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고 다른 것들을 원한다고 아까 말했는데,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할 여건을 생정해 놀고서 행복을 기대하는 겁니다. 사실상 그건 우리의 친구나 우리의 하느님, 혹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너는 나의 행복이다. 만일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한다면 나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라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단서가 붙지 않은 행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매우 꼬집어 지적해서 그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해지기를 상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들에다가 우리의 행복을 걸도록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첫째로 그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자유를 원한다면, 기쁨과 평화와 영성을 원한다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적입니다. 나는 영성을 - 경건도 헌신도 종교도 예배도 아닌 바로 영성을 - “깨어남”이라고 정의해왔습니다마는, 누구든지 이 영성보다 더 실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나는 도전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비탄을 보고, 고독을 보고, 두려움을 보고, 혼란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의 갈등을,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을 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 모든 것을 제거할 한 가지 방도를 제시해 주었다고 상정해 봅시다. 이런 갈등과 혼란으로 인한 에너지와 건강과 정서의 엄청난 손실을 막을 방도를 마련해 주었다고.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고. 그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신, 큰 사업이 더 실제적이다, 정치가 더 실제적이다, 과학이 더 실제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땅 위에서 살 수 없을진대 한 사람을 달 위에 올려놓아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랴 그거죠.
그러니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첫째로 그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자유를 원한다면, 기쁨과 평화와 영성을 원한다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적입니다. 나는 영성을 - 경건도 헌신도 종교도 예배도 아닌 바로 영성을 - “깨어남”이라고 정의해왔습니다마는, 누구든지 이 영성보다 더 실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나는 도전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비탄을 보고, 고독을 보고, 두려움을 보고, 혼란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의 갈등을,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을 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 모든 것을 제거할 한 가지 방도를 제시해 주었다고 상정해 봅시다. 이런 갈등과 혼란으로 인한 에너지와 건강과 정서의 엄청난 손실을 막을 방도를 마련해 주었다고.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고. 그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신, 큰 사업이 더 실제적이다, 정치가 더 실제적이다, 과학이 더 실제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땅 위에서 살 수 없을진대 한 사람을 달 위에 올려놓아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랴 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