 남편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사회생활을 하면 물질적 여건도 좀 펼 것이고 밑바닥을 기었던 사회적 위치도 어느 정도 회복될 것입니다.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물건 취급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왔을 여인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들도, 그 희망도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힘들고 무서운 것이지요.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 그냥 외면해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가엾게 여기셨다고 누가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의 눈에 모든 사람들이 다 가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힘없고 돈없고 능력도 없으며 건강까지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가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일이 예수님이 그들을 보면서 가엾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의 경우, 예수님의 눈에 특별히 더, 심하게 가엾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앞으로 나서십니다. 관에 손을 대십니다. 죽은 사람에 접촉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죄악이었고 부정한 행위였습니다. 민수기 19,11-13은 “11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 사람의 주검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 12 그는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 붉은 암송아지를 불사른 재를 탄 물로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자기의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부정하다. 13 누구든지 주검, 곧 죽은 사람의 몸에 닿고도 스스로 정결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주의 성막을 더럽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야 한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 몸에 뿌리지 아니하여 자신의 부정을 씻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부정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따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만이 예수님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고 그 연민과 사랑의 능력으로 명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되살아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생명을 되찾아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그 어머니, 그 여인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일이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정말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났는지, 혹시 상징적인 표현은 아닐는지... 그런 것은 제가 확신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위로는 힘이 있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연민과 사랑과 자비의 마음은 죽은 이도 살릴 만큼 크고 깊으며 진지하고 절절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에게도 응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니 외아들을 읽고 깊은 시름에 잠긴 과부의 모습과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외아들을 읽었거나 혹은 시름시름 생명의 촛불이 꺼져가는 외아들을 오열하며 바라보는 과부의 모습. 사실 우리는 가진 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 꼭 쥐고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서민들 일상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수십 년 고생해서 얻은 작은 집, 어떤 이는 월급 아껴서 대박의 꿈을 구며 큰 맘 먹고 투자한 펀드나 주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어떤 집은 자식이 재산이라고 자식 잘 가르쳐서 성공하는 것 보면 원이 없겠다고 할 수도 있겠죠. 지금은 없이 살아도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힘겨운 하루하루를 웃으며 버티는 이도 있고 살기에 팍팍할 때 그저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보면서 머리를 식히는 것에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말 마지막 하나 손에 쥐고 있는 것까지 빼앗아가는 시대라고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주식은 휴지가 됐고 화폐가치도 반토막이 났습니다. 자식 대학 보내려면 빚을 져야 합니다만 그나마 졸업해도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산과 들은 다 파헤쳐 운하니 4대강 정비니 뭐니 합니다. 가는 곳마다 건설공사이고 토목공사입니다. 그러나 서민의 생활은 점점 더 팍팍해지기만 합니다. 생계형 범죄자는 늘고 한탕을 노리는 극악무도한 범죄도 기승입니다. 돈을 노린 납치 감금은 늘어만 갑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줄 놓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가장 슬프고 견디기 힘든 것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절대적 절망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심을 믿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독자를 떠나보내고 시름에 잠긴 과부와 같은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 또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고 모른척하며 지나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목숨까지도 기꺼이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를 향해 ‘일어나라’고, 우리의 무너져 내린 희망을 향해 ‘일어나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죽은 아들이 일어나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희망도 그렇게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인간의 탐욕과 독점욕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열쇠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또하나의 큰 비극은 절망하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절망에 대한 열쇠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음까지도 이겨낸 부활의 주님이 바로 우리의 부활을 명백하게 예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결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오늘을 이기는 위로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나가며 : 모든 것을 잃었던 과부에게 꿈과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돌려주심으로 위로를 주신 예수님이 이제 우리에게도 똑같이 다가오십니다. 우리를 향한 연민과 애정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잃을 것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입니다. 이 위로가 우리 삶을 전혀 다른 곳, 바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 놓을 것을 믿습니다. 오늘 힘든 삶에 큰 위로를 받아 새 힘을 얻어 돌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며 믿음으로 위로를 얻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