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조건 / 시편 8:1-4

by 좋은만남 posted Nov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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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사의 조건

성서본문 ; 시편 8,1-4

1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2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3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들어가며 :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며 진실된 삶을 살기 원하여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온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년의 한 여인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자 여인은 신을 만났습니다. 이것으로 이제 끝이냐고 물었더니 신은 아니라고 하며 그녀가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병이 회복됨에 따라 그녀는 병원에 더 있으면서 얼굴을 팽팽하게 하고 눈, 코 모두 예쁘게 수술했습니다. 아랫배도 집어넣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불러 머리도 염색했습니다.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니 이왕이면 예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달려오는 앰뷸런스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신 앞에 서게 되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30∼40년은 더 살 거라면서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뜯어고쳐서 못 알아 보았다."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인생 30년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그 시간을 사용할 것인가 하고요. 지난 인생 대부분을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물질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덤으로 시간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물질과 육신만을 충족시키는 생활을 할 확률이 높겠지요. 그러나 신앙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건강하게 지키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과 육신, 정신과 물질이 좋은 균형을 이루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신앙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과 육신, 정신과 물질이 좋은 균형을 이루는 삶이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처럼 감사가 절로 나오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보다는 불평과 비판, 비난이 더 많습니다. 물론 그 불평이 습관적인 것이거나 말도 안 되는 것들은 아니겠지만 특히 저같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감사보다는 불평과 찬양보다는 냉소가 더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저런 사람 안 닮아서 다행이다’라고 안도의 한숨 쉬지 마십시오. 그런 저에게 매주일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도 세뇌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엊그제 깜짝 놀라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시면 맨 앞에 실린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스스라치게 감사에 눈뜨다’입니다. 이 제목을 보는 순간에 제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소스라치게 불평에 눈떴었고 소스라치게 비판하는 일에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말 소스라치게 눈떠야 할 것은 불평불만,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감사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시편 23편입니다. 이 평안하고 넉넉한 시가 사실은 죽음을 넘나드는 험악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곧 이어지는 구절은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며 시인이 처한 긴박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까짓 시 한 편 봤다고 우리 삶이 확 바뀌거나 더 이상 비판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 한 편 봤다고 청년실업이 해소되고, 민족분단이 통일로 바뀌고, 국회의사당에서는 당쟁만 일삼던 국회의원들이 개과천선하거나 정부가 4대강 사업을 포기하고 용산참사로 희생된 유가족에게 보상해주고, 교회가 물량주의를 포기하고 복음의 진솔한 실천을 갑자기 할 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청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항상 너무 큰 것만 보고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기 때문에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만 우리의 마음을 두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눈을 뜨고 눈길을 돌릴 때마다 감사의 조건을 발견합니다. 온 땅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위엄이라는 것이 무슨 권위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 사람을 배려하시고 돌보시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땅에서부터 하늘 높이까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달과 별만 봐도 느껴지는 예민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신앙이라는 것이 특수계시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특히 과거의 무속신앙과 더불어서 무슨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무슨 죽을 병에 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나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요,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기독교에 개종한 경우에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평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고 특별하고 대단하고 한번 들었다 놓는 큰 사건이 있어야만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라니 이런 어리석은 신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불평과 비판에 너무 열을 올렸나봅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오늘을 간절히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하고 어제 죽은 이들에게는 오늘을 꿈입니다. / 아침에 출근하면서 시원한 공기를 폐속 깊숙이 마시면서 힘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까? 삼림의 남벌로 지구의 폐인 원시림이 파괴된다고 하는데도 아직 우리는 아침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자리를 주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문 중에 고문입니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할 때는 아무 일도 안 시킨다고 하지요.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면 성인병을 달고 살게 됩니다. / 함께 이야기와 삶을 나눌 존재들이 있다는 것에 흐뭇하게 웃은 적이 있습니까? 며칠 전이 노동자 전태일의 기일이었습니다만 전태일이 생전에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다방면에 다양한 교제를 나누는 친구와 가족이 있습니다. /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의 분명한 지침과 인도가 됨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표 없는 인생, 진리 없는 인생으로 우상과 물질을 숭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진리 정의 생명 평화를 추구하는 품격 높은 삶을 살 기회를 선택했고 또 얻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잊어버리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 일상적인 부분에서 발견하는 감사의 조건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대담론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여력은 있지만 실제적인 삶은 작은 부분들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삶의 작은 영역에서의 벌어지는 감동과 환희가 사실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은 세심한 배려가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큰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작고 섬세한 배려에 감동을 주고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우리 삶의 섬세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첫 데이트 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은 섬세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작고 섬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다 챙겨주시고 배려해주시는 분이심을 발견할 때 우리 삶은 비로소 감사의 조건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저절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하고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이 뭡니까, 뭐가 그리 대단하고 무슨 가치가 있습니다. 뭐 특별한 능력이 있고 뭐 그리 잘났다고 떠들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사람을 그처럼 섬세하게 배려하시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감동하게 하시니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나까짓게 뭔데 그렇게 잘 해주십니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뭐 대단한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저를 이렇게 섬세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시니 제가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줄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감사합니다!’

 

나가며 : 여러분들의 삶에 감사의 조건이 많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굵직굵직한 일들이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주 작은 일에서도 섬세하게 우리르 배려해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 까짓게 뭔데 이렇게 대해주십니까’하는 감동과 감사의 고백을 하실 수 있는 성도들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조건을 외적이고 물질적인 환경이 아닌 우리 삶을 둘러 싸고 있는 섬세한 배려에서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넉넉하신 사랑을 받고 사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