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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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1일(사순절 제5주) 좋은만남교회 낮예배 설교


만남, 그 길들여짐의 여정

이관택

성서 본문: 사도행전 3장 1~8절

1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5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각자 평범하고 조금은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매일 매일 그 날이 그날이요 그 일이 그 일인 것 같은 시간들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하지만 자세히 돌이켜 보면 누구에게나 '운명의 그 날'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날,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잘했구나 싶게 여겨져서 그 날을 기념하여 찍은 사진 속의 내가 너무나 그리워지는 바로 그 날, 어느 날 갑자기 새벽안개처럼 들이닥쳐서 내게 기쁨을 주고, 의미를 주고, 나의 인생을 지금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도한 그러한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우리의 기억을, 또 그 때 찍은 사진 속의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내 옆에 함께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지요. 여러분에게 또 나에게, 그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그 사람과의 만남의 순간, 그 만남은 어떻게 기억 되고 있나요? 한 번 각자의 그 날을 떠 올리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이 사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 사람에게는 바로 오늘이 운명의 그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사건을 체험하고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켰던 베드로, 그는 그의 동료 요한과 함께 기도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유독 아름다운 장식이 눈길을 끄는 문을 지나갈 때, 여느때 처럼 익숙한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앉아서 온몸을 땅을 향해 엎드리고, 손을 벌리며 구걸하는 장면입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요. 아름다운 문 앞에 있는, 그것도 거룩한 성전 앞에서 더러운 거지행색의 구걸하는 사람이라니...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지난 해 말 캄보디아에 방문했을 때 세계적인 문화 유적지인 앙코르와트 앞에서 원달라를 외치던 꼬맹이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부모들이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자식들에게 관광객들을 상대로 앵벌이를 시키는 그 모습, 지금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가슴 아팠던 그 순간, 당황하며, 약간은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일행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때 우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였지만, 그래도 성서 속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의 주변 이웃들은 최소한의 도움을 주었다고 성서는 이야기하고 있지요. 아마도 이 아름다운 성전의 문 앞에 그 사람이 그 곳에서 구걸하기 시작한지가 상당히 오래된 듯합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다는 소문 아닌 소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생계를 위해 매일 그 성전의 문 앞에 데려다 주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비단 오늘 뿐만은 아닐 터인데, 오늘은 뭐가 다른지 누추하게 앉아서 구걸하는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다른 때와 뭐가 달랐을까? 아마도 지난 오순절 밤 그들을 충만케 했던 성령의 인도하심이 그들의 안목과 그들의 삶 자체를 바꿔 놓아서인지, 그 순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고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여 그 곳에서 구걸하고 있는 그 사람은 저 낯설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을 줄까 기대하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그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당신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성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평생을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에게 기생하는 짐짝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될 줄 알았던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 그 순간 바로 '걷지 못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미 자신이 불리워졌던 이름은 과거의 이름일 뿐 지금은 존재 자체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걷지 못했던 사람, 다시 말해 지금은 걸을 수 있는 사람! 베드로와 이 사람의 만남은 이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기적 같은 사건으로 인해 베드로는 결국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의 미움을 사서 그들에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주목할 것은 그 어려움의 순간, 베드로 옆에는 바로 성전 미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게 된 그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공동목회를 시작하는 좋은만남교회의 담임자로서 처음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찌보면 베드로를 만나 걷게 되고, 뛰게 되며 삶이 바뀌는 경험을 한 그 걷지 못했던 사람, 아니 지금은 걸을 수 있는 그 사람만큼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도중 내게 허락된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맞이하는 지금이,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저희 교회의 이름 '좋은만남'이 너무 좋습니다. 사실 이 교회에 오게 된 것도, 집도 가깝고, 방현섭 목사님과의 인연 때문도 있었지만, 순전히 '좋은만남'이라는 교회 이름이 끌려서 오게 된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진수가 바로 '만남'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들이 하나님 그 '자체'를 만나는 과정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몸소 안고 살다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을 경험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 아닙니까? 또 우리의 선생되신 예수께서 앞서 가신 그 길, 선생이 뭡니까? 먼저 살았다는 뜻이지요. 선생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그 길을 함께 가는 동행자들을 만나는 과정 아닙니까? 이 만남의 여정이 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바로 이 만남의 여정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부활을 기대하는 사순절기를 보내는 지금,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만남'은 무엇일까요?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만남'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시공간입니다.

