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무런 조건 없이!
성서본문 : 로마서 3:21-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들어가며 : 추운 날이 계속됩니다. 폭설에 한파에, 모두가 다 진저리를 칠만큼 매섭게 추웠던 몇주였습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던 한기도 이제 한풀 꺾였습니다. 물론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시 또 한파가 올 것이고 우리는 어깨를 움츠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때가 차면 동장군도 물러갈 때가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따뜻한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거뜬하게 견뎌내는 줄로 믿습니다. 이 추운 날씨를 보면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끝이 있으며 아무리 힘겨워도 반드시 희망이 온다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이 깨달음으로 우리의 인생이 한층 더 성숙해지고 겸손해지며 도한 담대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끔 집에 있다 보면 무슨 확성기 소리가 들립니다. 어느 지방에 있는 농협에서 나왔다면서 소비자에게 홍보차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무료로 나누어주려고 왔다면서 몇 시까지 어디론가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온 것이 많지 않으니 늦게 오면 받을 수 없다고 자상한 협박까지 합니다. 그걸 들으면서 ‘정말 공짜로 줄까? 이런저런 설명을 또 한 참 하겠지? 어쩌면 그걸 미끼로 더 비싼 것을 팔아먹으려는 수작이 분명해!’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한 번도 나가서 줄을 서보거나 설명을 듣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물건을 받아본 적도 없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공짜로 그것을 아무 조건 없이 줄까요? 혹시 그렇게 받아보신 분은 계신지요?
한번은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수조를 얹은 활어회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저에게 뭔가 말을 합니다. 활어를 싣고 왔는데 팔지 못해서 버리려고 한다고 좀 나누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회를 좋아하던 터라 혹하는 마음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구구절절이 얘기하더니만 돈을 주고 사라는 것입니다. 역시나! 그래서 안 사겠다고 하니까 인상을 쓰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다고 제가 거기에 쫄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골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종 무슨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십니다. 그 관광버스는 무슨 건강에 좋은 제품을 판다면서 음식도 제공하고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대접하고는 얄팍한 상술로 결국 몇 십에서 몇 백까지 하는 값비싼 물건을 안겨 보냅니다. 돈을 조금만 투자해도 많은 이익금을 얻을 수 있다면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다단계 회사도 우리 주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인생의 작은 경험들이지만 그것을 보니 역시 어른들 말씀처럼 공짜는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무런 값도 없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무런 자격요건을 갖추지 않아도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값없이 구원을 누리는 은총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 은총을 입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한 가지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말같이 쉬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믿음 없음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 산에 올라가 산기도를 하고 밤마다 예배당에서 철야기도를 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의 속내용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동정녀에게 태어났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리셨으며, 언젠가는 다시 올 것임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서의 윤리적인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애쓰며,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믿는다고 하는 말이 생각보다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것도 쉽지 않은 것들이며 우리의 이성으로도 쉽게 용납이 안 되는 내용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속은 것처럼 허전한 마음마저 듭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내적인 논리는 기독교인이 되는 조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실행하는 삶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 구원을 주시는 거래의 관계로 뒤바꿔 놓아 은총이라는 개념이 전혀 은총이 아닌 계약조건이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신 걸까요? 과연 하나님이 활어회차 운전수처럼 마치 공짜로 줄 것처럼 접근하더니만 우리가 지기 어려운 짐을 덜컥 우리의 어깨에 걸쳐놓으신 것일까요? 공짜로 값이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결국 우리를 홀랑 벗겨 먹는 영적 사기꾼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기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조건을 내미시면서도 아무 조건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쉽게도 그것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지닌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다는 기독교가 교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보이는 언어도단이며 모순이고 한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신봉하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교리에 매여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된다는 조건을 만들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더 이상 은총이 아닌 치졸한 상술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라는 찬송을 좋아합니다. 그 찬송을 좋아하는 이유는 후렴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라는 가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 거칠었던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여러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도 하고 못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선배들에게 대들기도 많이 했고 후배들을 괴롭히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제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가 된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고 탈도 많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참 많이 사람 됐다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스스로 생각해보거나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목사라는 직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갈 길이 먼 사람입니다. 교우들은 나를 좋게 보고 대단하고 성직자로 볼지 모르겠지만 나의 내면에는 여전한 부끄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선배들 중에는 여전히 대가 센 나를 꺼려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목사이니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저는 믿음이 약하거나 거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내가 하나님께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이런 못된 놈이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하실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알았다. 기다렸다. 넌 이미 받아들여졌단다’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디 보자, 네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네 믿음 지수가 얼마나 되는지 일단 확인 먼저 하고나서 생각해보자’고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꼴통이면 꼴통대로, 바보이면 바보대로, 악인이면 악인인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받아주셨습니다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 없이 계속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믿음이 있는지를 검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이고 은총인 것입니다. 평가한 후에 주어지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보상에 매이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상이 아니라 은혜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믿음은 그 이후입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깨달으면 믿음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선행은총’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즉 선행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큰아들 빈이가 학교에서 기말시험을 보는데 전과목 100점을 받으면 제주도에 데리고 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마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역시 택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100점은 한 과목인가 그랬고 94점인가도 있고 80점대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간과 물질의 여유만 있다면 제주도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제 마음에는 80점짜리도 있으니 너는 이 집에서 살 자격이 없으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같이 후진 아빠도 비록 아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아무 조건 없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 하늘 어머니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걸고 우리를 만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여러분을 만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며 : 우리 좋은만남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라는 조건으로 우리를 만나시겠다고 협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헛된 하나님의 모습이 용납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 거룩하신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에 감동하여 우리 삶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