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너는 누구냐?
성서본문 : 마가복음 8:29-33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들어가며 : 신앙이 매우 깊고 신실한 목사님이 등산을 갔다가 불행하게도 실족하여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떨어지는 도중 절벽의 나뭇가지를 가까스로 잡아 매달리면서 추락은 면했습니다. 밑에는 아직도 까마득한 낭떠러지...나뭇가지를 잡은 손도 힘이 점점 빠져가 다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하나님, 저를 이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면 남은 여생은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하고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절벽위에서 인기척이 나자 그 목사님은 드디어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마음에 매우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위에 계신 분 !! 사람 좀 살려 주세요!!!” 그러자 들려오는 말,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란다. 아무 걱정 말고 네가 잡은 그 나뭇가지를 놓거라. 너는 죽지 않고 생명을 구할 것이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네? 뭐라고요? 정말 하나님이세요? 이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잖아요!!” 그때 다시 들리는 말, “왜 나를 못 믿느냐. 나를 믿고 손을 놓아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목사님은 잠시 잠잠해졌습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목사님은 다시 외쳤습니다. “거, 위에 다른 사람 없어요? 좀 살려 주세요 !!”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이 농담 속에 나오는 목사보다도 더 크고 든든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어제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 댁에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좋은 분이라 그런지 하객들이 많이 왔습니다. 청첩도 안 하셨는데 하객이 생각보다 많이 와서 자리가 모자랐습니다. 디너쇼 같은 식으로 예식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식도 예배식으로 하다 보니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드디어 예식이 끝나고 식사로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전채로 샐러드와 스프 등이 나왔습니다. 아침도 안 먹고가 배가 고프던 차에 음식을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샐러드가 나와서 한 포크로 찍어 입에다 넣는 순간에 비로소 그 채소의 보드라운 느낌과 향이 내 혀에 느껴졌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랬는지 좀 식어서 ‘맛 이 별로’라면서 또 먹어치웠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날 점심을 먹은 것이 누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음식이 나오면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먹었을뿐 그것이 어떤 사람이 먹은 것인지 내가 먹은 것인지는 도무지 구분이 안 갑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그날 나는 야채 샐러드만은 분명히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을 살아갔던 것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내가 산 것 같지만 정말 한 순간 한 순간을 내가 살아왔던가 하고 물으면 솔직히 대답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이 자기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살아지는 것이지 우리가 산다는 느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날더러 누구라고 하든가?’ 그러자 제자들은 ‘엘리야, 세례요한, 예언자 중 하나’라고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 있게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좀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딱 맞는 정답을 베드로는 맞추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곧 당하게 될 고난에 대해 말하자 모범답안을 맞췄던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항변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멱살이라도 붇들고 대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뭣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 당신을 따라다니는데 당신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고난당하고 죽는다는 말이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는 안 된다’ 뭐 이런 얘기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 출세와 명예와 성공만 생각하는 사탄이며 저리 꺼지라는 폭탄선언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했지만 문제는 그 대답을 하는 베드로 자신은 정작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예수 앞에 있는 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유행과 풍조에 떠밀려 내려가는 욕망에 가득한 한 속물이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을 지껄이는 자기 없는 베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 정체성이 빠져 있을 때 베드로는 베드로가 아니라 사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질문은 ‘너는 누구인데 나를 그리스도라고 하느냐’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너 자신은 과연 어떤 존재이고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체험하여 그렇게 확신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정말 매 순간을 여러분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게 도식화된 세계 안에서 고민이나 결단 없이 그저 살아가는 일에 길들여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으로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근무시간을 채우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하고 퇴근하고, 저녁에 약속이 있으면 나가서 밥 먹으면서 떠들고, 밤이 되면 들어와 잠을 잡니다. 태엽을 감아 놓은 자전거 탄 인형이 계속해서 맴맴 돌다가 태엽이 다 풀리면 멈추는 것처럼 기계적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그저 강물이 흘러가는데 그냥 실려가는 물방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 한 순간 한 순간을 내 삶이고 내 시간으로 만드는 노력과 깨달음을 우리 삶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나 아닌 그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겨울에는 여자들이 짧은 치마에 레깅스나 스타킹을 신고 어그부츠를 신는 것이 유행입니다. 시내에 나가보면 이쁜이나 못난이나 날씬이나 뚱뚱이나 다 그 차림새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 어머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모나 조부모나 형제자매나 선생이나 영향력 있는 어떤 인물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것이 정말 그 자신의 고백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태엽인형의 고백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그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와 사람 인자를 합쳐 만든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그리스도 혹은 예수님과 사람, 즉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에서 그리스도가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역시 나 자신이라는 정체성, 나 자신이라는 존재감이 빠진다면 그것을 결코 올바른 고백이나 정체성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에 대해서는 잘 고백하지만 정작 오늘 이 땅을 딛고 서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무례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말을 번드르르하게 예수님에 대해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사탄아, 내 앞에서 썩 꺼져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껍데기 고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서, 나의 존재에 대해서, 나의 정체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매순간을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헌신은 자연스럽게 믿음이 되고 신앙이 되고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나가며 : 한국교회가 7-90년대에 엄청난 급성장을 하고 매주 금요일 밤마다 모여서 철야기도를 하고 산에 올라 산기도를 하고 제자모임에 기도모임에 온갖 신앙프로그램들이 돌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만 찾다보니 진솔한 자신의 고백과 기도를 드리지 못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 모양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는 찾지 못한 채 정답을 말하는 것은 결코 정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의 대답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신앙적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고 자기로써 살아가는 훈련과 노력은 신앙적 헌신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너는 대체 누구길래 내 앞에 있느냐?’는 뜻임을 기억하고 온전한 우리 자신을 찾고 우리 자신을 발견하여 예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의 고백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복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