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65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를 벗겨라

이제 또 다른 실습을 제안합니다. 종이 한 장에다 간단히 여러분 자신을 묘사하는 글을 적어 보시겠습니까? 예컨대, 사업가, 성직자, 인간, 가톨릭 신자, 유다인 등 아무 거라도.
쓰시는 걸 보니 자녀가 많다, 추구하는 순례자다, 유능하다, 원기왕성하다, 참을성 없다, 중심이 있다, 융통성 있다, 중재자다, 연인이다, 인류의 일원이다, 지나치게 조직적이다 등등이 더러 보이는군요. 여러분 자신을 관찰한 결과라고 난 믿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이.
그런데 보십시오. 여러분은 ‘나’가 나를(‘내 것’을) 관찰하게 된 겁니다. 내가 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건 철학자, 신비가, 과학자, 심리학자들의 호기심을 끌기를 멈춘 적이 없는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동물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럴 수 있으려면 상당한 지능이 요구되겠죠. 내가 지금 제시하려는 건 형이상학이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평범한 관찰이며 상식입니다. 동양의 위대한 신비가들은 실상 ‘내 것’이 아니라 ‘나’에 주목합니다. 더러 이 신비가들은 우리가 먼저 사물과 더불어, 사물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시작하고, 그러고는 사고(‘내 것’)에 대한 자각으로 옮겨 가며, 마지막으로는 사고자에 대한 자각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사물과 사고와 사고자. 우리가 정작 찾고 있는 것은 사고자입니다.
사고자는 그 자신을 알 수 있을까요? ‘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신비가들은 ‘칼이 칼 자신을 자를 수 있느냐?’고 응답합니다. 이빨이 이빨 자신을 깨물 수 있느냐? 눈이 자신을 볼 수 있느냐? ‘나’가 자신을 알 수 있느냐? 그러나 바로 지금 나의 관심사는 무한히 실제적인 일, 즉 ‘나’가 무엇이 아님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되도록 천천히 진행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니까요. 여러분의 관점에서 보면 무섭고 소름 끼칠 노릇이죠.
들어보십시오. ‘나’가 나의 생각, 내가 하고 있는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생각이란 오고 갑니다.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닙니다. 나의 몸입니까? 매분 우리 몸에서는 수백만 개의 세포들이 달라지거나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칠 년쯤 지나면 그 전에 살아 있던 세포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죠. 세포란 오고 갑니다. 생겨났다 죽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의 몸입니까? 명백히 아닙니다.
‘나’란 다른 것이고 몸 이상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몸이 ‘나’의 부분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변하는 부분입니다. 계속 변하죠. 우리는 몸을 항상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몸은 항상 변합니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라는 이름을 늘 사용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를 이루는 물은 항상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늘 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똑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름은 어떻습니까? 내 이름이 ‘나’입니까? 분명히 아니죠. ‘나’가 달라지지 않고도 이름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내 성공은 어떻습니까? 내 신념은? 나는 가톨릭 신자다, 나는 유다교인이다 합니다. 그것이 ‘나’의 핵심부분일까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면 ‘나’가 변합니까? 새로운 ‘나’를 가지는 겁니까? 아니면 변화한 같은 ‘나’? 달리 말해서 이름이 나의, ‘나’의 본질적 부분일까요? 종교가 ‘나’의 본질적 부분일까요? 아까 소년에게 ‘네가 속한 교파는 장로교니?’라고 묻는 소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어떤 이가 또 다른, 패디라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벨파스트(북 아일랜드의 수도)에서 길을 거닐던 패디는 뒤통수에 총구가 누름을 느낍니다. 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카톨릭이냐, 개신교냐?’ 패디는 재빨리 생각을 해내야 합니다. ‘유다인이오.’ 그러자 들리는 목소리. ‘벨파스트 시내에서 내가 가장 운 좋은 아랍인이로군.’ 딱지들이 우리에게 그처럼 중요한 겁니다.
이를테면 나는 ‘공화당원이다’ 했을 때 정말 그럴까요? 정당을 바꾼다고 해서 새로운 ‘나’를 가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겁니다. 바꾼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적 확신을 가지는 과거의 똑같은 ‘나’가 아니겠어요? 또 어떤 사람 이야기도 기억납니다. ‘공화당에 투표할래?’ ‘아니, 민주당에 투표할 생각이야. 아버지도 민주당원이셨고,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그러셨거든.’ ‘그건 미친 논리야. 내 말은, 만일 자네 부친께서 말 도둑이셨고,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그러셨다면 자넨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야.’ ‘아, 그러면 난 공화당원이 되겠지.’
우리는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딱지들에 반응하느라 우리의 삶을 너무 많이 허송합니다. 딱지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겁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흔한 딱지들이죠. 어떤 사람이 신부에게 가서 말합니다. ‘신부님, 내 개를 위해 미사를 드려 주십시오.’ 신부는 화가 납니다. ‘뭐라구요, 개를 위해 미사를?’ ‘내가 귀여워한 개라서 미사를 드려 주려고요.’ ‘여기 우리는 개를 위한 미사를 드리지 않아요. 길 아래쪽 다른 교파에 가 보구려. 그들이 그런 예배를 할 수 있을지 물어보라구요.’ 그 사람이 떠나면서 말합니다. ‘안됐군요. 난 그 개를 정말 사랑했는데. 미사 헌금으로 백만 달러를 봉헌할 작정이었죠.’ 그러자 신부의 말. ‘잠깐, 당신은 그 개가 가톨릭이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딱지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와 관련된 의미에서 이 딱지들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우리가 집착하는 딱지들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딱지는 ‘내 것’에 속합니다. ‘내 것’은 항상 변하죠. ‘나’가 변한 적 있습니까? 관찰자가 변한 적 있습니까? 사실은 어떤 딱지들은 (아마 인간은 제외하고) 생각하든 그것들은 ‘내 것’에 적용되어야죠. ‘나’는 이런 것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내 것’을 관찰할 때는 ‘내 것’과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내 것’에는 고통이 있고, 그래서 ‘나’를 ‘내 것’과 동일시할 때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렵다거나 아쉽다거나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돈, 이름, 국적, 인물, 친구 등등과 동일화하지 않을 때 ‘나’는 결코 그럴 우려가 없습니다. 매우 활기 있어질 수는 있지만 위협당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이나 염려나 불안의 원인이 되었거나 되고 있는 것을 무엇이든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그러한 고통 저변의 갈망을 포착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는 여러분이 매우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무엇일까요?
둘째, 그것은 단순한 갈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동일시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러분은 자신에게 “‘나’의 행복, 거의 ‘나’의 존립까지 이 갈망과 결합되어 있다”고 말해온 셈입니다. 모든 고통은 무언가를, 그것이 내 안에 있든 내 밖에 있든, 나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야기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