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택의 기로
성경 : 요한계시록 8:6-10
6 그 때에 나팔을 하나씩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였습니다.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우박과 불이 피에 섞여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푸른 풀이 다 타버렸습니다.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에 사는, 생명이 있는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졌습니다.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큰 별 하나가 횃불처럼 타면서 하늘에서 떨어져서, 강들의 삼분의 일과 샘물들 위에 덮쳤습니다.
들어가며 : 어제 윤성근 성도님이 운영하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노래공연이 있었습니다. 책으로 여는 노래라는 주제로 스트링6라는 노래패가 와서 장장 2시간 반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솔직히 좀 지루하기도 했고 또 살짝 졸기도 했습니다만 좋은 노래를 듣고 왔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윤성근 성도님이 책을 소개하시면서 정태춘 씨의 노래를 맛깔스럽게 불러주셨는데 그 노래를 부르는 남편을 바라보는 성진경 성도님의 표정이 한 마디로... 행복하게 잘 사시고 이웃에게도 그 행복을 많이 나눠주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윤성근 성도님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을 소개하였는데 시간 되시면 꼭 좀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큰 착각 속에 빠져 살면서 큰 오류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진정한 풍요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아 알고 진리를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크신 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오늘은 환경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우리교회가 어쩌다가 환경운동 교회가 되었습니다. 유기농 먹꺼리, 초록가게, 이산화탄소저감운동, 생명밥상과 빈그릇 운동 등등 소위 환경운동 좀 한다는 교회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얼결에 시작한 일이지만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제도입니다. 적은 수고와 투자로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장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거기에는 아껴 쓴다느니 생산구조에서 오는 환경파괴이니 하는 것은 애초부터 고려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생산과 소비를 반복해야만 그 스스로의 논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개념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안에 사는 이들은 환경, 생태, 피조세계 등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이미 소비와 생산이 미덕인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지키고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은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며 또한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들어 지구기후 변화가 심상치 않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많이 듣게 됩니다. 2007년 9월까지 북극해의 빙하는 2005년에 녹았던 부분보다 더 많이 녹아내렸는데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주를 합친 면적만큼 줄어들어, 쇄빙선으로만 통과할 수 있었던 바닷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979년 9월에는 북극해의 얼음이 278만 평방킬로미터였는데, 2007년에는 165만 평방킬로미터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21세기 말에 북극에서 빙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는데 2007년 발표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그 해빙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2030년 여름이면 북극지역이 열린 뱃길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답니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 상승 때문에 초래되고 있는 기후변화는 북위 70도 이상과 극지방에는 강수량이 증가하는 반면에, 적도에서 북위 30도까지의 아열대 지역은 강수량이 더욱 줄어들어 사막화가 진행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7년째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어서, 인구가 밀집한 남동부의 농경지대(쌀, 목화, 감귤)와 목축지대가 유령 마을들(ghost towns)로 바뀌고 있습니다. 상수도 공급량조차 예년의 16%로 떨어졌습니다. 젖소와 육우 생산자들과 과일 농가들은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자살자가 속출하는 현실입니다. 연간 쌀 생산량이 백만 톤이 넘어 쌀 수출국이었지만, 최근에는 2만천 톤에 불과하여 쌀 수입국이 되었습니다. 결국 극심한 가뭄으로 기온은 더욱 상승하게 되었지만, 샤워를 4분 만에 끝내도록 시간이 지나면 수돗물이 끊어지는 장치가 폭발적으로 팔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황사’는 중국 북부 지역과 내 몽골, 고비사막에서 발원되어 바람을 타고 한반도로 이동이 되며 국민 건강과 각종 농축산물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몽골의 사막화는 범위가 더욱더 확대되어 몽골 전국토(90%가 사막화가 진행/전국면적의 약8%산림)에서 사막화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의 내용에 따르면 지구전체 표면의 약1/3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고, 매년 서울시의 100배나 되는 땅이 사막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들도 체감하고 있듯이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2030년경이면 우리나라가 사막화가 된다고 합니다. 지난 겨울의 가뭄이 적절한 예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내뿜는 이산화탄소량은 아시아 지역에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도 이제는 기상청에서 예측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 올해부터는 장마예보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마철 마케팅을 하던 업체들이 모두 난리가 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윤성근 성도님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이런 애기를 윤성근 성도님께 했더니 책을 많이 읽으신 분이라 내가 한 심각한 이야기도 있지만 낙관적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기후문제, 기후와 관련된 인간의 생존권 문제는 국제적 경제문제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윤성근 성도님 말씀을 듣고 내가 또 다른 이데올로기, 정치경제적인 좌파적 논리에 매몰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매우 시급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설령 망한다 해도 우리가 혹은 우리 자식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후변화가 심해져도 그냥 살 수는 있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냥 조금씩 더워지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해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가 사실은 날조된 선전선동이었다고 칩시다. 만약 날조였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지난 2-300년 동안 살아왔던 방식으로 그냥 살아가도 될까요? 화석연료를 마음껏 사용하고, 삼림을 남벌하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니고, 대운하도 파고, 이산화탄소도 아무런 부담 없이 배출하면서 그냥 지금처럼 살아가도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건 아니라는 대답이 아닐까요?
요한계시록이 종종 말세에 있을 재앙을 선포한 것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자세히 읽어보면 상당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느 시점에 우리에게 갑자기 닥치는 지구 멸망의 날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날은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결과일 것입니다. 성서는 인류가 미친 듯이 치달리고 있는 그 결과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날의 전조는 오늘 읽은 말씀대로 기후변화와 환경의 파괴로 인한 자연의 재해와 도전입니다. 자연재해가 그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충분히 상상하고 계시록도 해석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지키고 환경생태계를 가꾸는 문제는 언제라도 해야 할 일이고 또 인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미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방관하고 미뤄왔던 것을 과감하게 우리 자신, 모든 생명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문제로 인식할 것이냐, 아니면 또 모른 체하고 그저 우리의 편안한 일상으로 도피하고 편리를 위해 어떤 생명체들을 착취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나가며 : 신앙은 매순간 마주치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걷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인생의 매순간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에 대한 기준입니다. 나라는 틀, 인류라는 종의 틀만을 고려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생명을 소중하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래서인지 신앙이 깊어지면 시름도 깊어지고 고민도 많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고 피하지 못하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이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고난의 선택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는 선택입니다. 하나님까지도 행복해지시는 선택입니다.
이제 환경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남아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정직하고도 현명한 선택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의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몽골의 사막화 방지를 위한 기독인의 헌신을 요청하는 영상을 한 편 보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