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삶을 사는 법 / 전도서 12:1-4

by 좋은만남 posted Sep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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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청년의 삶을 사는 법(청년주일)

성서본문 ; 전도서 12:1-4
1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3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4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들어가며 : 반갑습니다. 한 달 간 자리를 비우고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반가워 해주시는거죠? 목사 팔자 좋다고들 생각하시겠지만, 맞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아무나 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교인들 만난 목사 팔자나 이렇지 별로인 교인들 만난 목사의 팔자는 장난이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좋은 목사이고 여러분도 좋은 성도들이십니다. 맞습니까? 좋은 성도들과 함께 목회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번 여행 길에서 새삼스레 확인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좋은 사람들의 좋은만남이 있는 좋은만남교회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어버이 하나님, 성자 예수, 성령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랜만에 설교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니 많이 어색합니다. 설교를 안 할 때는 그렇게 설교가 하고 싶더니만 막상 하려고 하니까 또 어렵고 힘들고 합니다. 다른 분들이 설교를 짧게 하셔서 은혜가 되었다고 하던데 저는 좀 길더라도 은혜로 받아주십시오.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감리교회가 9월 넷째주일로 1999년에 정하였는데 ‘청년으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인격을 함양시킴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만드는 청년이 되도록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일이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특송도 하고 잘 준비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어가서 ; 저보다 다섯 살 많은 목사님이 저에게 ‘요즘 애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제가 애들로 보이십니까? 나이가 마흔 하나나 먹었고 아들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라뇨?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덤볐습니다. 당시에는 잘했다고 뿌듯해했었는데 돌아서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나더군요.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데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애들 같은 모습을 보였으면 그랬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좋은 의미로 마흔 하나도 애들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십, 육십 먹은 분들도 청년으로 살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고수부지에 가면 요즘 자전거 타는 것이 유행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취미활동을 뭐를 해도 잘 차려입고 갖추고 하는 편이어서 자전거를 타도 타이즈를 입고 뾰족한 헬멧을 쓰고 머플러를 하고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몸매도 날씬한게 멋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 헬멧을 벗고 머리수건을 푸는데 보니... 머리가 백발입니다. 육십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노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십중 팔이나 구는 그런 분들이라는 겁니다. 솔직히 저보다 더 건강하고 날씬하고 젊게 사시고 또 실제로 젊어 보이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 육십 칠십 드신 분들이 청년같이 살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겁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해서 다 어른이 아닙니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다 청년도 아닙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젊게 살면 청년이고 늙게 살면 늙은이인 것입니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청년들은 진짜 청년같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장년들, 노년들도 청년같이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청년같이 사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 젊을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개역개정성서는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개역개정) 하라는 것은 바로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젊은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단순하게 보면 창조주를 기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것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이 바로 젊은이의 삶, 청년의 삶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청년의 때가 지나면 불가능하게 됩니다.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 삶이 고생스럽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고 곤고하고 낙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이가 백 살이 되었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나이가 스물밖에 안 된 한창 때라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늙은이요, 인생의 낙이 없는 것이고 인생이 피곤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선 우리가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뭡니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과 본능과 이성 안에 주신 최소한의 자연법칙입니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인간은 서로 소통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이를 논어에서는 정명(正名)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값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돈 몇 푼보다도 못하게 대접받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 인기, 권력, 특히 탐욕에 섭리를 팔아먹고 인간성을 팔아먹고 사는 것은 결코 청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도 복 타령만 하고 돈 많이 버는 것만이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청년이면 인생이 많이 남았지만 늙었다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제 청년의 풋풋함을 잃고 노쇠하여 소멸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와 여러분은 늙어가는 이 사회와 교회에 하나님의 섭리, 하늘의 뜻을 따라 삶을 보여주고 전하는 청년과 같은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청년과 같은 삶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삶입니다. 청년의 때가 지나면 늙고 노쇠하고 매너리즘에 젖는 인생이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쇠한 삶의 모습은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그렇지만 세상을 둘러보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귀가 먹어서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들리거나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오늘날 자연을 둘러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생이 심각하게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새소리, 풀섶에서 지절거리며 우짖는 벌레들의 날갯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고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 힘차게 대륙을 가로질러 날아온 철새들의 엄숙한 행렬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직 인간 자신에게만 유익한 돈, 물질, 물질적 가치라는 관점에서만 보니 강이 강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운하로, 4대강 사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꼭 봐야 알겠다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요?
인간이 타인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려고 할 때 관계는 깨지고 세상은 극단적인 경쟁의 아비규환이 됩니다. 인격을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할 때 인간생명조차도 그저 쉽게 돈으로 환산하려는 불순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용산철거민 참가가 아닙니까? 이제 열 달이 되었는데도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타인을 보지 못하는 늙어빠진 삶인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삶은 불행한 삶입니다.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불행한 삶입니다. 인생에 아름다움이 없으니 죽음과도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보고서 마음이 시원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간 산꼭대기에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환한 미소를 짓는 삶입니다. 풀벌레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고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도 비바람 이겨낸 그 삶을 보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삶입니다.
이웃을 보고 그 이마의 주름살에 맺힌 한과 고난으로 함께 아파할 줄 알고 사람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거룩함에 감사할 줄 아는 삶, 기꺼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줄 아는 섬세함과 민감함, 그리고 친절함이 바로 청년의 삶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며 : 이번에 여행을 돌면서 내 나이가 벌써 마흔 하나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이게 왠 고생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만난 사람들은 다 나에게서 젊음을 발견하고 부러워하더군요. 누구나 늙으면 가장 탐하고 부러워하고 후회하는 것이 바로 청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믿음입니다. 마음이 젊으면 청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청년의 삶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여유와 배려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청년의 삶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청년의 삶을 사시고 누리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