너와 내가 존재하는 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 이것을 우리는 흔히 관계라고 이야기 합니다. 만남은 바로 이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시공간 말이지요. 지난번에 제가 간사 일하고 있는 한기연에서 [연애의 모든 것]이라는 연애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했었습니다. 거기엔 아이러니 하게도 연애를 거의 한 번도 안 해본 우리 박준수 총무님도 강사를 했지만요. 진짜 건강하고 좋은 연애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라는 공동의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위하고, 보듬고, 그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서로를 직접적으로 겨냥한다면 그것이 집착이 되기 쉽고, 결국 그 연애 관계가 깨지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 때, 나에게 남는 것이 아픔 밖에는 없을 텐데, 그 관계를 두 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든다면, 헤어지게 되어도 그 과정 속에서 이미 많은 것을 누렸기 때문에 그 관계 자체는 남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만남이 있으면 필시 헤어짐이 있게 마련이거든 건강한 관계는 바로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라는 보물을 잘 가꾸고 아끼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한 번 관계를 한 번 만들어 볼까요?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알고 계시죠? 이 이야기의 백미는 여러 별을 전전긍긍하며 여행하던 어린왕자가 일곱 번째 별 지구에서 드디어 여우와 만나는 장면일 것입니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이 뭐지?" 하고 여우에게 묻습니다.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어린왕자에게 말하길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길들이기 전에 나는 너에게 수많은 여우들 중의 한 마리일 뿐이지만 니가 나를 길들이면 나는 너에게 특별한 '여우'가 되는 거지. 그리고 너도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너는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발자국 소리가 되는 거지, 다른 발자국 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땅 밑 굴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난 여우이기 때문에 빵은 먹지 않아. 그래서 빵의 재료인 밀은 내겐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런데 어린왕자야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지?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거야..."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아무 상관도 없지만 나와 관계 맺은 그 사람의 머리칼이 밀과 같은 색이기 때문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마저 사랑하게 되는 것~ 너무 당연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너무나 특별해 지는 것, 때론 나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점점 그것으로 이끌리고 나의 생각과 체질과 관심이 바뀌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제대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간다고 했던가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하는 소립니다만 저도 제 여자 친구와 점점 닮아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6년 가까운 시간을 교제하다보니 점점 서로에게 길들여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이 뭡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우린 원래가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성서 본문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면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배드로는 사실 무식하고, 믿음 없고, 소심하고 결국 예수님 까지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배신자 아닙니까?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소리를 듣던 철없던 수제자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성전 미문의 걷지 못하는 사람을 뛰게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누구를 보게 됩니까? 실상 이 전의 베드로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관계를 쌓는 일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안 되는 듯하고, 부족한 듯하지만, 예수께서 가신 길 함께 걷다보니, 조금 힘들 때 불평하고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힘내서 그 길 따라 걸으면서 길들여지다 보니, 진짜 해야 할 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정의가 땅에 떨어져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지 못할 때, 선생의 길 따라 걷길 소망하던 베드로가 결국 오늘의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여기 있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또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길들여지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우리 안의 사신 그 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 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모순된 삶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지 않겠습니까?

