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부활인가? / 누가복음 24:28-32

by 좋은만남 posted Apr 1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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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누구의 부활인가?

성경 ; 누가복음 24,28-32

28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29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들어가며 :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을 기념하는 복되고 기쁜 날이며 또한 기독교의 잔치날입니다. 잔치날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흥이 나는 날이죠. 우리 좋은만남교회도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 즐겁게 인사하고 흥에 겨워하는 날, 잔치날이 된 것 같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즐겁고 반갑습니다. 천국의 잔치를 즐기기 위해 초청 받아 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거룩한 자녀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넘치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기독교회의 최대의 축제는 바로 성탄절과 부활주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탄생과 관련된 날입니다. 생명을 얻고 새 생명을 누리는 날, 그것이 바로 기독교회의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생명을 소홀히 여긴다거나 생명을 아프고 상처받게 하는 일은 참으로 불경스럽고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것도 다시 살리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데 오늘날은 살아 있는 것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도 별로 가책을 받지 않는 세상이니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부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보고 우리 삶이 바로 부활 그 자체가 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변화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면 우리 한 번 아멘 해보겠습니다. 아멘 하신 분들은 정말 믿으신거 맞습니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장차 그렇게 다시 살아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이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차게 아멘을 했다고 해서 부활에 대해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애매모호한 사건이기 때문에 부활을 생각하는 모습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알 수 없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증거는 역사책에 나오지 않으며 단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서만 인정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이랑 꽤 많이 싸웠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2,000년 전이면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막 개국하던 무렵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 당시의 이야기들은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신기하고 놀라운 세계입니다. 태왕사신기를 보면서 판타지 소설을 보는 듯한 낯설고 이국적이면서도 또 고대의 신비감을 느꼈는데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은 이보다도 더 이전입니다.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나고 주몽이 해모수와 유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고 제주도 삼성혈에서 고 진 부 삼씨가 튀어나오고 등등 믿지 못할 신비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고 단지 전설이나 민담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아닌!

사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부활의 사건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믿고 고백하며 증인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멘만 잘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 자기가 생각해보고 동의하여 믿는 것과 그냥 등 떠밀려서 믿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지식 없이 마음로만, 가슴으로만, 기분으로만 믿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한 후에 불사신이 되어 이스라엘 해방 전쟁에 우두머리로 출정을 했다거나 부활한 몸을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내서 그 신기한 능력을 인정받았다든지 사람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축복을 구했다던지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도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이 그렇게도 고심해 마지않던 죽음을 이긴 놀라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회적 반향도 없었고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적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이 왜 의미가 있어야 합니까, 왜 오늘날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런 이익도 놀라운 일도 없는 예수님의 부활이지만 그 부활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매우 크고 놀라운 비밀이었고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부활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알려진 사람들, 그 이야기와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처럼 낙심하여 낙향을 하고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인 두 행인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시절 예수라는 사람에게 걸었던 희망과 기대, 그리고 욕망을 뒤로한 채 쓸쓸히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행로를 바꾸었습니다. 다시 그 사건의 현장, 희망이 잠시 멈추엇던 그 현장으로 가서 그 희망의 일을 이어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 있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 후에 예수의 추종자들까지 다 잡아들일까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는 이들, 절망과 두려움, 고통과 좌절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힘 있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였고 곧이어 그 자신들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공포와 좌절도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시체와 같이 웅크리고 숨죽이고 숨어있는 죽은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경험, 다시 살아나는 경험,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부활일까요? 오늘날 대부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세상의 이목이 모두 집중하게 될 놀라운 일이고 신문으로 소문으로 온 세계를 휘감았을 일이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증명된 적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부활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 가지 논쟁꺼리가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부활하였습니다. 무덤 같은 굴속에서 웅크리고 시체같이 널부러져 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용기를 얻고 희망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기도 합니다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계속 문제 삼고 시비한다면 좋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부활이라고요? 예, 예수님을 믿는 바로 여러분의 부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진짜라고 굳게 믿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 자신도 부활하는 체험을 했던 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였다 한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시체같이 웅크리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사람들을 힘 있게 하고 회복되게 하고 일어나 저항하게 하였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며 :
우리는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부활가지고 논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부활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끼리 아무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같이 암울하고 힘겨운 시대에 바로 내가, 바로 우리가 부활하여 일어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또 살아있는 사람처럼 깨어있는 사람처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일하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에만 집착하지 마시고 그거 자랑하지 마세요. 정말 자랑하기를 원하신다면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살고 죽은 자 같았지만 이제 생기 있는 삶을 사는 여러분 자신을 자랑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부활절 예배는 예수님의 부활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을 축하하고 증명하기 위한 자리임을 분명히 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격려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