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십시오] 행복은 어디서 오나? -2

by 좋은만남 posted Mar 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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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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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서 오나? -2

사람다운 삶이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에서만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속에서 명예란 별것 아님을 이해하게 돕니다. 그것은 사회적 인습, 그뿐이죠. 그래서 신비가들과 예언자들은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았죠. 명예나 치욕이나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들은 딴 세상에, 깨달은 사람들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성공이나 실패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나도 바보 너도 바보인 것을,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는 태도였던 겁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말했죠. “인간에게 가장 힘든 세 가지 일은 물질적 위업이나 정신적 성취가 아니라, 첫째로 미움을 사랑으로 갚는 일, 둘째로 쫓겨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일, 셋째로 자기가 잘못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내 것”들과 동일화하지 않았다면 이번 일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내가 틀렸어! 네가 날 더 잘 안다면 얼마나 자주 내가 그릇된지 알겠지. 바보에게서 무얼 기대해?”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내 안에 있는 이런 측면들과 동일화하지 않았다면 네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는 겁니다. 처음에는 구태의연한 조건화가 들쑤시고 우울해지며 불안할 겁니다. 탄식하고 울기도 할 겁니다. “개치기 전에 우울하더니 깨친 후에도 계속 우울하구나.”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우울과 동일화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아십니까?

자신에게서 나와 그 우울을 바라보며 동일화하지는 않는 겁니다. 그것이 사라지도록 무얼 하지 않고, 그것이 거쳐 가며 사라지는 동안 자신의 삶을 마냥 기꺼이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사실 아직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이죠. 그럼 불안은? 불안이 와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불안하나 근심하지 않는 겁니다.

역설이 아닐까? 구름이 몰려오도록 기꺼이 내버려 두는 겁니다. 싸울수록 그것에 더 힘을 부여할 테니까. 기꺼이 마치; 그것이 그냥 지나치는 것인 양 관찰하는 겁니다. 불안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미친 짓이 아닐까? 우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빠지지는 않는 겁니다. 전에는 행복이란 흥분된 감동이나 짜릿한 지분이라고 생각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우울을 가져오는 원인이죠. 누군가 그걸 말해 준 게 아니던가? 짜릿한 감동 좋지 그러나 바로 다음 차례 우울로 가는 길을 예배하고 있는 겁니다. 짜릿한 감동을 느끼지만 그 뒤의 불안을 맞아들이는 겁니다. 어떻게 이 행복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중독이죠.

세상 사람들 중에 중독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평균적인 사람들이라면 별로 없을 겁니다. 매우 드물겠죠.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자를 은근히 멸시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도 바로 그들만큼 중독되어 있을 겁니다. 내가 이 새 세상을 처음으로 언뜻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무섭도록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홀로 된다는 것, 누구나를 자유롭게 떠나보내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 아무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나를 -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 사랑한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를 이해한 겁니다.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비추고 선인이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비가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장미가 “착한 사람들에게는 향기를 풍기겠지만 나쁜 노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전등이 “이 방의 착한 사람들에게는 빛을 비추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혹은 나무가 “내 아래에서 쉬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그늘을 주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처음부터 죽 성서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기에 시선을 준 적이 없는 것은 우리 문화가 연가와 연시들을 통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과 반대됩니다. 욕망이며 통제며 소유죠. 속임수고 두려움이며 불안이지 사랑이 아니죠. 행복이란 부드러운 낯빛. 휴일의 휴양지라나요? 그런 것들이 행복은 아니건만 우리는 행복을 우리 안팎의 다른 것들에 매어 놓는 교묘한 방법들을 가졌습니다. “나는 내 노이로제가 끝날 때까지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고요?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죠. 여러분은 바로 지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노이로제를 지닌채로. 더 기쁜 소식을 원합니까? 인도에서 “아난드”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데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을, 지복을 체험하지 못하는 데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또는 집착이 그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복을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가지지 않은 것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여러분은 지복에 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문외한들, 굶주리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일상적인 지혜를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복된 소식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받아들일 몫이라고. 그러나 누가 들어요? 아무도 흥미가 없죠. 차라리 잠들어 있고 싶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