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성경 ; 요한복음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들어가며 : 요즘 미쳤다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하는 노래도 있고 ‘미쳐 미쳐 미쳐’ 하는 노래도 있더군요. 미친 것이 정상인 것이 돼버린 세상인가 하고 혼란을 느낍니다. 날씨도 그렇지요. 지금이 3월 하순인데 추워서 여전히 두터운 옷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미친 세상이 된 것은 우리 자신이 정도와 순리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연도, 기후도 미쳐서 우리와 맞장을 뜨자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 미친 것 같은 세상을 하나님의 순리대로 바로 세우는 일에 신앙적인 순수함으로 나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는 크신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예전에 군인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었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당시에 ‘질투’라는 드라마를 했었습니다. 그게 방송되는 시간에는 막사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게 끝나는 시간이면 우리 중대 사람들이 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복도를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프로보다 더 인기 있던 프로가 있었는데 뭐인 줄 아십니까? 바로 우정의 무대입니다.
우정의 무대에서도 특히 인기가 있던 꼭지는 ‘그리운 어머니’였습니다. ‘엄마가 보고플 땐 엄마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나네요. 어머니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보고도 싶고요, 부르고 싶어요, 사랑하는 내 어머니’ 하는 오프닝 노래가 나올 때 이미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외축 외박이 자유로운 부대에 있어서 그닥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지만 논산훈련소에서 이 프로를 볼 때는 정말 달을 보니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그리운 어머니’ 꼭지는 가림판 뒤에 누구의 어머니인지 모르는 어머니 한 분이 나와 계시면 자기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장병들이 무대로 뛰어나와 뒤에 계신 분이 자기 어머니라며 그 이유를 대는 그런 순서입니다. 몇몇은 뒤에 계신 분은 자기 어머니가 아니지만 자기 어머니께 안 부 전하러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뒤에 계신 어머니가 제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중 오직 한 명만이 어머니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게 되지요. 진짜 아들과 어머니가 상봉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어머니라고 굳게 믿고 있던 그 사람들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어머니도 아닌데 자기 어머니라고 믿고 있던 그 친구들은 참 뻘쭘하겠다, 지 어머니 음성도 못 알아 들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이 많지요. 어떤 사실 하나를 놓고 친구와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심지어는 멱살잡이까지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둘 다 틀렸단 말입니다. 그때의 그 뻘쭘함이란! 그런 경험이 살다보면 한두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멱살잡이까지 했지만 그냥 뻘쭘하면서 끝나는 일이라면 그냥 한 번 웃고 잊혀질 해프닝이겠지만 만약에 인생을 거는 문제라면 어떻겠습니까? 잘못된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그것이 진리인양 믿으며 한 평생을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난도 이겨내고 혹은 타인에게 모진 짓까지도 하면서 살았다면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떨 것 같습니까?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되겠지요.
제가 아주 중요하게 또 빈번하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바로 알아야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으면 자기만 잘못 알고 잘못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큰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지금 감리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독회장 선거사태만 봐도 그렇습니다. 몇천 명 모아 목회하는 교회, 형제들이 다 감독을 역임했고 군인교회도 많이 지었고 등등만 봐도 이런 분이 감독회장을 하는 것에 무슨 하자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자기 담임목사라면 껌뻑 죽고 모든 것이 다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몸싸움도 불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옆에서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잘못 인도한 그 담임목사라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고 그것도 그냥 그렇게 따라가는 그 성도들도 참 어리석고 불쌍하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지 잘못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어쨌건 이 사람들은 반드시 망합니다. 같이 망합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마도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앞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면 우리를 인도하는 이는 제대로 볼 줄 아는 이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같이 구덩이에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의 양태들은 천지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을 영광에 쌓여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보면 예수님처럼 영광을 누리는 삶이 신앙의 전부가 되어 사람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고 부자가 되어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고래등 같은 집에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분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의 목표를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으로 잡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천지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교리적인 선포는 사실 우리의 신앙을 헷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의 아들, 그 자신이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철저한 인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만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인성만을 보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둘을 공평하게 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은 보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 강조해서 볼 때 사실 우리 내면에서는 심각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신이었다면 그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과 아픔, 그리고 죽음은 사실 쌩쑈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아픔을 느끼고 신이 죽겠습니까? 그저 십자가에 한 번 올라주지, 그저 한 번 아픈 척 해 주지, 그저 한 번 죽는 척 해 주지, 그저 한 삼일 동안 자는 척하다가 일어나 주지… 그러면 또다시 철저하게 사람은 하나님이 감독 연출하는 영화에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출연한 엑스트라로 그 지위가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셈입니다. 그런 신이신 분과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지 않는 신에게 어찌 신뢰감이 생기겠습니까? 그런 신이 햇던 일을 우리 같이 한심한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흉내나 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겠다느니 예수님을 따르겠다느니 예수살기를 하겠다니 하는 것은 다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 돼버립니다. 그저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 삶을 살기보다는 예수님을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그것이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신앙이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는 반쪽짜리 신앙, 아니 야고보서의 말을 따르면 죽은 믿음을 믿음이라고 붙잡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철저한 사람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사람이었고 또 철저한 사람이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아파하고 가슴 쓰라려 하시고 사랑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통해 예수님은 교리라는 치장을 당하셔서 우리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보기가 너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리로 치장된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가지셨던 예수님이 이 땅 한 가운데서 살아가셨던 그 모습을 찾고 구하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허공이 아닌 땅을 밟고 든든히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가며 : 예수님은 사랑을 정의하시면서 가장 큰 사랑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으로써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성정을 가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통해 이제는 친구이고 동지이고 또 놀라운 도덕성과 희생으로 우리의 스승이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예수를 만나고 인간이신 예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심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