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
성서본문 ; 신명기 24,10-13
10 당신들은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담보물을 잡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11 당신들은 바깥에 서 있고, 당신들에게서 꾸는 이웃이 담보물을 가지고 당신들에게로 나아오게 하십시오. 12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면, 당신들은 그의 담보물을 당신들의 집에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13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
들어가며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찬양의 가사를 떠올리며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7일에 순천향 병원에서 용산참사 기독교 장레위로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용산에 별 관심도 없던 이, 솔직히 용산 참사의 반대편 쪽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가 와서 설교하려니 모두가 다 어색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 목사가 설교에서 말하기를 ‘아버지가 부산에서 철거민, 난민, 빈민들과 함께 목회하시면서 살았다, 그걸 보면서 자라왔는데 아마도 그런 기억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신 것 같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배 말미에 함께여는교회 방인성 목사가 나와서 오 목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여기에 세우신 음성을 들었다면, 2100억 원을 들여서 거대한 예배당을 짓지 말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듣기 바란다’고 말하였습니다. 분위기는 쫌 썰렁했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해준게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2100억원을 들여 거대하게 세워지는 성채와 같은 예배당에 계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사랑을 목말라하며 필요로 하는 곳에 계시지요. 거기에 만약 사랑의 나눔 정신을 가지고 찾아간다면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줄로 믿습니다. 나눔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과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께 바로 그런 사랑의 나눔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오늘 예배에 노숙인 생활을 하시다가 이제 재기의 의지로 새출발 하시려는 분들과 그들의 새출발을 돕는 분들이 함께 참석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혹시라도 제가 용어나 호칭, 그밖에 제가 잘 몰라 말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러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돈을 빌리는 일, 담보물, 그리고 겉옷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돈놀이를 하지 말자거나 고리대금업을 피하자는 얘기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초등학교에서 배우기를 의식주 세 가지가 필수조건이라고 배웠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여하한 한에서도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입니다. 국민은 이 기본적인 것을 제공 받을 것을 기대하고 세금 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국가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박탈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입고, 먹고, 살 수 있는 주택이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 나라의 정부는 사람들을 계속 주책에서 몰아내고 거주지를 박살냈습니다. 7-80년대에 특히 빈민들에게 강요된 이 폭행은 상계동에서 목동, 부천으로 이어졌고 도시빈민들은 결국 집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의 주택강탈은 빈민이라는 계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민층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작년 1월 20일에 발생한 용산참사가 가장 대표적이면서 두드러진 일입니다. 희생자 중 한 분은 1-2억의 보증금을 내는 50여 평 복집을 운영했다고 하니 소위 도시빈민은 아닙니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재개발이라는 폭력 앞에 희생되었으니 이제는 서민이라고 혹은 빈민층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어느 누구라도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처지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절대로 겉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 겉옷을 담보로 잡더라도 꼭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은 옷이지만 집에서는 이불이고 집 밖에서는 집입니다. 기온차가 심한 곳에서 다용도로,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겉옷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담보로 가져왔습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생존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것을 담보로 가져오겠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 사람에게, 그 가난한 사람에게, 그 생존권이 보장 받지 못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그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고 그 생명이 유지되도록 하는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홈리스! 예수님 당시에도 홈리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가난 때문에 빼앗기고 종살이를 하게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는 구약 예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른지? 참으로 힘겨운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홈리스가 되는 것이 개인적인 게으름과 나태함, 무능력에 기인한다는 착각에 우리 스스로가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현대사회라는 아구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돌리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희생자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아픔은 그저 그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최고로 문명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상은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하는 최고로 야만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십 층의, 수십억 원이나 하는 화려한 아파트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지만 몸을 눕힐 만한 두어 평의 주거지도 없어 거리를 헤매는 이들도 많습니다. 겉옷을 하루만 빼앗아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텐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 지 걱정입니다.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며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만약 우리가 거리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현대사회의 악한 구조로 인해 재수 없게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라는 생각만이라도 할 수 있다만 가장 큰 일을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되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사랑하시되 삶의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힘을 내는 분들을 초대하였습니다. 홈리스행동의 임재원 학생회장님께서 삶의 이야기를 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