둘째, 만남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만남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만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통전적인 개념이자 경험입니다. 만남은 실상 과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이지요. 잘 보시면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놀라운 사역이 먼저일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바닷가의 어부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먼저 일 것 같습니까? 시간적인 순차로 보면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바닷가의 무식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이제 너는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되리라 한 것이 먼저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사도로서 성령을 받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성서에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부활사건의 고백들이 없었다면 베들레헴 그 비천한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와 우리의 만남, 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옥분 권사님? 권사님께서 지금 신앙생활하고 계신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까? 아님 권사님이 처음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이 먼저 일 것 같습니까? 권사님께서 지금 현재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신앙을 포기했다면 권사님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은 아무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만남의 순간이 전혀 기억되지 않을 지도 모르죠.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남은 항상 현재진행중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죽음이 끝이라고 하면 죽어야 끝날 수 있을까요?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나의 처음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죽이고 싶은 그 남자, 그 여자와의 처음 만난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지금 좋은만남교회를 섬기고 신앙공동체의 각 지체들을 만나는 이 경험은 결국 향후의 순간 순간 제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 교회를 섬기느냐에 따라 지금 순간의 경험과 기억의 의미가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남은 과거의 선언적인 고백이 아닌 항상 현재, 지금, 내가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를 살피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순간순간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여정길이기에 그 만남의 지속성이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 조금은 험난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쉬지 말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만남은 곧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만남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북한산에 등산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산을 오르며 수많은 동행자들을 만납니다. 가끔 길을 묻기도 하고, 잘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아마 산이 아닌 일반 길거리에서 만났으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사이겠지만 같은 길 걷고 있기 때문에, 같은 목적지를 향해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순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마음 문을 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다보면 중간 중간 다른 길로 그 산을 오르는 다른 동행자들도 만나게 되지요 결국 그 산의 꼭대기는 하나이기에 가는 길에 하나 둘 씩 만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가다보면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표지판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없다면 왠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산의 정상을 찾을리 없겠지요. 하지만 그 표지판 앞에서 머무는 것만으로 산에 오르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끔 약수터나, 그늘진 쉼터가 있을 때 잠시쉬어 갈 수 있지요. 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야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이와 같이 산을 오르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길의 표지판 되시는 예수를 만나는 것, 예수를 알았다는 것에, 나아가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에 골똘하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는 그야말로 표지판 아닙니까? 방향을 가르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야말로 하나님 형상의 모델 아닙니까? 길을 헤매다가 표지판을 만나면 매우 방갑습니다. 하지만 표지판 앞에서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순 없습니다. 표지판 앞에서 동행자들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야 궁극에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가는 동행자들은 나에게 그 표지판을 찾게 해줄 수 있고 또 그 표지판을 따라 길 가는데 아주 중요한 동행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난다는것은 곧 함께 걷는 ‘동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표지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이현주 목사님은 자신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동행의 법칙   
- 이현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왼손은 왼손 오른손은 오른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왼손은 왼손의 길을 가고
오른손은 오른손의 길을 가거라.
그러나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사실은 따로 놀 수도 없는 신세다.
일을 할 때에
작은 일 따위는 각자 알아서 하되
무거운 항아리를 들 때에는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도 맞잡지는 말아라.
두 손을 맞잡고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 말고는!


우리의 만남이 동행이 되어야 할텐데, 그 동행은 좀 이 시와 같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인생을 인정해주는 동행. 서로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해 주는 동행 그렇지만 힘든 항아리를 들 때 힘을 모을 수 있는 동행.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그러한 동행이자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요즘 법정스님께서 쓰셨던, '무소유'라는 책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법정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자신의 책 '무소유'를 더는 찍어내지도 출판하지도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데, 저는 다행이 그 책을 한 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의 무소유라는 글에서 "인간의 역사는 어찌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요즘의 자본주의 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사람의 만남 자체도 소유의 가치, 자본의 가치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 나 자신부터 만남을 경제와 이해관계의 계산 아래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길태'에 관한 자극적인 매스컴 기사의 밑바닥에는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탐욕과 욕망들이 이 죽음의 구조와 공모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공범자 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죽음까지 닿아있는 가치 자체를 전복시키지 않는 한 '좋은만남' 이뤄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께서는 오늘 성서의 장면을 보면서 이 때에 배드로에게 동전 한 닢이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얘기하십니다. 요즘 예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실제적인 변화와 감동이 없는 것은 바로 내 삶을 전부 내거는 진실이 아니라 나를 포장하는 돈 몇 푼의 가치로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힘이 아닌 진정한 복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 됨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그 사건이야 말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거늘, 그렇지 못한 것이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나면서 부터 걷지 못했던 자가 겪은 고난보다도 훨씬 심한 냉소와 고난을 견뎌야 하는 시대입니다.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사각지대로 내쳐지는 시대입니다. 진정으로 좋은 만남들이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의 삶의 자세와 방식으로, 세상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킬 온전한 복음으로 길들여지는 삶의 여정을 살아내는 만남들이 가득한 좋은 만남교회 교우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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